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왕실의 여인들 2. 세자빈 봉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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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왕실의 여인들 2. 세자빈 봉씨 (2)

실소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가장 보통의
조선 여인

첫 번째 세자빈을 내친 후, 고르고 골라 뽑은 두 번째 세자빈 봉씨. 세종은 이 아름답고 해맑은 세자빈에게 ‘아내로서 순종하는 도리’*1를 기대했다. 그러나 봉씨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고,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조선 전기 보통의 여염집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종과 문종은 이런 봉씨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당시 세종은 온 백성들을 유교적 윤리로 교화시키려는 의지에 불타고 있었다. 조선 최초의 윤리책인 <삼강행실도>를 편찬한 것도 이 무렵이다. 세종은 그림을 그려서라도 백성들에게 유교적 도리를 가르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자신의 며느리가, 그것도 장차 국모가 될 여인이, 자신의 은밀한 욕망 하나 다스리지 못하다니...... 세종에게는 상상치 못할 ‘상스러운 짓’이었고, 문종에게는 용서치 못할 ‘사나운 짓’이었다.

감시와 고립
세자빈 길들이기

처음에는 세종도 봉씨의 교육에 열심이었다. 봉씨도 가르치기만 하면 조선의 여인, 왕실의 여인이 될 거라 믿었다. 그래서 입궁하자마자 선생님을 두고 <열녀전>을 가르치게 했다. 세종이 직접 내린 명이었다.

그러나 봉씨는 책 속의 여인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욕망은 꾹꾹 누른 채, 가문에 대한 책임으로만 살아가는 여인들. 그에게는 이해 못할 삶이요, 숨 막히는 강요였을 것이다. 하여 봉씨는 며칠 만에 책을 뜰에 내던지며 소리친다.

“내가 어찌 이 책의 가르침대로 살겠는가?” - 세종18년 11월 7일

소식을 들은 세종은 몹시 당황했다. ‘시아버지의 명인데도 감히 이처럼 무례’하다면 다른 일은 볼 필요도 없었다. 하여 세종은 그 즉시 세자빈의 교육을 중단한다. 괜히 글을 가르쳤다가 정치에 관여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문종의 시선은 더 차가웠다. 어려서부터 줄곧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랐던 문종. 그는 훗날 왕위에 오른 뒤에도 항상 아버지를 닮고 싶어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봉씨에게 더 엄격한 유교적 잣대를 적용한다. 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항상 “총애하면 바로 투기하고 사나워져서 칼날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봉씨를 비난했다. 스스로 황제가 됐던 한나라의 여태후보다도 더 큰일을 낼 여인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그렇게 ‘사나운’ 봉씨를 길들이기 위해 문종이 택한 방식은 냉대였다. 실록에는 ‘세자가 혼인한 이후로 금슬이 좋지 못한 지 몇 해’라는 기록이 있다. 세종과 소헌왕후가 타일러도 좀체 말을 듣지 않았다는 기록도 함께 말이다. 문종이 혼인 초기부터 봉씨를 노골적으로 무시한 정황이다.

그래서인지 왕실은 봉씨가 친정과 소통하는 것도 민감하게 제한한다. 실록에 따르면 중국에서도 ‘제후에게 시집간 딸은 일 년에 한번 친정을 방문’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봉씨가 친정을 방문한 것은 최소 혼인 후 1년 10개월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제서야 세종은 세자빈의 친정방문과 친정 부모의 궁궐 방문을 논의하기 시작한다.*2 

이는 당시 조선의 일반적 풍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민간에서는 남편들이 아내의 집에서 들어가 사는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다. 여인들이 시집살이를 하기는커녕, 아예 친정에서 아이를 낳고 키웠다. 아무리 왕실은 다르다지만 봉씨에게는 분명 가혹한 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번은 봉씨가 남은 궁중의 물건과 음식을 친정어머니 집에 보내게 해달라고 청한다. 아마 좋은 물건과 맛있는 음식을 보며 친정어머니 생각이 났던 듯하다. 그러나 문종은 ‘옳지 않다’며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자 봉씨는 자기가 먹다 남은 음식을 몰래 친정에 보낸다. 그러나 이 일은 즉시 문종에게 보고되고, 문종은 다시 이를 금지시킨다. 그러자 봉씨는 더 조심하며 물건을 보내고, 문종은 다시 이를 문책하고*3 ....... 

일러스트 이민


냉대 그리고 불안증

이 사건은 봉씨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세자빈은 친정에 음식을 보내면서 문종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봉씨의 당부는 먹혀들지 않았고, ‘절대 아뢰지 말라’고 한 말까지 그대로 문종에게 전달된다. 사방이 문종의 눈과 귀가 되어 봉씨를 감시한 정황이다.

궁인들이 이렇게까지 봉씨의 말을 무시한 배경에는 문종의 냉대가 있었다. 문종의 차가운 태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자연히 자식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세종과 소헌왕후는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봉씨가 궐에 들어 온지 1년 만에 세자의 후궁 간택령을 내린다.*4 그리고 명문가 여식을 세 명이나 후궁으로 들였고, 그 중 승휘 권씨는 곧바로 임신에 성공한다. 훗날 봉씨를 대신해 세자빈이 되는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다.

봉씨의 불안증이 시작된 것은 이즈음의 일로 보인다. 봉씨는 권씨의 임신 소식을 듣고 “권씨가 아들을 낳으면 우리들은 쫓겨날 것”이라며 통곡했다고 한다. 가뜩이나 고립된 처지였던 봉씨. 그가 살아갈 유일한 방법은 아들을 낳는 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희망마저 사라질 판이니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밖에.

