그 남편의 그 아내
소헌왕후 심씨
소헌왕후는 몸이 굳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심온이 길 위에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 억울한 누명을 쓴 것도 원통한데 소명을 할 기회마저 없이 한양에 당도하기도 전에 역적이 되어 죽임을 당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걱정되었으나 그들에게 연통을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었다. 소헌왕후는 궁 안에 갇혀 손발이 잘리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시아버지 태종은 남편에게 왕위를 넘기자마자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사은사로 삼았다. 왕의 신임을 받는 자만이 왕명을 받들고 명나라에 가는 사은사가 될 수 있다. 태종은 심온이 길을 떠나기 바로 전 그를 영의정으로 높여 버린다. 왕의 장인이 된 것만으로 이미 세도가가 된 그를 권력의 최고봉에 올려버린 것이다. 왕의 장인이자 영의정이 된 그가 명나라로 떠나는 날, 전송 나온 사람들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다고 실록은 그의 권세에 대해 기록했다.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은 그 해 겨울, 심온은 황제의 명을 받들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약을 받는다.
태종은 새어머니 신덕왕후 강씨로 인해 외척 세력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왕실과 나라를 위해 왕을 뒤흔들 수 있는 세력을 미리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종의 트라우마로 며느리의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 정숙하고 검소하여 칭찬이 자자했고 시부모에게 손주까지 척척 안겨주어 사랑받는 며느리였는데,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노비가 되었다.
서로 닮은 어린 부부
소헌왕후의 친할아버지는 고려 말 문하시중이었는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도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인물이었다. 삼촌 심종은 이방원의 왕자의 난을 도와 정사공신이 됐다. 조선의 개국과 태종의 왕위계승에 관계가 깊은 소헌왕후는 조선이 건국된 지 3년이 되던 해 태어나 태종의 임기 8년에 13살의 나이로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과 혼인한다. 당시 충녕은 11살이었다.
소헌왕후는 조선의 개국에 휘말려 있던 본가에서 떠나 외할아버지 안천보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안천보는 고려에서 면직당한 후,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치판에서 벗어나 지방에서 가야금과 책을 벗 삼아 살고 있었다. 충직했던 그는 너그럽고 후한 성품으로 주변에서 칭송받았다. 안천보는 어린 소헌왕후를 곁에 두고 사랑으로 품었다. 태종은 안천보를 보고 자란 소헌왕후가 조용한 성격에 서책을 좋아하는 셋째아들 충녕의 비로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왕통을 이을 것도 아닌 셋째 왕자는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편안히 즐기기만 하면 된다. 충녕대군은 공부뿐만 아니라 형들에게 가르쳐 줄 정도로 가야금과 거문고에 소질이 있었는데, 외할아버지를 보고 자라 악기에 대해 잘 알았던 소헌왕후는 그런 충녕과 잘 맞았다. 부부는 금실이 좋았다. 소헌왕후는 17세에 첫 딸 정소공주를 낳고 19세에 맏아들 문종을 출산한다. 20세에 셋째 정의공주, 22세 때 넷째 수양대군을 낳는다. 소헌왕후는 임신이 가능한 나이에 들어서면서 매해 출산을 거르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의지했다. 후에 세종은 출산한 노비들을 위한 휴가를 이전 8일에서 130일로 대폭 늘리고 남편에게도 30일의 출산휴가를 주도록 했다. 이런 파격적인 복지는 아내의 곁에서 출산과 육아에 대한 고충을 지켜본 남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격동의 시간,
슬픔과 비탄을 견디다
소헌왕후에게 정치는 무자비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왕위 계승에 공이 컸던 시어머니의 형제들이 세자에게 휘말려 억울하게 죽임 당하는 장면과, 형제들과 가문을 지키지 못한 시어머니의 한이 서린 세월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소헌왕후는 자신이 정치사에 휘말려 있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소헌왕후가 대군비로 있던 10년 동안 새나라 조선은 더욱 요동쳤고, 대군 부부는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새 그 중심에 서게 되었다.
충녕대군은 형님 양녕의 기행으로 급작스레 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세자에 오른 지 두 달 만에 조선의 네 번째 왕이 된다. 대개 세자로 책봉된 후 왕위 계승자로서의 교육을 10년 정도 받는 전례를 생각하면 충녕이 왕이 되는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그때 충녕대군은 21세, 소헌왕후는 23세였고 2남 2녀를 둔 만삭의 몸이었다.
온갖 정쟁을 거쳐 온 호랑이 같은 시아버지 태종이 선왕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중전의 자리에 오른 소헌왕후의 심정은 복잡했다. 그는 시어머니의 불행이 자신에게도 곧 닥칠 것이라고 짐작했다. 예감은 곧 현실이 되어 아비는 죽임을 당하고 어미와 형제들은 노비가 되어 귀양을 떠났다. 심온의 숙청에 힘을 실은 신하들은 소헌왕후의 보복이 두려워 중전을 폐비시켜야 한다고 태종과 세종을 흔들었다. 하지만 태종은 아들을 셋이나 둔 온화한 성품의 소헌왕후를 폐비시킬 마음이 애초부터 없었다. 그가 보기에 며느리 소헌왕후는 대군의 비보다 국모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는 그릇이었다.
소헌왕후는 매 순간 평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미와 형제들마저 잃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폐비가 된다는 것은 어미와 형제를 구할 기회를 잃는 것은 물론, 가문과 자식마저 위험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세종실록 내내 소헌왕후가 아비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이나 어미의 구명을 언급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기도를 올리고 제사를 지내며 불교에 의지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소헌왕후는 가족을 가슴에 묻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중전과 함께 인고의 시간을 보내던 세종은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소헌왕후의 어머니 안씨를 천인 신분에서 풀어주고 외조부 안천보의 집으로 불러들여 소헌왕후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다.
