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우리는 드라마와 사극을 통해 수많은 조선 왕후들을 만나왔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은 항상 엇비슷하다.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암투의 아이콘, 권력만 바라보고 질주하는 야욕의 화신.
과연 그랬을까?
왕정국가에서 왕후는 단순한 '왕의 아내'가 아니었다. 엄연히 왕의 정치적 파트너였다. 왕은 왕후 세력과 연대해야만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왕후들의 모든 활동은 정치적 활동이었다. 왕과 조정 대신들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실록에는 왕후들에 대한 기록이 매우 드물다. 외척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에서 배제하려 한 탓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도 남성들의 시선으로 축소, 왜곡된 것이 태반이다. 실록을 읽으며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다.
이번 ‘조선을 하드캐리한 왕후들’ 시리즈에는 이러한 안타까움을 담았다. 실록에 숨어 있는 왕후의 흔적 찾아내기, 그리고 여성의 시선으로 새롭게 복원하기. 이번 연재를 시작하는 소박한 이유다.
나도 개국 공신이다!
신덕왕후 강씨
조선이 창업된 지 꼭 4년, 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가 죽었다. 그의 나이 겨우 41세. 백전백승의 용맹함을 자랑하던 태조 이성계는 그의 죽음 앞에 목놓아 통곡했다.*1 좋은 무덤 자리를 찾겠다며 산천을 헤맸고, 끝내는 경복궁 코앞에다 묻었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이듬해 권근을 불러 명한다.
“내가 왕위에 오르기 전, 나라 안팎의 일로 분주할 때도, 집안을 일으켜 나라를 세울 때도, 진실로 신덕왕후의 공이 컸다. 왕후는 중요한 정사를 결정할 때마다 늘 부지런히 충고하고 조언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어디서 나를 가르치고 훈계하는 말(箴言)을 듣겠는가? 마치 훌륭한 정승을 잃은 것 같아 몹시 슬프다. 내 그 뜻을 후세에 전해야겠으니 그대가 글을 지으라.”*2
태조가 아내를 위해 흥천사를 세우며 당부한 말이다. 그런데 신덕왕후를 기억하는 태조의 태도가 흥미롭다. 아내로 기억하는 대신 정치적 동반자인 ‘정승’이라고 호칭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말, 즉 잠언(箴言)을 해주는 존재로 말이다. 조선의 창업과정에서 신덕왕후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동북면 호랑이와
버들잎 여인
신덕왕후와 이성계의 만남에는 유명한 설화 하나가 전해진다. 시냇가 버들잎 설화다. 말 달리던 장군은 물을 청하고, 빨래하던 여인은 버들잎을 띄워 바쳤다는 얘기다.*3
시냇가, 버들잎, 빨래하는 여인…….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 이야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여럿인 데다, 당시 혼인은 가문 간의 연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신덕왕후를 아주 오래도록 버들잎 여인으로 기억했다. 이유가 뭘까?
위 설화의 포인트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장군이 물을 받자마자 벌컥벌컥 들이켜는 행동파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여인이 침착하고 지혜롭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포인트는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려 말, 이성계는 몽골군·왜적·홍건적을 모두 물리친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덕분에 그는 군사력과 민심을 모두 거머쥐었고, 고려 정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이성계가 고향인 함경도를 떠나 개경 생활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다. 하지만 그는 정치에 영 소질이 없었다. 보통의 무장들이 그렇듯 말보다는 행동이, 이성보다는 직관이 앞섰다. 제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 성급히 물을 마시는 설화 속 인물 그대로다.
한편 신덕왕후의 친정은 노비 신분에서 최고 권세가로 성장한 집안이었다.*4 영특했던 신덕왕후는 개경 정치의 생리를 자연스레 터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혼인과 동시에 이성계의 상황도 간파했다. 고지식한 이성계는 노련한 귀족들의 상대가 못됐다. 이용만 당하다 희생되기 딱 좋았다. 하여 신덕왕후는 설화 속 여인처럼 버들잎을 띄운다. 이성계의 개경 생활을 직접 관리하고 디자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시급한 일은 안정적으로 귀족 사회에 안착하는 일이었다. 개경 귀족들은 은근히 변방에서 온 무장 이성계를 무시했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그만한 학문과 교양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집안에 번듯한 과거 급제자가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실록에는 이에 관련한 의미심장한 일화 하나가 전해진다. 태조 총서 70번째 기사다. 그에 따르면 이성계는 일찍부터 집안에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5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을 스승에게 보내 공부를 시켰다. 남달리 영특했던 이방원은 날마다 부지런히 글을 읽었다. 이를 지켜본 신덕왕후는 탄식했다.
저 아이가 어찌 내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을꼬?
이 기록은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 과거에 급제했다는 것으로 끝난다. 이방원의 뛰어남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그런데 조금만 틀어 보면 이야기는 조금 다르게 읽힌다. 도드라지는 것은 이방원이 아니라 신덕왕후다.
우선 이성계가 오래도록 유학을 동경했다는 말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당시 이방원에게는 네 명의 형이 더 있었다. 그런데 나머지 형들은 모두 학문과 담을 쌓았다. 모두 자연스레 아버지를 따라 활을 쏘고 말을 탔다. 누구도 그들에게 학문을 적극적으로 권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던 이성계가 개경생활을 시작하며 갑자기 아들들에게 공부란 걸 시키기 시작했다. 신덕왕후와 혼인한 그 무렵이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이방원의 공부를 응원하고 독려한 사람은 이성계도, 친모도 아니다. 신덕왕후다. 그것도 ‘내 아들이라면 정말 좋겠다’라는, 의붓아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면서 말이다.
