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버린 갈대밭
2008년에 여자 중학생 두 명이 갈대밭에 불을 지른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10분 만에 진화해 인명피해 같은 건 없었지만 겨울이라 밭은 빠르게 타버렸다. 이 사건은 당시 내 주변에서 여러 가지 버전으로 각색되었다. 동반자살을 시도한 레즈비언 중학생 커플일 것이다, 갈대밭 가운데 시체를 묻고 범행을 은폐하려한 살인자들일 것이다, 본인들만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던 어린 무당일 수도 있지 않나? 뭐 저 세 가지 조건이 다 맞을 수도 있겠지. 근데 진실이 무엇인지는 상관없었다.
누구의 추정이 더 그럴싸한가. 왜 그 두 소녀는 불을 질렀는가. 그것이 중요했다. 소녀 방화범죄는 흔치 않은 일이니, 그렇게 이야기가 되는 것도 이해는 됐다. 그럴 때가 아니고서야 언제 어른들이 모여서 여자 청소년이 가진 복잡한 의중을 파악하려 들겠나. 그래도 나는 ‘소녀’ 방화범 이란 타이틀이 지겨웠다. 누가 봐도 왜 불을 질렀는지 보단, 불을 지른 범인이 여중생인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냥 둘이 어쩌다 빡쳐서 홧김에 질렀겠죠. 무슨 상관이세요. 말하고 싶었다. 소녀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때엔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등장했고, 국민여동생은 문근영에서 김연아가 된 참이었다. 이러다간 ‘소녀’라는 단어 자체에 생기는 개인적인 거부감은 평생 해소되지 않겠구나 싶었다. 불만이 많았다.
최대 80km의 과속
열여섯 살. 아이를 낳았다. 상대 남자는 구차하게 떠났고, 이러저리 떠돌며 살다 스물 둘이 된 여자는 여섯 살이 된 아이의 손을 잡고 태어나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친부를 찾아간다. 이것은 [인간극장]의 일주일 치 에피소드 요약이지만, 영화 [과속 스캔들]에선 생략된 인트로다. 영화는 오락적 성취를 이뤘지만, 미혼모가 당면한 많은 사회적 위기들을 박보영의 초라한 행색으로 한 번에 표현해낸 뒤 판타지에 가까운 전개를 이어나가며 훈훈한 가족 미담의 결말로 마무리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박보영은 아이의 친부를 찾아가 설움을 쏟아내고,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냥 넘어가기엔 찝찝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수동적이고 성의 없는 답변처럼 보인다. 박보영이 주연으로 출연한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구조다. 주인공이 자신의 매력과 재능으로 이야기를 잘 끌고 나가다가 갈등을 돌파해야 해야 될 때가 왔다고 느끼는 순간, 그 문제들은 외부의 힘으로 얼렁뚱땅 해결된다. 분명 ‘아무 힘도 없이 울고 망설이다 위기를 자처해 민폐캐릭터가 되고 마는’ 풍선인형 스타일의 여성 주인공들과 비교하자면 그가 맡는 역할들은 꽤나 입체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인물들을 역시 가질 수 있는 힘에 제한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디나이얼 박보영팬
걸그룹 멤버들을 보며 때때로 자문한다. 저런 옷과 콘셉트에서 느껴지는 원인모를 거부감은 어디서 왔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늑대소년]에서 프릴이 달린 원피스, 스웨터를 입고 통기타를 연주하는 박보영을 볼 때 든 감정과 동일하다. ‘여성들이 무슨 옷을 입든, 어떤 태도를 보이든 여성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 아니냐’와 ‘한국 여성이 입는 옷과 취하는 태도에 억압이 없을 수 있느냐’로 충돌하는 주장은 내가 가진 의문을 더 깊게 만들었고, 교복을 입은 걸그룹과 원피스를 입은 박보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복잡하고 지겨운 일처럼 느껴져 외면했다.
그러다 언젠가 스포츠뉴스에서 박보영이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사진을 봤다. 처음으로 박보영이 너무 좋은 순간이었다. 나와 같은 팀을 응원하다니...! 그것도 이글스를...! 한화팬이라면 그가 지은 표정을 직관적으로 안다. 열반의 상태에서 눈물을 참으며 악으로 외치는 패배의 함성...! 응원만큼은 우리가 승리하였다...! 이글스 유니폼을 입은 박보영이 너무 좋아 마구마구 검색을 했다. 그러다 일부러 잊은 것과 마주해야했다. 한국의 야구 커뮤니티는 모두 극단적인 남초 성향이라는 괴로운 진실을.
나는 이미지의 경로를 따라가다 그 사이트들에 올라온 박보영의 사진 밑에 달린 댓글들을 보고 마음이 차가워졌다. 주황색 막대를 흔들며 응원가를 따라 부르는 박보영은 좋았지만 그들이 쓴 댓글들과 함께 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 마음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인가. 모든 남자들에게 찾아가 내가 박보영을 마음껏 좋아하고 싶은데 니들의 역겨운 말과 태도 때문에 그럴 수 없으니 모두 사라져주면 좋겠다고 할 것인가. 'to. 박보영. 당신은 정말... 너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남자들이 당신을 보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 너무 싫어요. 부디 파괴와 퇴치의 퍼포먼스를 부탁드립니다.’하고 서신이라도 보낼 것인가. 나는 왜 ‘소녀’의 이미지란 것에서 이토록 오랜 시간 발목이 잡혀있는 것일까.
