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의 우대 2. 조인성

알다연예인

무정의 우대 2. 조인성

복길

토요일 토요일은 안 즐거웠음

‘PC통신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연예인들은 얼마나 살기 좋았을까’ 라는 말이 있다. 연예인의 태도, 말투, 자세 일거수일투족이 초단위로 분석되는 지금의 잣대를 90년대 연예인에게 똑같이 들이대면 과연 그때와 같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겠냐는 일종의 조롱으로서 기능하는 말이다. 확실히, 틀린 말이 아니다. 적당한 신비주의는 그들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연예인에겐 더 이상 불가능해진 일이 된 것도 맞다. 그래서 그 때의 연예인들이 지금의 연예계 생리에 적응하는 모습을 다시 볼 때면 어딘가 어색하고 불안하단 느낌을 받는다. 나는 그런 배우 중 하나를 이야기 할 것이다. 바로 조인성이다.

교실 맨 뒷자리의 반항아

90년대 말에서 2000년이 넘어가는 시기에 사회는 절망하고 있었고 그만큼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갈망했다. 아니, 갈망을 유도했다. <학교>와 <논스톱> 시리즈는 많은 수의 신인 작가와 얼굴을 선택해 꽤 긴 시간을 투자해 그들이 주인공인 방송을 내보냈다. 이름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그 작품의 출연자들이 얼마나 유명한 스타가 되었는지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학교>는 그 명성을 이어 2012년, 2014년 두 차례나 리메이크해, 등용문의 역할을 이어가고자 했다.) 조인성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당시 그가 속한 기획사는 90년대 ‘신비주의’의 원칙을 고수하며 정우성, 전도연, 박신양 등이 소속된 곳으로 2000년대 새로운 상품이 전지현, 조인성임을 노골적으로 예고하던 곳이었다. 탄탄한 소속사의 지원과, [학교] (KBS, 1999), [논스톱] (MBC, 2000)의 대표 캐스트로 이름이 난 것은 그 당시로선 ‘톱스타 엘리트 코스’를 거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학교]에서 그는 장혁이 맡았던 ‘반항아’의 역할을 답습했다. 첩의 자식으로 가정사에 대한 어둠이 있고, 첫사랑을 지나치게 잊지 못하며, 자동차 정비만이 유일한 취미인. 그러나 무리에서 완전히 동떨어지진 않고, 잘생긴 외모로 여학생들의 고백을 받기도 하는. 그 때 그의 별명은 ‘아랍왕자’였다. 190cm에 가까운 장신에 쌍커풀이 없는 긴 눈, 지나치게 높은 콧대, 작고 얇은 입술로 당시 언론은 그를 ‘미남’으로 칭하는 것을 어색해 하면서, ‘뉴 타입 미남’의 등장이라 포장했다.

OOO의 남자

그는 [뉴 논스톱]에서 그냥 자기 자신을 연기해버렸다. 어딘가 어리숙하며 썰렁한 개그를 곧잘 하지만 모두에게 사랑받고, 누구에게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가진 대학생. 극에서 그는 박경림의 남자친구였다. 뒤이어 출연한 [별을 쏘다]에선 글을 읽지 못하는 난독증 환자이자, 배우 지망생으로 전도연의 서포트를 받는 남자였다. 생활력이 없고, 늘 친구들에게 골탕먹는 남자를 아르바이트로 먹여 살리는 박경림과, 한글부터 가르쳐야 하는 남자를 만나는 전도연은 늘 사랑의 확신에 차 있었다.

MBC <뉴 논스톱>의 조인성 - 박경림. 사진 제공 = MBC

자칫 ‘백치’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그는 연인에게 절대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고, 그것을 어색해하거나 괜한 오기를 부리지 않았으며 자신의 위치에서 줄 수 있는 사랑을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것은 최수종, 차인표, 안재욱, 정우성, 이정재, 장동건 등의 90년대 초반 남자배우들의 역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출발이었고, 90년대와 2000년대를 모두 끌어안고 등장한 그 만이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였다. 적극적으로 누군가의 남자로 불리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배우.