신하들이 인정한
창업의 주동자
이성계의 과감한 결단력과 신덕왕후의 섬세한 정치력. 둘의 결합은 꽤나 효과를 발휘했던 모양이다. 이성계와 동지들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커지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의 중심이 됐고, 그 곁으로 젊은 사대부들이 몰려들었다. 이제 그의 거취는 자신만의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성계의 태도였다. 왜적들이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떨었다던 천하의 이성계. 하지만 창업의 문제만큼은 끝까지 머뭇거리며 주저했다. 이성계가 정도전·남은 등에게 함경도로 돌아가고 싶다는 속내를 내비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수하들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들은 정도전, 남은 등이 이성계의 귀향을 부추긴다고 오해했다. 자칫 창업의 길이 어그러질 수 있다고 판단한 그들은 곧장 신덕왕후에게 달려갔다.
정도전과 남은이 함경도로 돌아갈 것을 청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일이 어그러질 것입니다. 그들을 없애는 게 좋겠습니다.*6
창업을 방해한다면 누구라도 죽이겠다는 이성계의 수하들. 그들은 이 중차대한 일을 누구도 아닌 신덕왕후와 의논했다. 그들이 보기에 창업을 주도하고 있는 이는 맏아들 이방우나, 장원급제한 이방원이 아니었다. 신덕왕후였다.
결국 이 일은 오해가 풀리며 해프닝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신하들의 판단대로 신덕왕후는 창업의 마지막 매듭을 짓는 데 성공한다. 창업에 대한 이성계의 결단을 끌어낸 것이다.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의 허락없이 정몽주를 죽였을 때였다.
알다시피 정몽주는 조선 창업을 끝까지 반대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성계에게 정몽주는 젊은 시절 전투를 함께 치른 전우였다.*7 존경하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런 정몽주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할 이성계였다.
그러나 신덕왕후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 앞에 펼쳐진 선택지는 둘 뿐이었다. 고려의 숨통을 끊거나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거나. 이제 창업의 길은 더 이상 한 집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후퇴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대부들의 좌절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신덕왕후는 모두를 대신해 이성계 앞에 나섰다. 이성계의 분노가 하늘을 찔러 감히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할 때였다. 실록에 따르면 신덕왕후는 여색(厲色), 그러니까 분노한 기색으로 단호하게 말한다.
공께서는 항상 대장군이라고 자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토록 놀라고 두려워하신단 말입니까?*8
두려워 말고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이라는 촉구였다. 그리고 이튿날, 이성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신덕왕후의 권고대로 왕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공신의 몫을 요구하다
이후 신덕왕후는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됐다. 태조의 애정과 신뢰는 극진했다. 그리고 장성한 전처의 자식들을 제치고, 자신의 어린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세웠다. 그야말로 승승장구. 살아생전에는 그랬다.
그러나 신덕왕후가 죽은 이후 상황은 역전된다. 태종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아들들과 사위를 모두 죽였다. 그리고는 신덕왕후가 조선의 왕비임을 부정했다. 왕후의 예로 제사 지내지 않았고, 신위를 종묘에 모시지도 않았다. 도성 안에 있던 무덤을 도성 밖으로 옮겼고, 무덤의 석재들은 청계천 돌다리로 썼다.
실록은 이 모든 불행이 신덕왕후의 무모한 권력욕 탓이라고 기록한다. ‘적자(嫡子)인 맏아들 왕위 계승’을 어긴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태조실록이 태종대에 편찬된 탓에 태종의 논리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그러나 신덕왕후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세자 책봉 당시 맏아들의 왕위 계승은 어차피 불가능했다. 이성계의 맏아들 이방우는 정치에 뜻을 접고 함경도로 낙향했다.*9 유력한 후보라고 자처하는 이방원도 다섯째였다. 그나마도 태조는 이방원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정몽주를 죽인 일을 용서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렇다면 신덕왕후의 아들이라고 안 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신덕왕후는 자타공인 개국의 일등 공신이었다. 당시 조준은 “위태할 때 큰 계책을 세우는 데 참여해 그 내조의 공이 빛나서 이루 다 말할 수 없다”*10고 신덕왕후를 평가했다. 사대부들도 신덕왕후의 공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대부들은 신덕왕후의 아들을 지지했다.
이렇게 본다면 신덕왕후의 불행은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 할 수 없다. 태종 이방원의 야심을 과소평가한 일, 그것이 신덕왕후의 진짜 뼈아픈 실책이었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실록에서도 신덕왕후의 흔적을 지우려 무던히 애썼다. 신덕왕후를 인정하고서는 자신의 왕위를 정당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신덕왕후는 실록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그만큼 그의 공이 컸다. 만일 신덕왕후에 대한 기록이 온전했다면 어땠을까? 우리 역사에 꽤 근사한 여성 책략가로 남았을지 모를 일이다.
*2 『동문선』‘정릉원당조계종본사흥천사조성기’, 권근, 한국고전종합DB
*3 정조 23년 6월 10일, 『다산시문집』‘신덕기적비첩에 발함’, 정약용, 한국고전종합DB
*4 『고려사』 열전 강윤충 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 이성계는 동북면에 신의왕후 한씨와 개경에 신덕왕후 강씨, 두 명의 정부인을 뒀다.
*6 태조총서 120번째 기사
*7 『고려사』 열전 정몽주 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8 태조총서 131번째 기사
*9 정조 13년 2월 16일
*10 태조 5년 8월 16일
필자 정기재
오래된 건 다 좋아하는 옛이야기 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