절 좀 도와주세요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누가 하고 싶어 하지? 미성년자 여성의 상품화가 타당한지에 대한 논의는 담론의 기한이 지나버렸다. 걸그룹이 수백 개가 넘게 되자, 쟁점은 그 속에서 누가 덜 수동적인지, 누가 좀 더 나은 이미지를 가졌고, 그것을 이용하는지, 그래서 그들을 어떻게 독려할 것인지로 옮겨졌다. 상황을 뒤집기엔 너무 멀리 왔으니, 더 이상의 악화는 막아보자는 체념에 가까운 대응. ‘OOO에 OO. 되게 멋있더라. 남자팬이 애교 시키는데 단칼에 거절 했어.’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반가워하고, 퍼포먼스나 가창력 같은 부분만 편집해서 보는 스킬은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오 나의 귀신님] 속 나봉선은 귀신을 보고, 또 다른 귀신에게 자신의 몸을 빼앗긴다. 레스토랑의 막내로 취직한 그는 오너셰프와 사랑에 빠지는데 박보영 본인의 매력과 개인기 그리고 연기력은 이 극을 성공으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나는 그 16부작 드라마를 홀린 듯이 봤다. 쉴 새 없이 윽박지르는 셰프와, 그런 셰프를 정서적으로 구원하고, 결국 그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는 구린 이야기를 보면서도 박보영이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능숙함에 대해 감탄을 하게 된 것이다. 박보영이 ‘도와주세요~!’를 외치자 ‘삼촌들이 알려줄게!’ 하는 자동차 보험 광고를 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뭐 어때. 남자들 이용하려고 한 말일 텐데.박보영은 거의 설계사 급의 보험지식을 갖고 있을 거 같지 않아?’ 같은 자의적인 해석을 덧붙이며 괴로워했다. 그런 짓들을 반복하고 나자 역시 나는 그냥 소녀 자체가 싫은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다. ‘도와주세요!’를 외쳐야 할 사람은 박보영이 아니다. 나 자신. 바로 나. HELP.
자력구제
소녀는 욕망의 대상임과 동시에 순수성을 보존하기를 요구받는다. 남성이 보호해줘야 하는 대상이 되는 동시에, 지배해야 하는 대상으로 규정당한다. 그 두 가지 성질은 패턴화 되기가 쉬워서, 여성들이 어떤 이미지를 표현하든 그 안에서만 소비된다. 소녀들의 순수함, 무지함, 선함이 곧 욕망의 대상이 된다. 이는 결국 남성들이 가진 통제의 권력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실제로 권력을 행사하며 소녀와 젊은 여성들의 상품화를 가속시키는 역할로 이어진다. 김연아 같은 훌륭한 스포츠인도 나이가 어린 여성이란 이유로 ‘연아야’ 따위의 기특한 시선을 받는 것은 본인들이 가공한 ‘소녀’안에 많은 것을 가두려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나는 소녀라는 오염된 단어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까. 커져버린 ‘소녀시장’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기꺼이 소녀를 택한 여성들을 본다. 내가 뭐 어떻게 할 수 있겠나. 그저 이제 좀 제한된 시스템 안에서 행해지는 과잉 해석을 줄이고, 쉬운 이미지로의 소비를 경계할 뿐. 실제 여성 청소년들이 겪는 현실과 가공된 소녀 이미지 사이의 엄청난 간격을 좀 줄여나가는 것 역시 정말 중요하겠다. 박보영도 한 차례 겪었듯, 어린 여성들을 상품으로 취급하여 권력을 이용해 그들의 활동과 자유를 제한하는 행위 역시 강력하게 규탄해야할 것이다. 지금의 소녀시장은 본인들의 편이 되어줄 많은 눈과, 섬세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10년, 20년째 반복하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은 마당에, 이런 진부한 이야기를 피하고 싶었지만, ‘소녀’라는 개념에 얽힌 나의 오래된 공포를 극복하고, ‘소녀’의 진짜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 다짐을 반복해본다. 박보영의 뛰어난 능력이 좀 더 현실적인 여성을 표현하거나, 대안적인 여성상을 그려내는데 쓰일 수 있기를 바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믿음을 주는 배우
계속해서 박보영의 ‘소녀’에 대해서만 얘기했지만 사실 그의 필모그래피 속 인물들은 또래 여성배우들에 비교했을 때 다채로운 편이다. 등장은 심히 병약했으나 그 끝은 문자 그대로 창대하게 ‘날아오르는’ [경성학교], 80년대의 우울한 일진 고등학생을 미친 리얼리티를 보여주며 연기한 [피끓는 청춘], 갓 입사한 연예부 기자의 어설픈 고난기를 200%로 끌어올린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의 ‘도라희’, 2017년 2월 현재 방영중이며 타이틀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힘쎈여자 도봉순]까지. 뭔가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느 지점에서 멈춘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의 필모그래피를 다시 천천히 순차적으로 짚어 보면 본인에게 안전한 범위 내에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20대 여성배우 중에서 여성 중심의 드라마와 영화를 맡는 것 또한 박보영 뿐이기에 그런 변화를 읽어낼 수 도 있을 것이다. 차곡차곡 쌓아 꽤 두께가 생긴 작품들은 그가 가진 최고의 개인기인 ‘사랑스런 소녀’를 앞세워 얻은 결과로 볼 수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배우 개인의 역량이 관객과 대중에게 믿음을 준 결과로 해석하고 싶다. 박보영이 배우로서 가진 스펙트럼이나 해석과 표현의 능력은 지금껏 그가 보여준 것보다 훨씬 넓고 크다고 생각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의 이미지에 한계를 두지 않는 준비된 작품일 것이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