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의 우대 5. 전지현

알다여성 연예인

무정의 우대 5. 전지현

복길

대답하지 않는 여자

[엽기적인 그녀]는 제목과 달리 주인공 견우(차태현)의 이야기다. 그녀(전지현)가 주인공처럼 다양한 코스튬을 선보이며 영화 전반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견우의 내레이션과, 시선, 해석을 거친다. 그녀는 술에 취한 채 지하철에서 노인에게 자리 양보를 하지 않는 젊은 남성에게 시비를 걸고, 사람들이 많은 공간에서 토하고, 처음 만난 남자를 물리적으로 괴롭히고, 일방적으로 연애를 시작해선 터무니없는 요구를 반복한다. 사실 이 설정들은 한국영화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성 캐릭터의 기본적인 설정이다. 하지만 여성캐릭터가 이런 행위를 하면 ‘엽기적’인 것이 되고, 심지어 ‘하지만 그녀는 아름다우니까 다 용서가 돼.’ 하고 끝난다. 

영화 속에서 전지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다. 좀 과장하자면 차태현의 무료한 일상에 파편적으로 등장하는 환상처럼 느껴진다. 왜 그녀의 아버지(한진희)는 차태현과의 교제를 반대하는지, 그녀가 과거에 어떤 아픔을 가졌는지, 거침없이 내달리는 그녀의 돌발행동엔 당위가 없고 영화는 끝날 때 까지 관객에게 설명하지 않고 어설픈 신파로 얼버무린다. [엽기적인 그녀]의 ‘그녀’는 가장 내밀한 것을 다 보여주지만, 결국엔 신비주의적인 사람이다. 또, 본인이 직접 목소리를 내지 않고, 본인의 행위를 누군가가 그려내기만 한다. 이 모든 것은 배우 전지현이 데뷔 후 십여 년 간 고수한 자신의 정체성이자 스타로서 성공한 전략과 일치한다.

만물상

‘스무 살이 넘으면 전지현처럼 될 줄 알았다’ 2012년 당시 카라 멤버였던 한승연이 한 잡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1998년 삼성 마이젯 프린터기 CF에서 타이트한 흰 탑과 흰 바지를 입고 테크노를 추며 등장한 이래 전지현이 우리나라에서 팔지 않은 품목은 거의 없다. 이후 20년간 그녀가 쓰고, 입고, 먹고, 마시는 것을 똑같이 따라한 세대의 여성들에게 전지현은 누구나 모방이 가능할 것 같은 아이디얼 타입으로 존재했다. 부스스한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우스꽝스런 표정과 제멋대로 추는 춤. 그의 CF는 고운 피부결과 매끈한 몸매만을 보여주는 기존의 CF들과 달랐다. 사람들은 지오다노를 사고, 17차를 마시고, 엘라스틴을 쓰면서 [엽기적인 그녀]로 ‘망가져도 아름다운’ 이란 수식어를 획득한 그의 아름다움을 ‘친숙한 무언가’로 소비했고, 그것은 또 다른 CF스타 이영애에게 느끼는 절대적 선망과는 다른 것이었다.

회사원

다시 [엽기적인 그녀] 이야기를 해본다. 지난 회에 기고한 조인성 편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전지현 역시 대형 소속사의 ‘기획형 스타’로 세기말 연예계에 데뷔했다. 같은 회사 소속 배우였던 박신양 주연의 [내 마음이 들리니] (1998), [화이트 발렌타인] (1999)에서 신인임에도 주연을 맡아 연기했고, 당시 가장 주가를 올리고 있던 이정재와 [시월애](2000)에서도 공동주연을 맡았다. 이병헌, 송승헌, 김하늘 등이 주연인 [해피투게더](1999)를 제외하면 데뷔와 동시에 모든 작품에서 주연배우로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스무살에 촬영해 신드롬을 일으킨 [엽기적인 그녀](2001)는 이미 전지현의 세 번째 영화 주연 작품이었고, 전지현은 그의 가능성과 역량을 충분히 알아보고, 영민하게 기획한 회사의 성공작으로 연예계에 안착했다. 모든 종류의 커머셜 필름은 배우 전지현이 가진 또 하나의 필모그래피가 되었다. 본인의 소속사 싸이더스가 제작하고, 같은 소속배우 박신양과 출연한 공포영화 [4인용 식탁](2003) 출연 이후, [엽기적인 그녀]의 감독 곽재용이 프리퀄이라고 공언하고 제작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2004)는 전지현이 당시 모델을 맡고 있던 모든 제품의 간접광고를 노골적으로 모아놓은 영화로 비판을 받았다. 밥 대신 비요뜨를 먹고, 전지현이 빌딩에서 떨어지자 거대한 엘라스틴 풍선이 나타나 그를 받아주면 같은 회사 소속이던 가수의 노래가 ‘장사하자! 돈을 벌자!’ 절규하듯이 흘러나왔다. 회사는 점점 합병을 거쳐 , 유위강 감독의 [데이지](2006)까지 그는 회사가 기획하고 제작한 작품들에 성실하게 임했다.

소문

모델 전지현은 유효했지만 배우 전지현은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성을 요구 받았고, 회사의 기획아래 출연한 작품들은 연이어 혹평이 쏟아졌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는 전지현이 데뷔 후 처음으로 앞머리를 자르고 출연한 영화였고, 그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 화젯거리가 될 만큼 전작에서 연기한 인물들과는 다른 점이 분명히 있었지만 커리어의 확실한 전환점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그 시기 전지현은 데뷔부터 지금까지 함께 한 회사와의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었다. 

