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의 우대 1. 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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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의 우대 1. 서우

복길

어떤 작품에 캐스팅되기까지의 그 험난한 과정을 멋대로 생략하면, 배우 지망생이 톱스타가 되기까지 겪는 과정은 꽤 단순하다. 실제로 몇 개의 질문에 ‘예, 아니오’로 대답하면 일정한 알고리즘이 생긴다.

여배우인가? 조연배우인가? 시청률이 높았는가? 유재석, 전현무, 김성주, 김구라가 진행하는 예능에 나오는가? 알바구인사이트 광고를 찍었는가? 대학교 강당에서 팬미팅을 했는가? 차기작이 미니시리즈인가? 결국 주연배우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그 작품은 중국에 선판매 되었는가?

모두 YES라면 그는 이미 ‘황태자’ 혹은 ‘대륙의 여신’이다. 그것은 톱스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주부’를 공략한다며 막장을 표방하는 드라마, 무저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남성들의 영화, 그렇게 철저히 ‘팔림 제일 산업’에 투신하여 ‘신드롬’을 꿈꾸는 배우들. 그래서 쉽게 도마에 오르고, 진정성에 대해 냉정한 심판을 받는 사람들. 나는 한국 배우들의 ‘신드롬’을 옹호하는 동시에, 그것의 유효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앞으로 쓸 이 시리즈는 한국 배우의 필모그래피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이다. ‘일약 스타덤’, ‘블루칩’, ‘대세’ 같은 평가는 최대한 피하고자 하지만, 아마도 크게 새로울 것은 없다.

옥메와까

장진의 [아들]에서였다. ‘여일’은 장진의 작품 속에서 ‘화이’와 함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새빨개진 콧날과 귓불이 도드라진 토끼 같은 인상의 여배우는 감독의 애착이 담긴 이름에 걸맞게 아주 짧은 출연만으로 시선을 모았다. ([아들]은 만듦새가 절망 그 자체라, 그의 역할이 더욱 돋보였다.) 그러나 영화는 장렬히 망했고, 망한 영화의 단역이었던 그도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다 TV에서 초점이 불분명한 눈과 떨리는 목소리로 막춤을 추며 ‘옥동자 메가톤바 와일드바디 까마쿤 좋아’를 반복해서 주문처럼 외우는 여자를 봤다. 스팽클이 촘촘히 박힌 타이트한 옷을 입고 ‘한번 먹고 꽂혀버렸어 옥메와까에~’ 하고 자신의 엉덩이를 때렸다. 단번에 아들에 나왔던 ‘여일’이란 걸 알았다.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옥동자나 메가톤바의 모델이 아니라 옥동자 메가톤바 와일드바디 까마쿤 네 가지의 아이스크림을 한번에 선전하는 모델이라니... 역시 좀 이상하고 비범한 '간지'였고, 그건 곧 미래에 대한 암시였다. 서우는 데뷔 후 9년 동안 ‘옥메와까’ 같은 타임라인을 만들어가고 있다.

반말

[김치 치즈 스마일]은 [거침없이 하이킥]의 후속작으로 많은 기대를 받고 시작했지만 ‘어떻게 하면 많은 인력을 동원해 제작비를 낭비할 수 있을까’ 시리즈의 조상 같은 쇼로 전락했었다. 지금은 중국의 별이 된 김수현도 조연으로 출연한 그 시트콤에서 서우는 고전적 4차원 소녀를 연기했는데 모두가 연기학원에서 갓 배운 상황극을 하고 있을 때 혼자만 다른 시공에 사는 것처럼 행동해서 이상했다. 어쩐지 눈을 깜빡이는 속도도 다른 사람이랑 다른 것 같고... 

MBC <김치 치즈 스마일> 중. 사진 제공 = MBC

무엇보다 가장 다른 것은 바로 말투였는데, 어쩐지 존댓말을 하고 있어도 다 반말처럼 들리는 희한함을 경험했다. 커다란 왕삔을 꽂고 짧게 줄인 교복을 입은 채, 대화의 맥락과 전혀 관계없는 말들을 한 뒤 눈알을 굴리며, 눈치 없고 바보 같지만 외모는 아름다워야 하는 소녀의 역할.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그 신선한 감각은 그저 그런 작품들의 동력으로 쓰이기엔 좀 유별난 것이었다. 그녀는 이후 곧바로, 이경미의 첫 장편 데뷔작 [미쓰 홍당무]의 주인공이 되었다.

전따와 전따애인

인터넷 공간에서 사례들의 수집을 통해 어떤 합의를 이뤄낸 것 중 맘에 드는 설은, 한국에서 가장 비범한 기운과 파워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 여중생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담론을 말하는 화자가 본인 외의 다른 사람이 되었을 땐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한국의 여자 중학생은 독보적인 존재들이라 생각한다. 올 여름 개봉한 [비밀은 없다]에서 이경미는 아예 그들의 광기로 극을 만들었고, [미쓰 홍당무]의 중학생 주인공, 서종희도 이 설의 힘을 입어 덩달아 주목을 받았다. 아빠의 외도를 의심하는 전교 왕따, 그리고 그 외도를 막기 위해 다른 의도, 같은 목표를 가진 영어 선생 양미숙(공효진)과 힘을 합쳐 광란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외동딸.

