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유감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했다. 국어담당이었던 담임선생님은 자퇴하기 전 날까지 교무실에 나를 앉혀놓고 프로스트의 시를 읽어줬다.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예예” 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막상 자퇴한 당일은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자퇴하고 나니까 정말 할 일이 없었다. 큰 사고를 쳐서 퇴학 당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갑자기 내가 ‘학교를 다니지 않는 미성년자’가 할 만한 일탈을 하는 건 어색했다.
집이 정말 조용했다.
영화들을 보기 시작했다. 봤다기보다는 그냥 늘 틀어놓았다. [비트]는 그때 튼 영화들 중 하나였다. 선생님 앞에서 개기고 불량서클 친구들이랑 어울리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가지 않아도 됐을 길’을 간 자퇴생의 비통한 이야기. 보고 나서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주인공 ‘민’의 인생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 만들었을 거란 직관이 생겼다. 때리고 부수고 폭주하고 꼬이기만 하는 인생의 곳곳에 자신이 불쌍해 어쩔 줄 모르는 정우성의 내레이션이 깔렸다.
당시에 나는 자퇴를 선택한 것에 스스로 감상적인 연민을 가지던 시기였는데, 그 영화의 내레이션들을 곱씹으며 그 짓을 하면 안 되겠단 생각을 했다. 한 6개월을 신나게 영화만 보다가 대안학교에 입학했다. 바로 윗세대 자퇴생들은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을 들었다. 서태지를 연구하는 흐름도 존재했다. 그 때의 나는 좀 무안했다. ‘교실이데아’도, [비트]에도 쉽게 이입할 수가 없었다. 첫째로 그것들은 너무 오래된 것이었고, 둘째, 꼰대들과 폭력에 저항하는 남성들의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이입할 수 없기 때문이었으며, 마지막으로 나는 그렇게까지 세상에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꿈이 왜 없지
[비트]와 비트 속 정우성이 과대평가 되었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영화는 정우성, 김성수 세대의 남성들이 동경했던 홍콩의 사나이 영화와, 낭만으로 추모된 제임스 딘의 과 오토바이, 80년대와 20세기의 끝이 공존하는 야만스런 학교와 사회가 비틀즈의 노래와 함께 뒤섞인 ‘아수라’처럼 느껴졌다. 오롯이 남성의 자아로만 표현되는 청춘과 저항은 정우성이라는 배우의 ‘멋’과 만나 개봉 이후 20년간 한국 최고의 청춘영화로 군림하고 있었지만, 여성인 나에게 [비트]는 ‘정우성의 스물다섯 리즈시절’을 감탄하는 것 이상으로 어필된 적은 없었다.
그러다 그 영화의 의미가 조금 달라진 건,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정우성을 본 후였다. 그 때 한국은 서태지와 이지아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당시 이지아의 열애 상대로 알려졌던 정우성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자서전을 말로 풀어내는 그 쇼에서 정우성은 2주에 걸쳐 꽤 많은 질문들에 성의껏 대답했다. 가난하게 자랐지만 가난을 원망한 적은 없다는 이야기, 홍콩영화에 빠져 밤이 새도록 티비 앞에만 있었던 국민학생 시절의 이야기, 중학생 신분으로 서문여고 앞에서 햄버거 아르바이트를 한 이야기, 고등학교를 자퇴하게 된 이유, 아르바이트를 하다 우연히 캐스팅이 된 이야기, 결별한 전 연인과 자신을 둘러싼 루머들까지. 그는 그의 일대기를 풀어내는데 거침이 없었다.
그 많은 말들 중에서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비트]와 제임스 딘, 영원한 청춘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강호동과 유세윤 앞에서 ‘그냥 그때 내가 죽었어야 됐는데, 그래야 영원한 청춘으로 남는건데...’ 하며 너스레를 떨던 모습이었다. 무모한 답변에 나머지 진행자들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지만, 나에게 그 이야기는 꽤 성찰적으로 들렸다. 한국에서 ‘잘생긴 능력’만으로 가장 많은 것을 성취했다고 평가받는 미남배우에게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비트]는 자신을 있게 한 등단작이자, 자신을 가둔 지겨운 레퍼토리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인터뷰 내내 정우성은 당시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폭력으로 출력된 청춘의 이미지들과 거리가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도리어 자신의 굴레였던 출세작을 덤덤하게 인정하고 자조를 드러내어 배우로서의 정우성은 [비트] 밖에 존재한다고 알렸다.
