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생리불순을 겪고 있었지만 그 심각성을 느끼진 못했다. 회사에서 점심도 거르고 밀린 보고서를 쓸 때였다. 물을 마시려고 사무실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아랫도리가 순간적으로 왈칵, 했고 롱스커트 아래로 뜨거운 것이 주르륵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놀라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니, 세상에, 다리 사이로 피가 흘러 양말까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핏방울은 사무실 바닥에도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하혈을 하는 건가 싶어서 겁이 덜컥 났지만, 이 장면을 사무실 사람들에게 들키면 쪽팔림을 면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더 먼저 들었다. 화장실에서 휴지를 통째로 가져와 아랫도리를 급하게 틀어막고 사무실 바닥부터 수습을 했다. 점심을 먹고 들어온 상사에게 조퇴를 하겠다고 보고하고 온갖 걱정에 사로잡힌 채 집 근처에 여의사가 있다는 산부인과를 찾았다. 나의 첫 산부인과 경험이었다.
걱정, 불안, 그리고
산부인과를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게 심하게 하혈한 건 난생 처음이었기에 가는 내내 인터넷 검색부터 시작해서 지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조언도 구했지만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나는 유독 내 몸에 생긴 상처나 질병들에 둔해서 1년 동안 약국이나 병원을 방문할 일이 거의 없는데, 다른 곳도 아닌 내 생식기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오니 없던 불안증도 생길 지경이었다.
간단한 진료 카드를 작성하고 짧은 설문 후 들어간 진료실은 깔끔하고 차분했다. 걱정과는 달리 산부인과 의사는 침착하게 생리불순 후 생리 양의 증가는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설명을 들으니 전보다는 진정이 됐지만, 이왕 방문한 김에 검사라도 받아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초음파 검사 이야기를 꺼냈다. 의사는 지금 생리 중이니 초음파 검사를 할 수가 없어 생리가 끝날 때쯤 재방문하면 검사가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접수대에서 계산을 하고 돌아서는데, 진료를 보기 전에는 걱정과 불안에 가득 차 미처 보이지 않았던 병원 내 홍보 포스터나 엑스 배너들이 보였다. 자궁경부암 검진 국가 지원부터 소음순 성형수술, 질 필러 같은 생소한 단어까지. 치과나 내과에 비해 특수한 병원이긴 하지만 대놓고 붙어있는 홍보 문구들이 불편하게 느껴져 산부인과를 서둘러 빠져나왔다. 다행히 그 다음 달 생리부터는 문제가 없었고, 그 이후로 산부인과를 방문할 일은 생기지 않았다.
다들 비슷하게
불쾌한 첫경험
내 친구의 첫 산부인과 경험은 고등학교 때였다. 생리불순 때문에 엄마와 함께 찾은 대형 산부인과의 대기실에 앉아있는 동안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됐고, 대기실 내 사람들의 시선은 불쾌한 경험이었다고 한다. 이후 성인이 되고 성 경험이 생기며 자연스럽게 직장 근처의 산부인과를 방문했지만, 성병 진료나 사후피임약을 처방 받으며 남자 의사나 남자 약사들이 한심하다는 듯 친구를 위아래로 훑어봤고, 실제로 친구에게 “젊었을 때부터 이런 거 먹으면 나중에 애 못 낳는다.”는 ‘꼰대질’을 서슴없이 한 약사도 있었다고 한다. 약국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말이다. 가장 예민한 부위 때문에 방문한 산부인과에서 불쾌한 경험을 몇 번 한 후로는 산부인과에서 정기 검진이나 안내 문자가 와도 방문이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다른 친구의 산부인과 경험담은 더 황당했다. 애인과 성관계를 한 후 며칠 간 성기가 너무 아파 방문한 산부인과에서는 의사가 “도대체 이렇게 될 때까지 뭐하셨어요?”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친구가 성병에 걸린 건 그 때가 처음이었는데도 말이다.