기록되지 않은 덕성
세종실록은 세종의 업적만큼이나 양이 방대하다. 우리는 그 기록의 양만큼이나 엄청난 업적을 해낸 세종을 위대하다고 기억한다. 반면 소헌왕후의 기록은 손에 꼽을 정도다. 내명부의 일은 실록에 기록되지 않는다. 왕후가 실록에 기록되려면 왕을 대신하여 일을 했거나, 어떤 이슈가 있거나 문제가 있어야 한다.
오히려 소헌왕후가 기록되지 않았기에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할 책임을 다했다고 평할 수도 있다. 그는 국모의 자리에 있을 때 단 한 번도 자신의 가문을 위해 사사롭게 힘을 쓰지 않았고, 정사에 휘말릴 어떤 여지도 만들지 않았다. 소헌왕후는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애쓰는 세종과 발맞추며 궁의 안정을 위해 내명부 살림을 성심으로 살폈다. 세종은 자신의 처세가 소헌왕후의 안정된 내조에 힘입었다고 여러 차례 밝힌다.
우리 조종 이래로 가법(家法)이 지극히 바로잡혔고, 내 몸에 미쳐서도 중궁의 내조에 힘입었다.
부인들을 위해 양로연을 열었다는 기사들 외에 소헌왕후의 업무 스타일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은 실록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세종 8년의 한 기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세종 8년 2월 한양에 큰 불이 난다. 인가 1,630호가 불에 타고 성인 32명이 죽은 대형 참사였다.*1 사고 당일 세종은 지방에 나가있었고 궁에는 만삭이었던 소헌왕후만이 남아있었다. 소헌왕후는 불이 났다는 말에 서울에 남아있는 모든 신하를 불러 급히 종묘와 궁, 백성들을 구하라고 명을 내린다. 대신들의 상황 보고를 들으며 상황에 맞는 전교를 내렸다. 당시 정승이었던 황희는 세종이 아닌 소헌왕후에게 일을 보고하며 마무리한다. 주저하지 않았고 적절한 대처를 하기 위해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모습이 세종과 겹쳐 보인다.
소헌왕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완벽히 그 역할을 수행한다. 소헌왕후는 온화하고 품이 넓어 후궁과 궁인에 이르기까지 두루 품었다. 후대의 왕들에게는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가 많다. 세종은 8명의 후궁을 두었고 그들에게서 10남 2녀를 낳았음에도 내명부를 흔들 풍파는 벌어지지 않았다. 소헌왕후와 더불어 세종과의 사이에서 6남 2녀를 출산한 신빈 김씨는 본래 소헌왕후의 궁녀였다. 소헌왕후는 신빈을 아꼈고 신빈도 소헌왕후를 존경하며 따랐다. 소헌왕후는 자신이 낳은 자식을 후궁에게 맡겨 키웠고, 후궁들의 자녀 역시 사랑으로 보살폈다. 어미를 잃은 문종의 원자를 세종의 후궁이었던 양씨에게 맡아 기르게 한 것도 소헌왕후였다.
중궁은 매우 성품이 유순하고 언행이 훌륭하여 투기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태종께서 매양 나뭇가지가 늘어져 아래에까지 미치는 덕이 있다고 칭찬하셨다. 이런 까닭으로 가도(家道)가 지금에까지 이르도록 화목하였다.*2
소헌왕후의 덕을 언급하는 실록의 내용이다. 소헌왕후의 덕성은 날이 갈수록 알려졌다. 세종 15년 4월의 기사에는 한 기생이 지방에 다녀오다 환궁하는 중궁 앞에 나아가 덕을 칭송하는 노래와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 24년에는 아흔이 넘은 할머니가 자신의 몸종을 왕후에게 바치고 싶다고 말할 정도*3 였다.
세종은 자신의 처세가 소헌왕후의 안정된 내조에 힘입었다고 여러 차례 밝힌다. 세종도 소헌왕후를 평생 예로 대했다. 실록에는 왕후가 방으로 들어올 때 세종이 항상 일어나서 맞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반자, 죽어서도 함께 하다
세종의 곁에서 담담하고 단단하게 자리를 지키던 평생의 반려자 소헌왕후는 장성한 자식 둘을 떠나보내고 마음의 병이 깊어졌고 곧 몸져 눕게 되었다. 세종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소헌왕후의 병소를 찾았다. 병세를 낫게 하기 위한 약재를 구하고 기도를 올리는 등 할 수 있는 일은 모조리 했다.
세종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소헌왕후는 52세의 나이로 아들 수양대군의 집에서 눈을 감는다. 세종이 왕후의 죽음 후 온 힘을 기울여 완성하려 했던 불경언해작업은 소헌왕후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세종의 절절한 마음이었다. 세종은 4년 후 54세의 나이로 왕후의 뒤를 따랐다. 세종은 죽기 전까지 다른 왕비를 맞지 않았으며 직접 소헌왕후와 자신의 합장묘를 명했다. 조선 최초의 합장묘였다.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 그리고 조선 최고의 왕후. 하늘이 성인을 낼 때는 그에 맞는 어진 이를 배필로 내린다고 하는데 소헌왕후와 세종은 진실로 하늘이 지은 배합이었다.*4
*2 세종 18년 10월 26일
*3 세종 24년 3월 4일
*4 세종 28년 6월 6일
도영
이야기와 사람을 좋아한다. 옛 사람과 옛 이야기의 보고인 조선왕조실록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