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왕실의 여인들 4. 폐비 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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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왕실의 여인들 4. 폐비 윤씨

실소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왕의 아내,
살해당하다

"만약 중국 조정에서 폐비 윤씨의 일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폐비되어 친정에 있다고 답하라. 만약 끝까지 캐 묻거든, 근심에 시달리고 파리해져서 죽었다고 대답하라."
- 성종실록 150권, 성종 14년 1월 8일

위 기사는 성종14년 폐비 윤씨가 죽은 지 약 6개월 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한명회와 성종의 대화내용이다. 질문의 뉘앙스에서 느낄 수 있다. 명나라에서는 폐비 윤씨가 죽은 것을 아직 모르는 상황임을. 그런데 좀 이상하다. 질투가 심해 쫓겨난 폐비 윤씨는 사약을 받아 죽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폐비 윤씨가 근심과 걱정 속에 스스로 죽어갔다니 말이다.

맞다. 폐비 윤씨는 사약으로 죽었다.*1 성종의 명에 의해서. 그렇다면 이건 성종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인데. 성종처럼 아주 작은 일도 꼼꼼하게 따지고 드는 임금이 거짓말을 하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것도 타살 당한 사람이 자살을 한 것처럼 말하다니! 성종은 도대체 왜 이런 거짓말을 한 것일까?

시작부터 어긋나다

조선에서 왕비 자리에 올랐다가 쫓겨 난 왕비는 11명이다. 그중 7명은 다시 복위되어 왕비의 칭호를 받지만 나머지 4명은 영원히 폐비로 남았다. 그 중에서 폐비의 전형이 된 사람, 성종의 왕비 폐비 윤씨다.

윤씨는 집현전 관리와 사간원 간원을 지낸 윤기견의 딸이다.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집은 가난했다. 윤씨는 18살에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궁에 들어 와, 3년 후 성종의 왕비가*2 죽자 후궁에서 왕비로 승격된다. 윤씨가 왕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때까지 유일하게 자식을 낳은 후궁이었고 당시에도 임신 6개월 째였기 때문이다*3. 그만큼 성종과 사이가 좋았다는 뜻이다.

윤씨는 22살에 세상을 다 갖은 기분이었을 거다.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데다, 생각지도 못했던 왕비 자리에 올랐고, 거기다 왕실에서 손꼽아 기다리던 원자(연산군)까지 낳았으니. 국모로서 맡은 소임을 톡톡히 해냈다고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갔다.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어떻게 된 게 남편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날이 갈수록 섭섭함이 켜졌다. 수소문해보니 왕이 후궁들 처소에 들락거리느라 자신에게 소원한 거였다. 왕실에 귀한 원자를 낳아 준 왕비를 뒷방 늙은이마냥 내쳐 놓다니! 윤씨는 섭섭하다 못해 순간 불끈 화가 치솟았다.

원자를 낳은 지 4개월 후, 3대비는*4 눈 앞에 놓인 작은 상자를 보고 고민에 빠졌다. 상자 안에는 후궁들이 갓 태어난 원자와 왕비 윤씨를 죽이려 한다는 내용의 투서, 독약으로 쓰이는 비상, 굿하는 책이 들어 있었다.

헌데 투서 내용과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뒷조사를 시작한 3대비전에서 사건의 배후로 왕비 윤씨를 지목한 것이다. 성종은 질투에 눈이 멀어 이런 일을 벌였다며 윤씨를 당장 폐위시키겠다고 난리를 친다. 신하들은 난감했다. 이 일과 윤씨의 관련 여부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었고, 만에 하나 관련이 있다 해도 누가 죽거나 다치지도 않았다. 신하들은 젊은 왕비의 일시적인 질투를 용서하라며, 원자를 낳은 국모를 질투 때문에 폐위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한다.

사건 조사 결과, 투서 건을 계획하고 실행한 사람은 윤씨 친정집 노비 삼월이로 밝혀진다. 삼월이의 잘못된 충성심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삼월이의 교형으로 사건은 일단락 지어지고, 성종은 신하들 앞에서 윤씨와 사건의 무관함을 앞장서 말한다. 하지만 윤씨는 이 일로 왕비로서의 위엄을 잃었다. 윤씨가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왕비로서 불미스런 일에 연루된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이제 폐비 논란을 겪으며 윤씨는 잘 알았을 거다. 언제라도 자신이 쫓겨날 수 있는 상황임을 말이다. 이쯤 되면 보통의 왕비라면 실추된 위신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조심에 조심을 기했을 것이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이!