성병은 환자의 체감 상 감기, 충치, 위염 같은 증상과는 매우 차이가 있다. 만약 양치질을 제대로 하지 않아 충치를 잔뜩 먹어서 치과를 방문했더라도 의사가 그렇게 말한다면 난 불쾌함을 느꼈을 텐데. 의사는 환자의 증상만을 보고 환자를 재단할 권리가 없다. 몸이 아픈 환자는 나의 상태에 관한 한 조금 예민해도 괜찮다.
내과, 외과, 안과, 치과, 신경정신과, 비뇨기과. 그 많은 병원 과목들 중 산부인과는 유일하게 ‘여성’만을 위한 병원이다. (비뇨기과는 요도, 방광과 관련된 진료를 하기 때문에 여성들도 방문을 한다.) 하지만 여성들이 가장 찾기 어려운 병원이기도 하다.
음식을 잘못 먹어 복통이 심해서, 혹은 과음을 하고 다음날 너무 피곤해서 내과를 방문할 땐 내 처지나 상황에 맞게 집이나 직장과 가까운 병원을 찾게 되기 마련이다. 많은 산부인과들은 진료를 보는 의사들이 전부 여의사라고, 비밀보장 안전보장이 되는 병원이라고, 많은 미혼 여성들이 찾는 곳이라고 홍보를 한다. 팔이나 배나 머리나 자궁이나 다 같은 내 몸뚱이인데 왜 산부인과는 여의사인지 반드시 확인을 해봐야 하고, 다소 비밀스럽게 진료를 봐야 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게 되는 걸까? 왜 나는 주기적으로 극심한 생리통을 겪어 산부인과를 가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망설임 끝에 그저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 먹는 것으로 그치는 걸까?
여성을 고객으로 하면서
여성을 혐오하는
사회 초년생에서 벗어난 나는 어느 봄날 마케팅 전문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됐고, 하필이면 병원 마케팅을 전문으로 하는 곳에 떡하니 입사하게 됐다. 게다가 하필 입사 후 맡게 된 곳은 산부인과였다. 병원 마케팅은 처음이었기에 입사 초반에는 산부인과에 대해 많은 자료 수집과 커뮤니케이션과 의료법 공부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알고 싶지 않았던 시술, 수술 종류들과 산부인과의 민낯을 경험했다.
만약 그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더라면 일부 산부인과의 주 수입원이 불법 낙태 시술, 성기 성형 수술인 줄도, 산부인과가 지극히 여성혐오적인 마케팅 방법을 사용하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인에 올라오는 많은 전문 의사 답변들이 사실은 아이디를 병원 직원들끼리 공유하여 진행하는 상위노출 작업들이며, 낙태 시술을 홍보하는 것이 의료법 위반이기 때문에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사람들의 심리를 노려 은근하게 잠재 환자들에게 노출시킨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좋은 산부인과란, 괜찮은 산부인과 의사란, 나에게 맞는 산부인과란 존재한다. 실제로 수 번의 실패 끝에 자신에게 맞는 산부인과를 다니는 지인들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자궁의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검진조차 하지 못하고, 지독한 생리통이나 PMS에도 불구하고 산부인과를 가고 싶지 않아 약국만 들리는 여성들이 많다. 그 이유는 ‘산부인과 자체가 불편해서’부터 ‘과잉진료가 무서워서’까지, 매우 다양하다.
국내의 많은 산부인과들이 대부분 개인 의원이기 때문에 그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 방식이 여성혐오적이라면, 여성을 위한 병원이라는 의미가 퇴색되고 정작 검진이나 상담이 필요한 여성들은 쉽게 방문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산부인과가 압구정이나 신사역 근처에 물감 칠한 따개비처럼 붙은 성형외과처럼 변하는 걸 원치 않는다. 산부인과는 어디까지나 여성을 위한 병원이어야 한다.
앞으로 두 편의 글을 통해 산부인과에서 시행하는 여성혐오적인 수술들부터, 내가 마케터로서 경험한 산부인과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