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최대 목표는 "죽을 땐 행복하기"이다. 참으로 뜬구름 잡는,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저 말 이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죽을 때 만큼은 행복하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그 정도와 수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도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매우 뿌리가 깊으며 제법 많은 편이다. 그것들은 '트라우마'라는 이름답게, 이미 시간이 지난 일임에도 끊임없이 지금의 나를 괴롭히고 옭죈다. 하나가 잠잠하면 다른 하나가, 그것이 잠잠해지면 또 다른 하나가 바통을 주고 받을 때도 있고, 잔인할 만큼 극악무도하게 협공을 해오는 때도 있다.
내가 언제 죽을 지는 모른다. 죽는다는 것이 그런 것이니까. 별안간 갑작스레 찾아올 수도 있고, 어렴풋이나마 예측 가능한 날에 찾아올 수도 있으며, 나의 충동으로 찾아올 수도 있다. 자의에 의해서 맞이할지, 타의에 의해서 맞이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게 죽음이다.
다만, 그때가 어느 때이든 트라우마가 많이 옅어진 때이길 바란다. 그때의 현실적인 문제가 웬만큼 심각하지 않다면 트라우마가 옅어진 것만으로도 평온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물론 그 때가 와 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단 소리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그간 트라우마가 쳐놓았던 내 행동제약을 모두 다 허문 단 일주일을 즐긴 뒤에 죽는 것이다.
나는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자기 전에 두 손을 모으고 그간 들어봤던 모든 신의 이름을 외며 기도했다. 알라신님, 하느님, 부처님... 들어본 종교의 신은 다 등장했다. 그래봤자 저 셋이 다였지만... 어쨌든 그들을 부른(?) 뒤 하는 말은 항상 같았다.
"저에게 내일이 오지 않게 해주세요. 저를 죽게 해주세요. 내일 눈을 뜨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요."
그리고 그 끝은 늘 "아멘."이었다(오해하지 말길. 나는 뼛속까지 무교다. 굳이 따지자면 외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나의 첫 반려견이었던 아이들이 내가 믿는 신이다. 아마 TV에서 보고 따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기도를 할 때는 늘 진심이었다.
그 기도는 이십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대단한 집념이 아닐 수 없다. 무려 20년 가까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저 기도를 했다. 연인과 섹스를 한 날에도 했다. 만취한 날에도 했다(필름이 끊긴 날엔 모르겠다. 하지만 필름이 끊긴 것은 지금까지 손에 꼽으므로 그 정도는 봐줘도 되지 않을까?). 이 정도면 내 집념과 절박함을 인정해줘야 한다. 물론 어느 순간부터 반 정도는 습관이 되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진심이 아니게 된 것도 아니니 부정할 생각도 없다. 오히려 갈 수록 힘든 일이 많아져 절박함은 뒤지지 않았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신을 너무 잡탕으로 외친 탓인지, 아니면 시작은 여러 종교로 해 놓고 마지막 맺음말을 한 종교에 치우친 탓인지 나는 아직까지도 살아가고 있으며 늘 새로운 내일을 맞이고 있다.
나는 이십대 후반으로 넘어오며 저 기도를 그만두었다. ...솔직히 요즘도 가끔은 한다. 내용은 같으나 소원을 비는 대상은 달라졌다. 하지만 전처럼 매일같이 하진 않는다. 인생이 살기 수월해져서? 아니.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서? 죽는 날까지 그런 일은 없을 듯. 살고 싶어져서? 전혀. 살다 보니 적응이 되어서? 인생은 늘 새로운 고통이다.
그럼 왜?
오기가 생겨서.
나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오기로 삶을 살고 있다. 나의 트라우마를 돌이켜보면,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이 그럴 테지만, 내가 선택해서 생긴 자국들이 거의 없었다. 그것을 알고 나니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고 오기가 생겼다.
여전히 살고 싶지는 않지만 억지로 죽기에는 억울해졌다.
시도를 해본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때는 모두 우울증이 심해져 있을 때였고 내 트라우마 중 가장 악질적인 것에 잡혀있을 때였으며 무의식적이었다. 하지만 시도를 했던 때에 뇌가 울릴 만큼 쩌렁거리는 소리로 "내가 왜?"하는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때 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총 네 번이었다(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도 잘 살아남는다면 그땐 전문가를 찾기로 했다. 지금까지 안 찾은 이유는 나중에 이야기 하기로).
오기가 자살욕을 눌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수도 있다. 부정은 안 하겠다. 그러나 단순히 두려움이라고만 하기엔 그 목소리에 담긴 분노와 억울함이 잊히지 않는다.
지금도 순간순간 위태로울 때가 있지만, 아슬아슬하게 잘 살아나가고 있다. 오기 가득한 내가 트라우마에 휘둘리는 나를 감시하며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이유가 '내가 바라는 죽음'때문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엔 착실하게 내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들여다 보며 내 나름의 방식대로 그것들을 쏟아내려는 시도를 하기로 했다. 이미 너무 오랫동안 고여있어서 심각하게 썩어버린 감정들이지만 퍼내다 보면, 새로운 물을 떠다 희석시키다 보면 적어도 지금보단 나아지겠지. 썩은 물이 솟아나는 근원지를 찾아내고, 할 수 있다면 그곳을 새로운 흙으로 메우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조심스럽게 틈틈이 살펴볼 것이다. 설령 그곳에서 다시 왈칵거리며 썩은 물이 솟는대도 근원지는 알고 있으니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하는 수 없이 나는 오늘도 살고 있다. 아마 내일도 살 것이다. 계속 살아가겠지. 적어도 내가 지금보단 행복하게 죽을 날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