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의 우대 7. 김민희

알다여성 연예인

무정의 우대 7. 김민희

복길

표범

좀 따분한 것 같지만, 나는 김민희의 필모그래피 서론은 언제나 그가 등장한 시절 모델들의 이야기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석하게도 그들의 리즈시절에 나는 월간으로 구독한 학습 잡지 속 연예인 인터뷰만 반복해서 보는 초등학생이었다. 그러다 명절날 큰집에 가면 직장을 다니던 사촌언니 두 명이서 사다놓은 ‘에꼴’과 ‘쎄씨’를 하루 만에 바짝 읽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연예인 가십에 목이 말랐던 불쌍한 나의 어린이 시절! 그 잡지는 나의 인스티즈였고, 트위터였으며, 여초카페였다. 이미 지나간 별자리를 맞춰보며 ‘맞아 내가 이때 그랬어!’ 하는 것은 얼마나 눈물겨운 일이었는지? 

잡지의 표지모델들은 새로움 그 자체였다. 흔히 우리가 고전적 미인으로 분류하는 비주얼과는 달랐다. 진하지 않은 쌍꺼풀, 길쭉한 팔다리의 소녀들은 ‘유니섹스 테크노 패션’들을 입었다. 이 모든 건 ‘4차원’, ‘발랄’, ‘상큼’, ‘톡톡튀는’ 같은 걸 표현하는데 최적화 되어있었다. 모든 페이지를 스크랩 하고 싶었던 그 잡지의 모델들 이름을 나열해 본다. 공효진, 김효진, 김민희, 양(신)민아, 전지현, 김민선(김규리), 이요원, 윤소이, 배두나. (더 있을 수도 있으나 여기까지 하겠다.)

이 이름들은 20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배우들의 목록이 되었다. 당시에 기획된 ‘학교’ 같은 학원물과, 캠퍼스 시트콤들은 누구보다 그들을 필요로 했다. 밀레니엄 이후 새로운 브랜드 이미지를 고민하던 많은 제품들도 그들을 원했다. 모든 타이밍이 맞아떨어졌다. 잡지표지의 조잡한 헤드라인 속에 갇힌 대가를 받기라도 하듯, 그들은 모두 킬리만자로의 표범 속 가사,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 의 주인공처럼 등장했다. 그것은 나에게 세기가 바뀌며 출현한 많은 징후 중 하나였다.

자고나면 위대해지는

매번 개인적인 도식을 보편적인 것처럼 말해서 민망하지만, 배두나가 세기말의 이미지라면 김민희는 밀레니엄이다. 둘은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배두나가 싸늘한 눈빛을 하고 어미를 툭툭 끊으며 ‘20세기. 끝.났.다.고.’를 말한다면, 김민희는 들을 때마다 생소한 특유의 살짝 끄는 템포와 엇박자 리듬, 물음표로 끝나야 할 부분을 느낌표로 마치는 말투를 총동원해 ‘이-십일세기-시-작된지가 언젠데!’ 하는 느낌이다. 

<학교 2>.의;신혜원 역을 맡은 김민희.

두 사람은 나란히 [학교] 시리즈의 일진짱이 되었다. 김민희가 출연한 [학교 2]의 일진 신혜원은 전형적으로 속깊은 반항아였다. 밝고 명랑한 신데렐라거나, 병약하고 우울한 미소녀만 보여주던 방송은 부스스한 머리와 차갑고 냉담한 표정의 혜원을 통해 바뀐 시대의 일면을 표현하려 했다. 사실 한껏 치켜 올라간 갈매기 눈썹, 조그만 얼굴에 담긴 아담한 눈, 코, 입은 해맑게 웃거나 쉽게 울먹이는 20세기 소녀를 표현하기엔 부적합했다고 생각한다. 좀 더 특이한 점이 있다면, 혜원은 왠지 항상 껌을 씹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줄리엣의 남자], [성난 얼굴로 돌아보다], 영화 [순애보]까지 그는 작중에서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알람으로 등장했고, 모든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를 보여주고자 할 때, 그는 기꺼이 그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연기자 김민희의 대표작은 ‘원샷 018’ CF였고, 친구의 애인을 빼앗고 읊조린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한 마디는 그의 초창기 필모그래피 최고의 명대사였다.

한 줄기 연기처럼

여자 배우의 불안이나 예민함을 매혹적인 것으로 해석 할 때 나는 짜증과 지겨움을 느낀다. 예를 들면 그가 [화차]를 기점으로 소위 ‘연기파’가 되었다는 평가도 그런 선상에 있는 것 같다. 물론 김민희 본인이 여러 과정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데에는 분명 전환의 순간이 있었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는 김민희가 대변신이나 각성 같은 걸 거창하게 치른 적 없이 늘 연기를 잘해왔다고 생각한다. [순수의 시대], [서프라이즈], [형수님은 열아홉]에서 김민희는 그냥 김민희 본인을 연기한다. 보통 배우가 배우 본인을 연기한다는 건 신인배우가 뭘 잘 몰라서 어디에 갖다놓든 그냥 대사만 읽다가 나온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어떤 경지에 올라 모든 배역에 자신을 새겨 넣는 대배우들의 연기내공 같은걸 뜻하기도 한다. 

과감히 말하자면 김민희의 초기작에서 보였던 연기들은 저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해괴함이었다. 미숙하면서도 능숙한. 남의 옷을 입었는데 자기 옷 같은. 나는 이런 평가가 그가 보편적인 ‘소녀’를 연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가 맡는 역할은 항상 밝고 명랑한 캔디 서사와는 동떨어져 있었고, 누군가의 상징이나 도구로 쉽게 소비되는 소녀가 아니었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성인 여성이었다. ‘발연기’라며 지탄받던 그 시절의 역할들은 후에 그의 이미지가 빠르게 낡지 않도록 그를 지켜주는 방부제처럼 작용했다.