하지만 윤씨의 생각은 달랐다. 솔직히 불명예스런 일에 오르내리긴 했지만 실수는 누구나 한다. 더구나 임금에게 용서 받은 일이었고 다 끝난 일이었다. 평생 죄인마냥 숨 죽여 살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일러스트 이민

끝없는 부부싸움

투서 사건 2년 후, 윤씨는 폐위된다.*5 

당시 셋째 아들을 낳은 지 몇 달 안 된 윤씨였기에 궁궐 안이 또 다시 떠들썩했다. 성종의 전격적인 폐위 명령에 정승, 승지, 6조 판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모든 신하들과 종친들이 폐위를 반대했다. 하지만 이번엔 돌아선 성종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도대체 2년 동안 성종과 윤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윤씨는 하루아침에 폐위된 걸까? 윤씨는 칠거지악 중 ‘말이 많으면 버린다.’ ‘순종하지 않으면 버린다.’ ‘질투 하면 버린다.’ 이 세 조항에 의해 폐위된다.

이 세 가지를 바꿔 생각해 보면, 말이 많았다는 것은 윤씨가 성종에게 바가지를 엄청 긁었다는 뜻이고,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3대비전의 뜻에 반기를 들었다는 의미일 거다. 여기에 질투를 했다는 걸 보니, 이번에는 윤씨가 비상으로 누굴 죽이기라도 했나 보다.

하지만 질투와 관련 해 드러난 사건은 단 하나뿐이다. 성종이 궁인 방에 있을 때 윤씨가 문을 휙 열어 제치고 쳐들어왔다는 것. 성종이 궁인과 단 둘이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왕비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성종이 많이 민망하고 화가 날 상황이었나 보다. 물론 이런 행동은 왕비로서 해서는 안 될 무례한 행동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게 질투일까? 의문이 든다. 질투를 했다면, 질투의 대상인 궁인한테 뭔 짓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이건 질투가 아니라는 뜻이다. 분노의 표출! 자신을 푸대접하는 남편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고, 해서 복수하듯 창피를 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문제는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 진 게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 2년 간 두 사람이 어떤 상태로 지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윤씨의 편지다.*6 

윤씨가 친정에 편지를 보냈다. 성종이 자신의 뺨을 때렸다며. 당장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서 남은 생을 살고 싶다고 하소연한 편지였다. 편지를 쓴 시기가 궁인 방문을 열어 제친 때인지, 아니면 다른 날 성종 면전에다 대고 윤씨가 폭풍 잔소리를 한 때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확실한 건 어떤 이유에서건 성종이 윤씨의 뺨을 때렸고, 맞은 윤씨는 억울하고 분함을 편지로 남겼다는 거다. 이 편지를 손에 쥐고 윤씨에게 따지러 간 성종은 당분간 서로 보지 말자는 통보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윤씨가 친정에 보낸 편지는 어떻게 성종 손에 들어갔을까? 이건 성종이든, 3대비전이든, 후궁이든 여하튼 누군가에 의해 윤씨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받고 있었다는 뜻이다. 왕비가 친정에 보낸 편지가 임금 손에 들어가 있으니! 이 정도면 아무리 기가 센 윤씨라도 예민해질 상황 아닐까.

길들여지지 않아 쫓겨나다!

하지만 부부싸움 했다고 윤씨를 폐위시킬 수는 없었다. 해서 성종은 윤씨를 2년 전 무혐의로 끝났던 투서건의 주범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미 주범이라며 삼월이를 죽여 놓고, 이제 와서 윤씨한테 주범이라고 한 것이다. 거기다 후궁을 질투했을 거라는 혐의를 넘어 아예 후궁을 죽이려 했다는 것으로 내용까지 바꿔 버린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윤씨가 당시 후궁뿐만 아니라 임금인 자신을 죽이려 한 것 일지도 모른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확실히 드러난 사건은 윤씨가 궁인 방문을 열어 제친 것과 친정에 편지를 보낸 것뿐이다. 물론 이 일이 작은 일이란 말은 아니다. 왕비로서 무례했고, 자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윤씨가 자기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윤씨 성격상 궁인 방문을 열어 제치고, 남편의 행동을 비난하는 편지를 쓰는 사건 사이에도 남편에게 화나고, 섭섭하고, 질책할 일이 있을 때마다 아마 가감 없이 감정을 토해 냈을 거다. 문제는 이런 행동이 성종뿐만 아니라 3대비전에 반기를 든 것으로 여겨졌다는 점이다.