2009년 초, 전지현의 휴대전화가 소속사에 의해 불법 복제 되었고, 관련 수사를 진행한다는 수사기관의 발표가 있고나서 그에 관련된 소문들은 일파만파 퍼졌다. 사태를 바로잡기 위해 본인도, 회사도 신중히 대처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덧붙였다. 회사의 호위를 받으며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동안 여성으로서, 배우로서 자신을 둘러싼 대한 괴담은 지독하고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진위나, 무게에 관계없이 유독 여성 배우에게 따라붙는 루머와 괴담들은 자극적으로 소비된다. 

전지현의 팬으로서 그 당시를 기억해보자면, ‘지현아’ 하고 부르면서 언론을 통해 그에 대한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던 업계의 남성 선배들, 신비주의를 적극적으로 유도했던 그의 든든한 아군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공격을 받던 그를 지켜주기는커녕 함께 돌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렇게 십년 넘게 함께 한 회사를 나왔다. 그것이 해고인지 탈출인지 나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그는 한국에서의 활동들을 조용히 정리했고, 미국으로 갔다. <블러드>, <설화와 비밀 부채>에 ‘지아나 전’으로 출연했다. ‘지현 전’ 혹은 ‘지현 왕’ 이 아니고.

Happy Ending is Mine

2012년 영화 [도둑들]은 전지현이 선택하지 않을 것 같은 영화였다. 천만명의 관객 스코어를 기록한 이 영화에서 그는 김해숙, 김혜수, 김윤석, 이정재, 오달수, 김수현 등 그가 잠잠하던 사이 충무로의 얼굴이 된 배우들과 함께였다. ‘애니콜’의 오랜 모델이었던 슈퍼스타 전지현은 [도둑들]에서 ‘예니콜’이 되었다. 데뷔 후 처음으로 조연을 맡았고, 키스씬을 찍었고, 줄을 탔고, 욕을 했다. 나는 어떤 결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는 곧바로 류승완의 [베를린](2012)에서 북한 국적의 통역관 연정희가 되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전지현의 진짜 에너지와 마주하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고 생각했다. 실체 없는 기회들을 괜히 되짚는 게 아닌가 싶지만, 지나간 시간들이 아깝게 느껴졌다. 

그만큼 전지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의미 있는 지점을 만들었고, 비로소 지금에서야 배우로서 그가 가진 기술과 장점을 본격적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예니콜의 발목에 있는 ‘Happy Ending is Mine' 이라는 문신은 줄곧 상품으로서 가치 평가를 받던 그가 30대의 기혼여성 배우로서 자신의 트랙에서 재능을 증명하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어떤 거창한 포부나 야심보다도 자신의 행복이 중요한.

One of One

다시 [엽기적인 그녀] 이야기를 하자면, 남성이 만든 판타지로만 그려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여자 주인공 ‘그녀’가 여성 관객들에게도 어필하며 돋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전지현이라는 배우의 공이라고 하고 싶다. 전지현은 첫 등장부터 보호본능을 유발하는 연약한 피규어가 아니었다. 큰 키에 나직한 목소리, 타고난 운동 능력, 곧고 시원하게 움직이는 동작들은 늘 능동적이고 쾌활했다. [엽기적인 그녀] 이후 나왔던 중국판 [엽기적인 그녀], [엽기적인 그녀2], [무림 여대생] 등이 본편만큼의 주목을 못 받은 수십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역설적으로 속편에 출연한 남녀배우의 상성이 꽤 괜찮아서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전지현은 아니다. 어떤 남자배우와 함께건 본인만 돋보이는 스타일의 배우다.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은 사랑을 갈구하지 않았고, 감정을 숨겼다. 울고 싶을 땐 정상에 올라 알 수 없는 말을 허공에 외쳤다. 이후에 찍은 많은 멜로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수많은 한국 매체에서 그려낸 의존적 여성상과 달리 남성의 조력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이상한 독립성은 십여 년이 지나 [별에서 온 그대](2013)의 천송이, [암살](2015)의 안옥윤을 통해 재증명 되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독보적 존재감으로 16부작 드라마 한 편을 꽉 채웠고, 1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그는 또 다시 신드롬의 주인공이 되어 익숙하게 모든 CF의 모델을 섭렵했다. 전지현은 그 동안의 갈증을 해소하듯 쉬지 않고 연이어 [암살]에 출연했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아버지를 향해 총을 겨누는 독립투사 안옥윤의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별에서 온 그대]의 종영 이후, 전지현은 언론 인터뷰에서 신비주의가 자신을 눌러온 짐 같았다고 고백했다. 강요되고, 기획된 그 전략은 전지현의 상품적 가치나, 존재감을 부풀리는데 일부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확실히 그 굴레에서 벗어난 그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존재감을 지닌 배우였다. 그는 고등학생 모델로 데뷔 후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원숙미 보다는 신선함을 내세우는 시대의 아이콘이고, 동시에 지나간 시간을 스스로 보상하듯 빠르게 필모그래피를 채워가는 배우이며, 본인이 대표배우로 있는 회사에 다른 배우들을 영입하는 힘 있는 셀러브리티 중 한 명이다. 2016년 12월 현재, 그는 [푸른 바다의 전설]에 인어로 출연하고 있다. 안전했던 바다 속을 뛰쳐나와, 수백 년 동안, 자신만이 간직한 기억을 찾아 육지로 나온 인어는 서툴지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인간 세상에 적응하려 한다. 나는 인어에 관한 전설이 어떻게 끝이 나는지 잘 모른다. 다만 본인의 선택으로 육지에 나온 인어가 어떤 방식으로든 해피엔딩을 맞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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