이슬처럼 갈 순 없어서

[굿바이 솔로]의 ‘미리’는 김민희가 작가를 찾아가 울며 졸랐던 역할로 알려져 있다. 그 일화가 어떻게 알려지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아마 김민희의 외적인 각성을 드러내는 맥락이었을 것이다. 어찌됐든 나는 당시에 많이 궁금했다.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을 연기한다는 것은 곧 말을 많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 없는, 아니 의도적으로 말을 하지 않고 이미지로 존재하던 배우였던 그가 호흡하는 지점까지 만들어진 대본을 어떻게 소화할까에 대해서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과는 꽤 다른 모습이긴 했다. 깡패인 애인(이재룡)을 사랑하며, 좀 특이한 앞집 여자(배종옥)와 교감을 하고, 자신 주변의 친구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역할은 확실히 김민희가 전에 하던 것과 차이가 있었다. 미스테리한 구성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제일 속내는 드러내 보이는 캐릭터를, 꼭꼭 씹어내듯이 연기하는 김민희는 종종 힘들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굿바이 솔로]의 미리는 더 이상 그의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읽어내야만 하는 것으로 두지 않고, 배우 자신의 해석을 거친 능동적인 것으로 만들겠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이후 김민희는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 드라마 [연애결혼]을 출연하여 20대 직장여성에 대한 본인만의 해석을 보여주었다. 작품 바깥에서 다른 유명인과 공개연애를 하는 김민희는 늘 주목받는 유명인이었고, 그런 그가 연애를 그려내는 작품들을 연이어 만난 것은 모델로서 박제된 자신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것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아닌 ‘여성관객’이 김민희에게 반응했던 것도 이 때부터였다.

흔적

대중이 말하는 연기력에 대한 콤플렉스를 어느 정도 해소한 그가 [화차]를 선택했을 때 나는 좀 두려웠다. 유명한 원작의 장르영화에서 센 캐릭터를 맡을 때 배우들이 신들린 듯 하는 열연들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아무리 우려를 하려 해도 김민희가 열연하는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는 기성배우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관습적인 발성이나 습관 같은 것이 없는 배우였고, [화차] 이전에 드라마적 문법이 있는 역할들을 많이 맡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는 좋았다. 사라짐과 나타남을 반복하는 영화에서 그는 흐름을 잃지 않으며 ‘원한의 공포’를 정말 말그대로 공포스럽게 표현했다. 미친 듯 소리를 지르고, 웃고, 광기를 드러내는 부분들도 훌륭했지만 자칫 촌스러울수 있었던 노골적인 암시들을 분산시키는 지점들이 특히 좋았다. [화차] 이후 김민희의 연기를 유심히 보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당연했다. [연애의 온도], [모비딕], [우는 남자]는 각각 세심한 일상성과 과장된 드라마를 연기했고, 김민희의 연기가 저 영화들을 이루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처럼 느껴졌다. 김민희는 [화차]로 크게 그려놓은 궤적에 부피를 만들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역시 그런 과정의 일환이었다.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김민희의 필모그래피를 시간 흐름에 따라 나열하듯 풀어쓰고 있지만, 나는 김민희의 작품들을 묶어 어떤 막을 나누거나, 그 구성에 따라 발전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아가씨] 역시 앞의 문단에서 언급한 작품들과 구분이 크다고 생각지 않는다. 전작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영화는 [굿바이솔로]나 [화차]처럼 굳이 주변에서 그의 ‘각성’을 대신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영화 <아가씨> 스틸컷.

오히려 나는 [아가씨]를 보며 [학교 2]를 많이 떠올렸다. 이유는 ‘도대체 히데코는 나이가 어떻게 되는 거야?’ 하고 궁금했던 부분이 같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김민희가 소녀였던 적이 있었던가? 반대로 전형적인 성인여성을 연기한 적은? 그는 늘 [화차]의 주인공 같았다. 꽤 많은 단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작품들에서 조차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불분명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가씨]의 종반부에서 남장을 한 채 등장했을 때엔, 이런 혼란이 의도된 걸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어쨌든 그는 [아가씨]에서 자신이 가진 장기들을 모두 적극적으로 이용해 좋은 공연을 했고, 팬덤도 생겼고,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도 수상했다. 그러나 그는 시상식장에 없었다. 그를 둘러싼 스캔들을 모른척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굳이 중요한 사건처럼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인물의 사생활에 관련된 여론은 하나의 관점으로 통일 되어 공격성을 띄거나, 일방적으로 매도 혹은 구제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 <아가씨> 스틸컷.

나는 과거 인터뷰에서 김민희가 연예인이 아닌 대중을 ‘평민’이라고 불렀다는 일화를 종종 떠올린다. [아가씨]에서 귀족이었던 히데코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부와 평안함을 포기하고 ‘평민’이 되기를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의 뒤에는 무엇이 남아있나. 사안을 파악하는 기준이 모두 다름에도 불구하고, 악의적이고 집요한 언론의 질타가 여성에게만 포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는 것은 이제 조금은 의무적인 히스테리가 되었다. [아가씨]에서 김민희의 인상적인 순간들은 꼽기 힘들 정도로 많지만 굳이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히데코가 밧줄에 목을 맨 채 숙희를 향해 하는 말일 것이다. “숙희야, 넌 내가 걱정돼? (숙희 : 끄덕) 난 네가 걱정돼.” 그 장면은 히데코가 아니었다. 아주 예전 사촌언니의 잡지 속에서부터 봐왔던 그 김민희였다. 참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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