모두가 보살피는 마초

그러나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그 때의 연예계는 ‘남자’, ‘수컷’으로의 명확한 입지가 없으면 배우를 손쉽게 궤도 밖으로 밀어내고야 말았다. 그래서 ‘박경림의 남자’, ‘전도연의 남자’이던 그는 이후 본격적으로 남성중심의 비극서사로 발을 내딛었다. [피아노] (SBS, 2001)는 굉장히 충무로 스타일의 드라마였다. 전반적인 감성은 곽경택이었고, 주인공은 김기덕의 남자 조재현. 늘 회자 되는 장면은 조민수를 향한 조재현의 폭력적 고백씬이었다. 그만큼 [피아노]는 재평가의 가치가 없는 ‘알탕서사’의 드라마다.

드라마 스페셜 <피아노> 포스터. 사진제공 = SBS

하지만 나는 그 드라마에 특별한 애착이 있다. 어느날 학원에 다녀와서 엄마가 보던 티비를 무심코 보다가 아역에서 성인역으로 전환되는 극적인 장면에 집중하게 됐는데 그건 전적으로 전신과 얼굴에 피를 철철 흘리며 언덕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던 조인성의 교복 입은 모습 때문이었다. 사실 그 후에 그가 조직 폭력배가 되고, 의붓아버지인 조재현과 어떤 감정을 나누었는지, 심지어 부산이 배경인 그 드라마에서 그가 사투리를 썼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 첫 장면을 제외한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누나인 김하늘에게 의지하고, 아버지인 조재현, 의붓형인 고수에게까지 지켜야 할 사람으로 조직폭력배지만 모두의 보호를 받는 역할이었다. 전형적인 캐릭터를 맡아도 결핍을 대놓고 드러내고, 결말에선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그런 멋없는 마초. 이것은 재벌 3세로 출연한 [발리에서 생긴 일]로 연장된다.

모자란 재벌 3세

여자배우에 비해 남자배우가 할 수 있는 역할들은 무궁무진 함에도, 지난 몇 십년간 한국 드라마와 영화들은 거의 직무유기수준으로 계속 똑같은 역할들을 만들어 냈다. 시대상에 따라 그 역할을 하는 인물들의 성격에만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때, 각종 트라우마가 있다는 설정은 그 차이에서 엄청난 독창성을 확보하기도 한다. 지금 당장 생각하자면 [시크릿가든]의 폐쇄공포증 같은 게 떠오른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그가 연기한 정재민 역시 별로 다르지 않았다. 제멋대로 살던 재벌 3세가 집안의 강요로 한 결혼에 슬퍼하며, 라이벌인 남자가 사랑하는 신데렐라에게 집착하는. 그는 거만하고, 따뜻하지도 않으며, 철없는 모습 그대로 하지원에게 열렬히 고백했지만 그 사랑은 튕겨져 나왔고 그 캐릭터는 결국 한국 TV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결말로 꼽히는 엔딩을 맞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 드라마에서 조인성은 주먹을 물고 울거나 글썽대며 버럭하는 씬 혹은 팬서비스처럼 보이는 애드립, 이 두 가지로 모든 씬을 ‘때우고’ 있었다. 또한 그 드라마에서 그는 도저히 재벌가의 자제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대부분 다른 드라마가 해오던 대로 여자 주인공을 괴롭히고, 칭얼대기만 하는 재벌 주인공을 연기했지만 비참한 비극을 맞게 되었다.