비현실
그의 초기 필모그래피는 시대적 욕망에 충실하다. 곳곳에 홍콩영화가 잘나가던 시절의 향수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한국 영화의 전환기적 움직임이 보인다. 고소영의 여우 CG로 유명한 [구미호]는 정우성의 데뷔작으로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신인배우의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영화다. 그러나 잘생긴 외모와 고소영이라는 배우와의 조화는 연기력과 관계없이 그를 아이콘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본 투 킬], [비트], [태양은 없다], [모텔 선인장] 데뷔 후, 본인의 입지를 다진 네 편의 영화들에는 홍콩을 대표하는 영화들의 잔상과 그것을 벗어나 90년대의 한국을 재현하고자 하는 열망이 함께 들어있다. 조직에 배신을 당하는 킬러, 인생이 잘 안 풀리는 반항아, 펀치 드렁크에 시달리는 복서.
영화 속 정우성은 당시 텔레비전 드라마 속 미남배우들이 쉽게 맡았던 귀공자, 재벌2세 역할과 결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는 뭔가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영화적’인 걸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늘 아웃사이더였고, 화가 나 있었고, 피를 흘리며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질서 밑에 있는 사람들을 연기했다. 정우성은 남성감독들이 아름다운 폭력영화를 찍고 싶을 때 가장 투사하기 좋은 피사체로서 이용되었다. 아직까지도 그를 호명할 때 쉽게 붙이는 ‘청춘의 얼굴’이란 타이틀은 사실, 남성들만이 전유하는 판타지의 속성을 갖고 있다.
이는 당시 비슷한 역할을 맡은 한석규와 비교했을 때, 더욱 두드러지는데 한석규의 영화들에서 삶에 대한 감각이 우선적으로 느껴지는 반면 그의 영화는 그의 아우라에 의존하여 무언가를 대충 그려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긴 90년대와 세기말을 넘어 2000년대 초반까지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정우성의 영화들에서 반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불안’이기도 했다.
디젤 매니아의 남신
내가 느낀 불안의 원인을 대충 분석해보자면 배우의 이미지와 연기가 현실과 유리되었을 때 진정성이라는 한 가지 척도만으로 그것을 평가했기 때문인데, 이를 경계한다면 2000년 이후 정우성의 영화들은 전작들과의 미묘한 차이를 캐치할 수 있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무사], [똥개], [내 머릿속의 지우개] 등은 작품의 완성도와 별개로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똥개]는 처음으로 ‘가오 빠진’ 정우성을 볼 수 있는 영화였지만 사실 그것은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현재 황정민이 보여주듯 한국남자의 리얼리티를 연기하는 것은 연기의 진정성과 높은 평가를 획득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당시 한 인터뷰에서 그는 설경구와 본인의 비교를 통해 사람을 연기하는 것에 대한 갈증을 드러낸 바 있었다. 그러나 <똥개>에서 그가 보여준 건 결국 어떤 짓을 해도 본인이 가진 아름다움에서 탈피하지 못해 겉도는 모습뿐이었다.
허니문 기념비디오에서 초절정 신파극으로 급격한 장르의 변형을 볼 수 있는 [내 머릿속의 지우개]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여전히 화이트칼라 왕자님은 아니었지만, 기억을 잃어가는 손예진에게 자신의 일생을 바치는 남자로 등장해 나름 여성들을 위한 판타지로서 존재할 수도 있다는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런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 영화 또한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에 꽂힌 남성 관객들의 익숙한 소비로 이어졌지만. 그의 신파가 만든 파장은 그를 한류스타로 만들어주었고, 이는 [새드무비], [데이지], [중천]까지 이어졌다. 같은 범주로 묶기엔 각각의 영화들에서 보여주는 연기에 선명한 차이가 있지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출연하기 전까지 그 영화들 속 정우성은 어딘가 힘이 없고, 답보 상태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좋아 짜릿해 잘생긴게 최고야
안경을 벗은 한석규와 안경을 낀 한석규를 나눠보면 그의 연기를 두 가지 패턴으로 나눌 수 있듯이 정우성 역시 액션영화와 신파극 두 가지 장르의 패턴을 가지게 되었다. 2008년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똥개]를 전후로 그가 더 이상 하지 않으려 했던 혹은 극복하려 했던 ‘각’을 보여준 영화였다. 그는 이 영화에서 본인이 일전에 해왔던 대로 몸과 얼굴로 스타일을 만들고 말을 타고 역주행을 하며 장총을 쏘는 등 배우가 꾸며낼 수 있는 영화적 제스처를 숨김없이 보여준다. 신체와 분위기를 이용해 어떤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의 장기로, [비트] 이후 10년이 지난 그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어설프게 망가트리거나 신파적인 이야기 속에 그의 이미지를 감추는 것을 피하고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좀 더 세련되고, 다듬어진 방식으로 드러냈다.