가짜 임신소동이 벌어진 것도 이 무렵이 아닐까 한다. 세종의 권유로 문종이 몇 차례 봉씨를 찾았는데, 봉씨가 임신을 했다고 밝힌 것이다. 그런데 한 달 후 봉씨는 돌연 유산 소식을 전한다. 놀란 소헌왕후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지만 어디에도 유산의 흔적은 없었다. 가짜 임신 혹은 상상 임신이었다.

이후 봉씨는 속수무책 망가지기 시작한다. 매일 큰 사발로 술을 마셨고, 만취 상태로 궁인에게 업혀 뜰을 돌아다녔다. 마시다 모자라면 사가에서 술을 받아오게 했고, 아버지의 상중에도 술을 마셨다. 희망 없는 자포자기, 대책 없는 알콜홀릭이 된 것이다.

화장실 벽 틈으로 본 자유

이후 봉씨의 행적은 그야말로 눈뜨고는 못 볼 지경이다. 세자의 생일 선물은 제쳐둔 채 내시들에게 줄 선물을 만들고, 궁녀들의 화장실 문틈으로 외간을 훔쳐보고........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자면 봉씨의 행동이 어딘가 짠하다. 내시들에게 선물을 줬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세종은 봉씨의 폐위 사유를 설명하며, 봉씨가 세자의 생일 선물은 뒷전 인채 내시들에게 줄 주머니, 자루, 무릎 보호대를 만들었다고 비난한다. 앞에 사랑 얘기를 배치해 은근히 천박하다는 뉘앙스도 풍긴다.

그런데 내시들에게 준 선물은 연정이라기보다 뇌물일 가능성이 높다. ‘나 좀 미워하지 마세요’라고 호소하며 준 뇌물. 실록에 따르면 봉씨가 친정에 음식을 보낼 때 특히 경계한 사람이 내시들이었다. 내시들은 문종을 대신해 봉씨를 감시했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트집 잡았다. 하다못해 먹다 남은 음식을 선반에 보관했다 꺼내 먹은 일도 트집거리였다. 그렇게 내시들의 보고를 받은 문종은 봉씨를 문책하고, 봉씨는 다시 술을 마시고......

이처럼 세자빈과 내시의 관계에서 실질적인 ‘갑’은 내시였다. 그러니 봉씨는 어떻게든 내시들에게 잘 보여야 했을 거다. 그래서 준 것이 직접 바느질 해 만든 주머니, 자루, 무릎보호대였다. 하찮지는 않지만 결코 귀하지도 않은 물건들. 일국의 세자빈이 내시들에게 줄 수 있는 게 고작 그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상례 동안 술을 마신 일도 사연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봉씨는 친정에 자기 몫으로 내려진 술을 보냈다. 그런데 소식을 들은 문종은 이번에도 이를 금지시킨다. 자신의 술조차 마음대로 친정에 보낼 수 없게 된 봉씨. 그는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이 마셔버리겠다며 평상시처럼 술을 마신다. 따져보면 봉씨가 상중에 술을 마신 건 패륜이 아니라 울분이었던 거다.

이런 측면에서 화장실 벽 틈 사건은 꽤나 상징적이다.*5 봉씨가 동궁을 수리하는 동안 잠시 궁궐 밖 종학(宗學)에 거처했을 때의 일이다. 봉씨는 궁녀들의 화장실에 가서 벽 틈으로 ‘외간’을 훔쳐봤고, 이 일은 봉씨의 중요한 폐위 사유가 된다. 

그런데 당시 봉씨의 처지는 퍽이나 딱했다. 권 승휘는 딸을 낳았고, 봉씨는 상상 임신으로 어른들에게 딱 찍혔다. 자기 편 하나 없는 그 숨 막히는 궁궐. 과연 봉씨가 보고자 한 것은 외간 남자였을까? 궁궐 밖 자유를 향한 갈망, 살기 위한 숨구멍은 아니었을까?

수많은 조선의 봉씨들

세자빈 봉씨는 당시 조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여인이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바짓단을 묶고 말 달리고, 시집보다 친정과 더 가까웠던 조선 초기의 여인. 그런 봉씨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궁궐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정확히는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가부장적 질서에 순종하기를 요구받으면서 부터다.

그 무렵 세종이 편찬한 <삼강행실도>에 따르면 여성은 남편에게 정조를 지키고, 자손에게 공덕을 쌓아야만 하는 존재다. 어디에도 여성의 욕망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렇게 조선의 왕실은 봉씨에게 욕망하는 존재를 버리고 가부장제의 일부로만 살아갈 것을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봉씨는 보는 것, 듣는 것, 먹는 것, 만지는 것, 말하는 것을 모두 통제 당했다. 오감이 막힌 단절 속에서 누군들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왕실에서 쏘아 올린 가부장적 질서는 이후 일반 사대부의 집안까지 확대된다. 그리고 수많은 봉씨들이 탄생한다. 그러니까 봉씨의 좌절은 그 개인의 일탈이나 부도덕이 아니다. 이후 조선 여인들이 겪게 될 폭력적 강요의 예고편이자, 결코 평화롭지 않았던 가부장제 정착의 실제 현장이다.

이쯤해서 잠깐, 그렇다면 봉씨는 이후 어떻게 됐을까? 다행히도 궐에서 쫓겨난 이후 봉씨의 행적은 묘연하다. 훗날 폐비 윤씨처럼 사약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어쩌면 봉씨는 궐 밖에서 다시 옛날의 생기를 되찾았을지 모른다. 

*1 <삼강행실도> 서문, 세종 14년 6월9일

*2 세종13년 8월12일

*3 세종18년 10월26일

*4 세종12년 12월14일

*5 세종18년 10월26일

 

필자 정기재

오래된 건 다 좋아하는 옛이야기 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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