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방랑자,
조선의 골목에 들어서다
월요일 저녁, 남산자락에 모여 「조선왕조실록」을 읽은 지 꼭 6년째다. 「조선왕조실록」이 주는 무게감도 만만치 않은데 거기에 6년이라는 세월까지 더해지니, 사람들은 우리가 뭐 대단한 일을 하는 줄 안다. 그래서 종종 받는 질문이 조선왕조실록을 ‘왜’ 읽느냐는 것이다. 수없이 받은 질문이지만 대답은 매번 곤궁하다. ‘왜’라는 질문은 특정한 ‘목적’과 ‘필연성’을 찾는 질문인데, 우리에게 실록 읽기는 그냥 재미있는 놀이에 가깝기 때문이다.
멤버만 봐도 그렇다. 주부, 회사원, 선생님, 번역가 등... 역사와는 관계없는 사람들이 더 많다. 덕분에 세미나는 자유롭게 진행된다. 여행으로 치자면 목적지 없이 이 골목, 저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방랑자에 가깝다.
그래서 마음 급한 전공자들이나 특별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은 세미나를 오래 견뎌내지 못한다. 하찮은 것에 발걸음을 멈추고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방랑자의 보폭을 참기 힘든 탓이다. 그러나 긴 여행을 떠나본 이들이라면 알 것이다. 목적지가 없을 때 비로소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을 말이다. 그제야 우리는 골목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놀이를, 민박집 주인의 무표정 뒤에 숨겨진 일상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그들과 나의 다름이 펼쳐지는 현장이고, 그렇게 마주한 ‘낯섦’이 여행의 진짜 이유다.
우리의 실록 읽기도 그렇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가 즉위한 1392년부터 철종이 사망한 1863년까지 472년간의 조선 조정의 일을 기록한 자료다. 잘 정리된 역사책이라기보다 날짜별로 정리된 일지에 가깝다. 한글 번역본을 기준으로 320쪽짜리 책 413권, 이 어마무시한 분량의 일지를 우리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모두 읽어나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인터넷에 번역본이 모두 공개돼 있고, 관련 DB도 잘 구축돼 있다. 키워드만 치면 관련 기사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실록을 모조리 읽기로 한 이유는 간단하다. 실록의 골목골목에 숨어 있는 조선의 일상, 그 민낯을 만나고 싶다! 무심한 어투로 짧게 남은 기록이야말로 사건의 이면에 숨어있는 인간의 욕망, 일상에 녹아있는 조선인의 무의식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검색이라는 차를 타고 휙 지나가서는 만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게 만난 조선은 교과서나 드라마로 배운 조선과는 많이 달랐다. 그들의 세계관 또한 그 전제부터 낯설었다. 그렇게 우리는 경험의 폭을 조선이라는 시공간으로 조금씩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실록에서 만난
조선의 여인들
왕의 정치를 기록하고 실록으로 편찬하는 전통은 중국에서 시작됐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실록은 자타공인 특별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기록됐다거나,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이라는 이유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치는 물론 조선의 자연현상, 민간의 풍습, 저자의 풍문까지 인간사 전반이 망라돼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실록의 목적은 선왕의 ‘정치’를 있는 그대로 기록해 후대 왕들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정치’라는 것의 범주다. 근대 이전 동아시아 사람들은 경제·사회 등 국가 정책 뿐 아니라, 자연현상과 신의 영역까지 모두 정치라고 보았다. 인간과 하늘의 기운이 서로 맞물려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실록에는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골목이 펼쳐진다. 어느 시골 여인의 쌍둥이 출산, 남산골에 창궐한 송충이 떼 그리고 어느 부유한 노비의 로맨스까지... 그 중에서도 최근 우리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조선의 여인들이다. 알다시피 조선의 정치적 주체는 남성, 그것도 사대부로 통칭되는 주류 남성이다. 때문에 실록의 기록 또한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고, 여성에 대한 기록도 꽤나 편향적이고 혹독하다.
그러나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종 이전의 여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랐다. 얌전하고 순종적인 조선 여인은 없고, 당당하고 씩씩한 여걸들이 활보했다. 한양 거리에는 간편한 옷차림으로 말 달리는 여인들이 있었고, 남편과 이혼하고 ‘돌싱’을 선택하는 이들도 흔했다. 실록에 남아있는 혀를 끌끌 차는 남성들의 탄식은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조선여인들을 반증했다. 그러니까 실록은 기록을 남긴 주류 남성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순종적인 현모양처가 결코 우리의 본래 전통이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그러니까 지금 읽고 있는 성종 대에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다. 악명 높은 조선의 삼종지도, 칠거지악이 조금씩 싹을 틔우는 분위기다. 그토록 활기찼던 조선의 여인들이 비좁은 집안에 유폐되는 과정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누군가는 사약을 받았고, 누군가는 머리를 베였으며, 누군가는 평생 첩으로 살았다.
그렇다고 여성들이 순순히 당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사위가 부인 집으로 들어가는 ‘장가’ 문화는 조선 후기까지 바뀌지 않았고, 남성들이 ‘음란한 여인’이라고 꼬리표를 붙이건 말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인들도 있었다. 조선이 버린 여인들, 그리고 버림받았으되 버려지지 않은 여인들. 우리는 그녀들을 통해 낯선 조선 여성을 만났고, 전통적 성역할에 의구심을 품었다. 낯선 조선 여성을 통해 오늘날 성관념의 뿌리를 만났다고 할까?
이 연재는 실록에서 만난 조선 여인들에 관한 여행기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실록을 천천히 모조리 읽고 있기에, 6년을 꼬박 읽고도 겨우 성종 13년까지밖에 오지 못했다. 우리의 여행기가 성종 13년에서 멈춰있는 이유다. 느리게 하지만 온몸으로 만난 조선 여인의 진짜 모습, 이제 독자들과 함께 그 낯선 여행을 시작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