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라 그레이조이:
강철 군도의 도망자
야라 그레이조이의 첫 등장을 기억하는지. 야라 그레이조이가 테온 그레이조이를 놀려 먹는 여성으로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테온 그레이조이의 바보스러움을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장면은 야라 그레이조이라는 인물에 대한 예고편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가진 성별을 이용하는 데에는 관심이 있어도, 자신의 정체성을 여성으로 정의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 창녀와 뒹굴 정도로 행동 양식은 이미 헤테로 남성에 가까운, 중년 남성 전사들을 이끄는 강철 군도 함대의 함장.
야라 그레이조이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던 발론 그레이조이의 유일한 딸이다. 하지만 세 명이나 있었던 아들들은 소용이 없었다. 발론 그레이조이는 강철 군도의 독립을 주장하며 <왕좌의 게임> 시즌 1 시작 8년 전에 반란을 일으켰고, 그 전투에서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사망해 버린 데다 반란도 결과적으론 실패했다. 그 대가로 유일하게 남은 아들인 테온 그레이조이는 반란을 진압했던 스타크 집안에 패배의 상징으로 보내졌다. 발론 그레이조이의 아들들은 그야말로 ‘멸종'한 것이다. 이방인에게 매우 배타적인 강철 군도의 문화를 고려했을 때, 발론 그레이조이에게 테온 그레이조이는 그야말로 살아 있느니만 못한 자신의 수치이며 아들 노릇조차 제대로 못하는 군식구다. 순식간에 비어 버린 ‘아들’의 자리는 야라 그레이조이가 채울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의 선택임에 동시에 의무였다.
그는 비어버린 아들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좋은 ‘아들'이 됐다. 그는 무예에도 능하며, 함대를 능숙하게 지휘하고 그와 함께 전투를 겪고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수하들이 있다. 테온 그레이조이를 구하기 위해 윈터펠의 북부를 소수정예로 직접 침공한 그의 대담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는 여느 귀족 가문의 남성 전사보다 훨씬 더 대담하며 실제로 그 대담함이 오만함이 되지 않도록 작전을 실행할 지휘 능력과 전투 능력이 있다. 결국 그 모든 장애물을 헤치고 성의 방어를 깨 부순 뒤에 만난 것이 테온 그레이조이가 아니라 ‘구린내 릭'이었던 사실은 역설적이었다. 구린내 릭은 이미 남성성의 심볼인 성기조차 제거당한 채 친누나가 탈출의 손길을 뻗어도 탈출하기를 거부한다. 그런 그에게 야라 그레이조이는 말한다.
“너는 더 이상 그레이조이가 아니다.”
야라의 발언은 차라리 바람에 가까웠을 것이다. 더 이상 테온 그레이조이가 그레이조이가 아니고, 발론 그레이조이에게 남은 선택지는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담긴 말이다.
하지만 발론 그레이조이에게는 야라 그레이조이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발론 그레이조이는 ‘그레이조이 가문의 대가 끊기게 생겼다'고 야라 그레이조이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주고는 했다. 야라 그레이조이는 그의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강철군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미 야라 그레이조이가 칼을 휘두르며 함대를 지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여성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고 여기고, 왕의 자리를 꿈꾸는 야라 그레이조이를 비웃는다.
발론 그레이조이가 살해당한 뒤 열리는 킹스무트에서 야라 그레이조이는 그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거의 닿을 뻔 했다. 발론 그레이조이의 유일하게 남은 적자인 테온 그레이조이의 지지선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라 그레이조이는 그가 누구도 본 적 없는 거대한 강철 함대를 만들어 세븐킹덤 본토를 장악하겠다는 공약을 걸었다. 이에 전사들 역시 흥분해서 그를 지지했다.
