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킴의 듣는 영화 3. 8명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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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킴의 듣는 영화 3. 8명의 여인들

미즈킴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유쾌한 악녀들의 서스펜스

<8명의 여인들(2002, 8 femmes)>

“하룻밤 사이 당신의 남편, 아버지, 혹은 오빠가 살해된 채 발견된다면?”

영화 <8명의 여인들>은 중년의 사업가이자 한 집안의 가장인 마르셀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아내, 장모, 두 딸, 처제, 여동생, 두 명의 하녀로 설정된 8명의 여인들은 저마다의 ‘심증’을 바탕으로 범인 찾기에 나선다. 경찰에 신고를 하려 하지만 누군가가 이미 집안의 전화선을 끊어 놓고 유일한 이동수단인 자동차의 엔진마저 망가뜨린 상태다. 폭설이 쏟아지는 아침, 오도 가도 못한 채 외딴 저택에 갇힌 8명의 여인들은 알고 있다. 범인은 그들 중에 있다고.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195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1958년 출간된 프랑스 극작가 로베르 토마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오랫동안 ‘여성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는 프랑수아 오종 감독은 이 희곡을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블랙 코미디 뮤지컬 영화로 재탄생시켰다. 게다가 연극적 요소가 다분한, 적잖이 실험적인 작품에 다니엘 다리유, 카트린 드뇌브, 이자벨 위페르, 에마뉘엘 베아르 등 프랑스의 대표 여배우들이 출연하면서 세계 영화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 이하 영화 <8명의 여인들>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알리바이 속 드러나는 욕망의 랩소디

영화는 ‘살인’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폭소를 유발한다. 마르셀을 둘러싼 8명의 여인들은 하나 같이 ‘과도하게’ 탐욕스럽고 폭력적이다.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상호 심문을 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비밀과 욕망이 서서히 밝혀진다.

마르셀에게 얹혀살고 있지만 정작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사위에게 거짓말을 하는 장모 마미(다니엘 다리유). 심지어 마미는 자신의 남편을 독살시킨 경력(?)이 있다. 사랑하는 남자가 있음에도 마르셀의 재력을 보고 결혼한 아내 가비(카트린 드뇌브)는 그의 사업 파트너인 자크 파르누의 내연녀다. 마르셀의 처제 오귀스틴(아자벨 위페르)은 형부를 사랑하고 있으며, 여동생 피에르뜨(화니 아르당)는 가비와 마찬가지로 자크 파르누와 사랑에 빠져 오빠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인물이다. 설상가상으로 집의 하녀로 일하는 루이즈(에마뉘엘 베아르)는 마르셀의 숨겨진 정부였으며, 또 다른 가정부 샤넬은 마르셀의 여동생 피에르뜨의 동성 연인이었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첫째 딸 스종(비에르지니 르도엔)은 자신이 아버지인 마르셀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고백하며, 순진한 소녀인 줄 알았던 둘째 카트린(뤼디빈 사니에르)은 알고 보니 이 모든 살인 사건을 계획한 발칙한 주동자였다.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마르셀과 함께 그가 마치 살해 당한 것처럼 일을 꾸민 거였다. 카트린은 “아빠를 사랑하는 이는 나밖에 없다”며 의기양양해하지만 마르셀은 딸의 두 눈 앞에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살인, 근친, 간음, 탐욕, 동성애 등 자극적인 소재를 총동원한 영화의 스토리는 그야말로 막장이다. 서로를 시기하고 의심하며 욕설과 신체적 폭력마저 마다하지 않는 8명의 여인들은 마치 불쌍한 가장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를 깊이 들여다보면 이 탐욕스러운 여인들 또한 가부장제의 가장 큰 피해자이며 욕망을 지닌 보통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미는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딸에게 말한다.

“여자 팔자란 그런 거야. 시대에 따르고 다르고 세대에 따라 달라.
너희 아버지는 매우 총명했고 날 사랑과 존경으로 대해주는 진정한 신사였지만 난 참을 수가 없었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평생을 산다고 생각해 봐. 그 때는 이혼을 생각할 수도 없었어.”

살인을 통해 남편으로부터 벗어날 수밖에 없었던 마미의 선택은 사회가 그 시대의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여성에 대한 것만은 아니리라. 자신의 가정부 샤넬이 피에르뜨와 동성 연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가비는 ‘추악한 짓’이라며 그들을 비난하지만, 정작 피에르뜨에게 끌리는 자신의 모순된 욕망을 깨닫는다. 8명의 여인들이 보여주는 웃지 못한 코미디 속에서 우리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규범과 체면이 얼마나 허망하고 폭력적인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6,70년대 샹송의 재해석

뮤지컬 영화라 하면 보통은 뛰어난 가창력과 화려한 댄스를 기대하기 마련이지만 8명의 여인들은 담담하게 노래 부른다. 영화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오종 감독은 프랑스와즈 아르디(Francoise Hardy)의 히트곡을 비롯해 6,70년대에 인기를 누렸던 유행곡들을 차용했다. 8명의 주인공들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노래를 재해석하며 내면에 감춰진 욕망을 드러낸다.

프랑스와즈 아르디와 이자벨 위페르가 부르는 ‘Message Personnel’(1973). 극 중 오귀스틴은 이 노래를 통해 형부를 향한 내밀한 감정을 표현한다.

마리 라포레와 비에르지니 르도엔이 부르는 ‘Mon amour mon ami’(1974). 스종은 자신의 연인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노래를 부르지만 아이의 아버지가 마르셀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노래는 새로운 상상을 발현시킨다.

조르주 브라센과 다니엘 다리유가 부르는 ‘Il nya pas d'amour heureux aragon’(1944). 프랑수아즈 아르디, 니나 시몬 등의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바 있다. 영화의 말미에 마미는 이 노래를 통해 “행복한 사랑이란 없다”며 우리 모두의 외로운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극이 전개되는 내내 서로 의심하고 미워하던 여인들이 노래를 부를 때만은 서로의 욕망과 스토리에 감화되는 점 또한 흥미롭다. 영화는 마르셀을 죽인 범인을 찾아가는 한 편의 과정이지만, 마르셀의 자살로 결국 8명의 여인이 모두 공범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그 중 누구에게도 비난의 화살을 겨누기 어렵다. 8명의 여인 속에서 우리는 되레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9년 3월 현재 왓챠플레이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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