평범한 말을 할 때도 어쩐지 소리를 지르고, 밤을 새운 통해 늘 충혈된 눈과 파란색으로 보일 정도로 질려있는 안색, 코를 훔치며 쪼그리고 앉아 울지만, 자신과 자신의 짝 양미숙을 보호하기 위해 누구와도 싸울 준비가 되어있고,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양미숙에게 실망해 분노하면서도 학교 축제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고 깡통, 계란 세례를 받지만 자기 가족, 자기 친구 말고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멋진 사람. 그러나 아빠의 외도와 자신의 출생에 미친 듯이 집착해 밤마다 야한 채팅을 하고, 학교 선생님을 골탕 먹이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여중생. 서종희는 ‘전교왕따’지만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로 각인되었고, 비주류로서 각광받는 서우라는 배우를 설명하는 가장 완벽한 키워드가 되었다.

Right Now

이후 서우는 [파주]에서 죽은 언니의 남편과 사랑에 빠지는 여자를 연기했고, [탐나는 도다]에서 조선시대 제주 해녀를 연기했다. [파주]는 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탐나는 도다]는 서우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매니아를 모으는 데는 성공했지만 조기종영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서우는 싸이의 ‘Right Now' 뮤직비디오에 출연한다. 

차가 꽉 막힌 도로에서 테크노전사 같은 옷을 입고 차 위에 올라가 몸짓에 가까운 막춤을 추는 서우의 모습을 보는 건 즐겁고, 들떴다. 충분히 예상가능 했지만, 실제로 그걸 하리라곤 생각지 못했을 때 느끼는 그런 감정. 하여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우가 할 법한 드라마나 영화는 더 이상 없는 게 아닌지, 그리고 그것을 본인이 잘 알고 있는 게 아닌지. 스타덤에 오르는 모든 과정과, 자신이 감당해야 할 작품들이 서우에겐 왠지 지루할 것 같아보였다.

고갈

[하녀]에 관련해 이정재가 한 인터뷰 중에 이런 게 있었다. 

그 촬영 현장에 가면, 일단 윤여정 선생님이 계시고, 도연씨가 있다. 그래서 좀 숨을 돌리자고 후배를 찾으면 그게 서우다. 그런... 현장에 지금 있다.

기센 여자 공포증을 스스로 공개한 이정재의 안타까운 고백이지만 어쨌든 서우는 다른 배우들과 함께 있어도 밀리지 않는 여배우 쯤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이후 문근영, 이미숙의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데렐라 언니]를 끝낸 서우는 평일 방송되는 미니시리즈가 아닌 조금 다른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원로배우와 중견 연기자들과 함께한 50부작 장편 드라마 [욕망의 불꽃]은 그 시작이었다.

그 때의 서우는 이미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후 그는 [노크]라는 개봉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공포 영화 한 편과, [내일이 오면], [유리가면]과 같은 아침 드라마에 연이어 출연했다. 색다른 시도라고 생각되기 보단, 파괴적으로 느껴지는 선택이었다. 이 작품들은 형식적인 면에서 앞서 본인이 선택한 것들과는 차이를 보였고, 서우에게 기대를 많이 했던 사람들은 이 때의 행보를 보며 자주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후 본인이 은퇴작으로 결심했다는 [제왕의 딸, 수백향]을 다급히 정리하듯 출연 하고, 그는 미국으로 떠났다.

바깥의 배우

누구보다 독보적인 커리어를 쌓아오던 배우는 3년의 공백 끝에 돌아와 그 과정에서 꽤 많은 부침을 겪어야했음을 고백했다. 실제 나이가 밝혀졌고, 과거 사진이 드러나 조롱을 당하고, 추측성 루머들이 일파만파 퍼졌다. 이후 그 때를 회상하는 인터뷰를 통해 그는 ‘낮에는 임산부([하녀])로 밤에는 여고생([신데렐라 언니])’인 두 악역을 오가며 자신의 전성기를 체감하지 못하던 시기였고, 심한 회의와 자책으로 모든 것을 놓고 싶었다고 말했다. 무슨 역할을 맡더라도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 같았던 그 반짝이던 존재감은 낯설고 조악한 극 속에서 점차 빛을 잃었고,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마주한 회의는 점점 변해가는 자기 자신에게 향했다.

톱스타의 궤도에 입성한 뒤, 20대가 지나버린 여자 배우에겐 선택이 폭이 좁다. 더 이상 맡을 수 있는 역할들은 사라지고 한정적인 배역을 놓고 몇 되지 않는 여자 배우들이 나눠서 갖는다. 서우는 그런 흐름에서 반향의 지점을 만들던 배우였다. 자신의 커리어를 거룩하게 만들기보단, 난데없는 역할들을 수집하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나는 고백하자면, 아침드라마를 선택한 이유도 그런 흐름 중 하나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스스로 자처한 고립의 시간을 지나, 그녀가 돌이켜 본 그 시간들은 떠나기 위한 준비의 과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어쨌든 그녀는 올해 다시 돌아왔다. 몰아치듯 존재를 각인시킨 3년, 버틸 힘도 남아있지 않았던 3년, 그렇게 훌쩍 떠나버린 시간 3년. 비음이 가득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한번도 교태를 부린 적 없었고, 아담하고 작은 몸을 가졌지만, 타인에게 연민을 사려고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지쳐버린 시간도 홀로 버텨냈다. 어쩌면 이런 평가가 그가 보여준 과거의 작품들을 담보로 한 고평가일지도 모른다. 돌아온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지 역시 한정적이며, 그것이 내 기대를 충족할지도 물음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비범한 재능으로 비정상적인 성장 속도를 감당해야 했던 그가 또다시 기회를 받길 원한다. 자기를 내버리는 그 일련의 과정마저도 남다른 그 모습을 끝까지 믿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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