"중궁은 매사 일을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겨, 삼전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무고하는 말을 들어서 폐비시키는 것이 아니다."
-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 6월 2일

여기서 삼전의 말이란 왕비의 후덕함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후덕한 왕비가 되는지에 대한 것이다. 3대비가 돌아가면서 윤씨를 앞에 앉혀놓고 1대1 면대면 특화교육을 시켰다. 하지만 교육은 실패했다. 6년 간 조선을 통치한 정희왕후도, 여자도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인수대비도, 조용히 사는 게 최선이라며 자중자애 할 것을 당부한 인혜대비도 윤씨 앞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했다.

자기주장이 강한 윤씨는 어른들의 뜻을 고분고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길들여져 참고 살기보다는 남편과 왕실에 대한 불만 사항을 3대비에게 적극적으로 표출했다. 왜 나한테만 이러냐고! 왜 내가 이런 푸대접을 받아야 하냐고! 이런 윤씨에게 돌아온 건 폐위였다.

이렇게 궁궐에서 쫓겨 난 윤씨의 삶은 어땠을까? 성종의 명에 의해 윤씨는 친정에 감금되어 살아야 했다. 형제들과 친족들이 집에 찾아 올 수도 없었다. 만약 누군가 윤씨 집을 찾는다면 이웃에서 신고해야 했고, 이를 어길시 벌을 받았다. 또 윤씨 집을 감시하는 관원은 밤낮으로 윤씨를 감시해야 했고, 이를 소홀히 하면 당연히 벌을 받았다.*7 또한 전왕비로서 최소한의 물품도 제공받지 못한 채 철저히 차단 당한 삶을 살았다.

한 번은 윤씨 집에 도둑이 든 사건이 발생한다. 신하들이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윤씨 집 담을 높게 쌓아주자고 청하자 성종이 길길이 뛰며 화를 낸다. 폐비가 제대로 방비를 못해 도둑을 맞았는데 왜 그 뒷감당을 나한테 하라고 하냐면서 아주 냉정하게 거절한다.

폐비 되고 3년 후인 성종 13년(1481), 조선은 유례없는 가뭄에 시달렸다. 극심한 가뭄에 정치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논의 하던 중 폐비 윤씨의 거취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8월 11일, 시독관 권경우와 대사헌 채수가 전에 도둑이 들었던 일을 들먹이며, 폐비에게 별궁을 만들어주고, 폐비 윤씨의 친정이 원래 가난한데 가뭄까지 들었으니, 아침저녁 끼니도 부족할 거라며 먹거리를 대줘야 한다는 말을 꺼낸다. 아무리 폐위되었다 해도 세자의 엄마이고, 한때는 왕비였는데 너무 박하게 대하는 거 아니냐면서. 중요한 건 이 말이 두 사람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성종은 폐비 얘기에 여느 때처럼 시작부터 화를 낸다. 폐비 얘기를 하는 건 세자에게 아첨해서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라며 신하들을 겁준다. 이건 폐비 건은 그만 떠들라는 소리다.

매번 이런 식이다. 성종은 폐비 얘기만 나오면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럴 만 했다. 폐비 윤씨는 성종의 치명적인 약점이었으니까. 가뭄 등 천재지변이 생길 때마다 폐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게 뻔했다. 그건 자신의 처사가 옳지 않다는 뜻이고, 그럼 결국 매년 신하들한테 잘못된 결정을 했다는 소릴 들어야 할 판이었다. 지울 수 없는 실책! 해서 폐비 윤씨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고, 윤씨가 모든 일의 화근처럼 느껴졌을 거다. 더욱이 세자가 커가면서 윤씨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일러스트 이민

 왕을 노예처럼 대했다?

폐비의 거취 문제가 도마에 오른 지 5일 만인 8월 16일, 성종은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이라고 명한다. 이렇게 갑자기? 도대체 무슨 이유로? 명색이 집이지, 3년 간 친정에 갇혀만 살았던 윤씨였다. 그런 윤씨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갑자기 죽인다는 걸까?

미래의 근심거리! 윤씨가 훗날 조선을 말아먹을 게 분명해서 미리 죽이겠단다. 이 말은 지금 죽어야 할 죄는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윤씨는 죽었다.