90년대를 마치며

뒤이어 출연한 [봄날]에서 그는 모성 콤플렉스가 있는 의사로 형의 연인을 빼앗고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수습하지 못해 괴로워 하지만 결국 사랑을 찾는데 성공한다. 이 드라마가 배우 고현정의 10년만에 나온 컴백작이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의도한 서사대로 봐줄 수도 있었겠지만, 이 드라마는 완벽히 고현정의 드라마였고, 그는 ‘고현정의 남자’가 되어 편안해 보였다. 90년대의 아이콘 고현정의 [봄날]은 조인성과 나의 90년대가 끝나는 이정표와 같았다. 이쯤해서 그의 연기력은 수차례나 도마에 올랐고, 그의 모습은 더 이상 TV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직까진, 비평의 잣대가 무딘 곳, 그러나 번번히 실패했던 영화에 다시 도전했다. [비열한 거리]는 유하의 거리 3부작(강남 3부작) 중 2탄으로, 멜로와 눈물 연기의 아이콘이 된 조인성에게 다시 조직폭력배가 되기를 강요했다. [비열한 거리]를 보러 간 극장에서 나는 [피아노]의 조인성을 보았다. 영화의 첫 장면은 걸음에 맞춰 양쪽으로 심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뒷모습이다. 자신의 어깨보다 두 배는 큰 양복을 입은 그가 깡패짓을 하다 경찰서에 붙잡힌 동생을 구하러 가는 장면에서 영화는 ‘욕망의 엘레지’와 같은 제목의 음악을 내보낸다. 이 영화에서도 그의 설정은 ‘웨이터 출신’의 조폭으로, 비현실적 신체조건과 외모를 조직폭력배라는 역할에 맞추기 위해 굳이 대사로, 배경으로 설명해야 하는 구질구질함이 있었다. 조폭 역할을 하는 것에서조차 결핍이 있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지점이었다. 그는 그 영화로 한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그의 유일한 남우주연상이지만 이후 영화제는 폐지되었다), 그 것이 한숨을 돌릴 만한 일은 아니었다. [비열한 거리]는 그가 드라마에서 늘 해오던, 어색함을 서사로 감춘 역할의 연장선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후, [비열한 거리]의 감독 유하의 후속작 [쌍화점]의 실패는 생각보다 컸다. 더 이상 회사가 결정하거나 오디션을 통해 운처럼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라, 본인의 선택이 작용하는 첫 번째 작품으로서 [쌍화점]은 완벽한 실패작이었다. 2000년대 초반, 그가 출연한 시행착오 시리즈 같았던 영화들의 실패와, 2008년 [쌍화점]의 실패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세기말에 나타난 밀레니엄 뉴 타입 스타가 아니었고, 세상은 그가 어릴적부터 꾸준히 보여왔던 신선한 남성의 이미지들을 옛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아주 빠른 속도로.

제 2의 탄생

그는 입대를 했고, 2년의 공백기를 가진 뒤, [무한도전]의 조정특집 편으로 컴백한다. 그는 게스트로 출연해 영화 [권법]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말 ‘무한한 도전’처럼 계속 제작이 미뤄지고 결국 그 영화를 놓고 일본 드라마 [사랑따윈 필요 없어, 여름]의 리메이크작인 노희경의 [그 겨울, 바람이 분다]를 복귀작으로 결정한다. 조인성은 극중 온갖 세상의 풍파를 이겨내며 살아가는 겜블러 역할을 맡았고 송혜교와의 솜사탕 키스신 같은 걸 남겼다. 젊고, 싱그러우며, 조금은 바보 같지만 착한 남자에서 반항적이지만 한없이 나약하고 그래서 불안한 남자로. 조인성은 과거 자신이 해온 것들을 반복하는 대신, 이겨내는 방향을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복귀작은 작은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껏 자신이 드러낸 적 없는 감정을 가장 익숙한 방법인 16부작 드라마로 끌어내는데 성공했고, 이후 동일한 제작진과 작가의 작품인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애드립으로 씬을 메우지 않아도, 조롱거리가 되는 눈물연기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호평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는 이제서야 자신의 결심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추억하기 지겨운 90년대의 끝물에 데뷔해,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늘 ‘뉴 타입’이 되곤 했지만, 그건 그를 바쳐주는 모든 시스템의 계획인 것이 분명했다. 새로운 세대가 왔고, 그도 이제는 자신의 결심이 곧 결과로 이어지는 배우가 되었다. 나는 그가 영원히 과도기의 혼란을 간직하는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 무언가를 트리뷰트 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제시하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현재가 되는 사람. 그것이 무기인 배우는 쉽게 낡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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