이 영화는 작은 성취였다. 그는 여유와 특기를 모두 찾았고, 이후 작품들에서는 무언가로부터 탈피하려는 조바심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김지운의 TV영화 [선물], 드라마 [아테나:전쟁의 여신]에서 스타일리시한 본인을 고민 없이 드러냈고, 중국 여배우 고원원과 출연한 [호우시절], 노희경의 [빠담빠담]에선 늘 자신이 먼저였던 존재감의 완급조절을 하며 극 속 배우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적절한 비교 대상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비슷한 롤로 출발했던 최민수가 일정한 시기 이후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대한 고민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여주지 않았던 것과 비교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후 정우성이 보여준 것은 자신이 데뷔 후부터 줄곧 쌓아온 각인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변화였다. 많은 인터넷에서 커뮤니티에서 회자되는 ‘좋아, 짜릿해 늘 새로워, 잘생긴 게 최고야’ 인터뷰는 각인된 초상으로 자신의 청춘을 늘 추모하는 듯한 분위기에 저항하여, 본인이 가진 것을 고민하며 자신의 버전을 갱신해온 정우성의 과거가 압축된 결과처럼 보였다.
없어 이 쒸빨
[감시자들], [신의 한수], [마담 뺑덕], [나를 잊지 말아요]는 각 장르에서 본인의 스타일을 잃지 않으며 정우성의 새로운 버전을 보여주는 영화로 평가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영화들의 스코어는 들쑥날쑥하고, 각각의 영화들이 말하는 장르적 완결성 역시 모두 높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정우성이 영화라는 매체에 가지는 진심은 꽤 깊다. 얼마나 진심이냐면 팬클럽의 이름이 ‘영화인’일 정도다. 단편과 뮤직비디오를 통해 연출자로 데뷔도 했고, 본인이 스스로 영화를 연출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라 말할 정도로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국내의 몇 안되는 배우처럼 보인다.
[비트]의 굴레를 극복한 그에게 20년이 지난 김성수와의 재회는 일종의 실험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신인 시절의 정우성이 아닌, 연기를 연출처럼 구성하는 베테랑 배우인 정우성은 김성수와 함께 가장 영화적인 것에 대해서 연구하고 그것을 구현해냈다. 그러나 나는 [아수라]까지 그가 보여준 이 변화의 흐름이 영화계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극단적 남초 현상을 이루는 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개인의 각성과는 별개로 시장 전체의 다양성을 해치는 나쁜 영향처럼 느껴진다. [아수라]는 소위 ‘알탕영화’의 종식을 위해 과거의 자신들을 전복하는 영화로서 해석되기도 했고, 폭력이 가져온 카타르시스를 희화화 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가 유의미한지, 그에 대한 찬양을 계속 이어가도 좋을지는 [아수라] 이후의 한국 영화들로부터 확인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그는, [아수라] 인터뷰에서 캐릭터와 자신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음을 밝히고, 자신의 소신을 담아 ‘폭력’이 화폐처럼 쓰이는 영화에 대해 비평했다. 자신을 향한 객관적 시선을 늘 예민하게 유지하며, 내부에서 자신을 끝없이 새로고침 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배우 정우성은 이제껏 그가 보여준 성과만큼, 어쩌면 지금 또 하나의 변화와 기대를 요구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콘, 톱스타, 연예인, 연출자, 배우. 90년대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한국 연예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으로 존재하는 그가, 새롭고 빠르게 변화하는 다양한 요구들에도 ‘영화인’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응답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늘 좋고, 새롭고, 짜릿하고, 잘생긴 정우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