"3대비전에 공손하지 못했고, 임금인 나에게 흉악한 짓을 함부로 했다. 감히 나를 경멸해 노예와 같이 대우했다. 나한테 내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했다. 이 정도가 자질구레한 것들이니 더 이상은 말할 것도 없다."
- 성종실록 144권, 성종 13년 8월 16일

이 기사는 성종이 윤씨를 사사한 것을 서울과 지방에 알리라며 의정부에 내린 글의 일부다. 여기에 눈에 확 들어오는 글귀가 있다. 윤씨가 성종을 깔보고 업신여겨 노예처럼 대우했다는 것! 와, 진짜 대단하다. 윤씨의 기가 얼마나 셌는지 상상이 가는 대목이다. 성종처럼 세세하게 따지는 왕이 자기 입으로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말할 정도면 윤씨가 얼마나 막 대한 걸까?

“눈을 빼겠다.” “발자취를 없애버리겠다.” “팔을 끊어버리고 싶다.” 이는 성종이 윤씨한테 직접 들은 말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아무리 이런 말을 했을까? 그런데 윤씨 성격이라면 이런 말을 했을 것 같긴 하다. 왜, 부부싸움 하다보면 감정이 격해져서 욕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윤씨가 성종 면전에다 대고 대차게 육두문자를 쏘아 댄 건 아닐까? 아주 속시원하게 말이다. 

이것도 아니라면, 윤씨를 죽이기 위해 없는 말을 만들어 붙인 건 아닐까? 그럴 확률이 높다. 윤씨를 죽이기 위해선 윤씨에게 죽어 마땅할 죄가 있어야 하니까.

수상한 점이 있다. 윤씨를 죽일 때, 투서 건에서 나온 비상에 대해 말이 바뀐다. 앞서 성종은 윤씨가 비상으로 후궁을 죽이려 했고, 임금을 죽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폐위시켰다. 헌데 이젠 후궁 얘긴 쏙 들어가고, 그 비상으로 성종을 죽이려 했다는 것으로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윤씨가 성종을 죽이고 어린 아들을 왕으로 삼아 나라를 쥐락펴락 하려고 했고, 성종을 죽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쓰다 실패했다고까지 한다.

여하튼 성종이 나열한 윤씨의 죄가 사실인지 여부를 떠나 묻고 싶다. 이렇게 명확한 죄를 지었는데, 왜 명나라에 가는 한명회에게 거짓말을 시켰냐고?그건 성종 스스로 윤씨를 죽인 게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죽이지 않아도 될 사람을 굳이 죽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니 스스로 죽었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지.

윤씨는 자기주장이 강해서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았고, 생각보다 몸이 앞서는 다혈질의 사람이었을 뿐이다. 이런 성격 때문에 왕비로서 실덕했고, 아내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이 죽을 죄는 아니다. 이렇게 드세게 악다구니 치는 것을 죄악시한 게 문제라면 문제이지. 그리고 윤씨라면 늘 감정적으로 대처하고, 죽을 죄를 짓지도 않은 사람을 죽인 성종은 임금으로서, 남편으로서 도리를 다한 것일까?

윤씨는 끝까지 임금 앞에서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하고 싶은 말은 다하고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윤씨는 억울한 삶을 살지 않았고, 질투에 눈이 먼 악의 축도 아니었다. 하지만 죽음은 억울하다. 죽음 이후 윤씨에게는 질투의 화신이라는 오명이 덧씌워졌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비 시킬 때 윤씨는 전례가 되었고, 더 억울한 건 연산군의 폭정을 모두 윤씨의 탓으로 돌린다는 점이다. 연산군의 모진 성격과 지혜롭지 못한 것까지 이 모든 것이 다 엄마인 윤씨를 닮아서라고 말이다.*8 그런데 자식이 어찌 엄마만 닮을까? 

*1 성종실록 144권, 성종 13년 8월 16일
*2 공혜왕후, 한명회의 딸
*3 윤씨와 성종 사이에는 3명의 아들이 있다. 첫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죽었고, 둘째 아들이 연산군이다.
*4 3대비는 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 어머니인 인수대비, 작은 어머니인 인혜대비(예종 부인)을 말한다.
*5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 6월 2일
*6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 6월 5일
*7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 6월 7일
*8 연산군일기 63권, 연산 12년 9월 2일

 

필자 김석연

글향, 그 알싸한 꼬드김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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