하지만 발론 그레이조이의 동생인 유론 그레이조이가 등장해 왕좌의 꿈은 사그라든다. 그는 무엇보다 남자였고, 남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새로운 공약을 내걸었다. 바로 강철 함대를 이끌고 협해를 건너 대너리스 타르가리옌과 결혼해 그와 그의 드래곤을 부려먹겠다는 것. 무식하고 멍청하고 용감한 발언이지만 강철 군도의 전사들은 유론 그레이조이의 공약에 더욱 마음을 뺏긴다. 어쩌면 그것은 헤테로-남성-정복자-전사의 정체성을 꿈꾸는 집단에게 안성맞춤인 공약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게 실제로 가능할 지는 몰라도. 실제로 유론 그레이조이는 그의 포부를 말하며 “그의 커다란 거시기를 용녀에게 선물해 주겠다"고 낄낄댄다. 저속하고 음험하지만 전사들은 환호한다. 남편 없는 여자가 얼마나 ‘굶주렸'겠냐며. 그렇게 유론 그레이조이는 발론 그레이조이를 살해한 사실을 고백하고도 그대로 왕위에 오른다.
유론 그레이조이가 왕이 된 후 가장 먼 저 한 일은 자신의 승계 정통성을 위협하는 야라 그레이조이와 테온 그레이조이를 죽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야라 그레이조이는 한 발 빨랐다. 그는 자신의 통솔력을 바탕으로 강철 함대에서 가장 좋은 배 100척을 뽑아 이끌고 먼저 에소스로 향했다. 재빠르고 영리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대너리스 타르가리옌이 있는 미린까지 항해해 성공해 그의 동맹을 먼저 이끌어 낸다. 유론 그레이조이, 혹은 남자들의 멍청함을 대너리스와 함께 비웃으면서 말이다.
야라 그레이조이는 대너리스 타르가리옌과 좋은 동맹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너리스에게 부족한 전투 경험과 웨스테로스 영토 내의 약탈 경험이 풍부하다. 심지어, 대너리스가 바다를 건너기 위해 간절히 필요로 했던 대규모 함대까지 가지고 있다. 야라 그레이조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합리적인 협상을 벌이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는 판단력도 갖추었다. 강철 군도를 되찾아주고 독립을 약속하는 대너리스가 강철군도인의 해안 약탈, 침해, 강간을 금지하자 그는 재빠르게 받아들였다. 타이렐-마르텔-야라 그레이조이-대너리스 연합 중에서도 야라 그레이조이와 대너리스 타르가리옌의 연합은 단단한 고리로 이어져 있다. 이 둘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미친 아버지'를 둔 딸로서 살아가는 고충에 서로 공감했고 웨스테로스의 방식에서 가장 먼 방식으로 지배자의 권리를 획득한 인물들이다. 이 둘은 결혼, 상속 혹은 출산 없이 자신의 지위까지 올랐고 그렇기에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는 듯이 보인다.
야라 그레이조이는 본인이 가진 리더로써의 능력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주위 동료나 부하가 비웃을 때도, 심지어 아버지와 숙부가 비웃을 때도. 그는 여느 MMORPG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처럼 ‘벗을 수록 방어력이 높아지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스테레오타입의 굴레를 뒤집어 쓴 쪽은 (날씨의 영향이라고 부득부득 우기고 싶겠지만) 샌드스네이크와 엘리리아 샌드다. 그는 타스의 브리엔느와 닮은 우직함과 강인함, 부치력을 보인다. 그의 캐릭터가 더욱 돋보이는 이유다.
여성이 바꾼다
<왕좌의 게임>이 시즌 6까지 종영하고 나자, 꾸준히 갈 길을 걸어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서사의 플롯을 뒤흔들고 있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되었다. 심지어 리더로 나선 여성들만이 플롯을 바꾼 것이 아니다. <왕좌의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주요 남성 등장인물들은 여성에 의해 보호받고, 여성에 의해 변화한다. 존 스노우가 시즌 6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멜리산드레가 마법을 부렸기 때문이다. 브랜 스타크가 무사히 살아 남아 세눈박이 까마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숲의 아이들과 조젠&미라 리드 덕분이다. 티리온 라니스터는 대너리스 타르가리옌에게 핸드의 칭호를 하사받고 처음으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한다. 토멘 바라테온은 세르세이 라니스터에 의해 자살한다. 램지 볼튼은 산사 스타크 때문에 전투에서 지고 목숨을 잃었다.
여성이 이끈다. 그리고 여성이 바꾼다. 그것이 <왕좌의 게임>이 2016년에 던지는 명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