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침 1. 웃지 말 것.
예전에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여자 아이돌이 웃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흔한 일이다. 그전에 뭐 애교를 시켰는데 안 했다던가, 표정이 굳어 있다던가. 처음에 그런 주제로 인터넷이 떠들썩해지면 처음에는 '뭐야 별 거 가지로 난리네'했다가 그들을 향한 비난 댓글 등을 보면(그것도 논리적이고 똑똑한 문체로 마구 까는 사람들) 나도 '어 그런가 봐 걔가 잘못한 건... 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대학 몇 년 동안, 나는 미소가 기본값이 되었다.
공대 중에서도 여학생이 적은 과였다. 오티를 갔던 날, 10명의 남학생 중 1명 내지 두 명이 여학생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날, 나는 '꾸미는 여학생'과 그렇지 않은 여학생이 받는 다른 대우를 공기로 느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강의를 들으면서, 이 몇 없는 여학생들은 내가 헷갈릴 정도로 비슷한 풍으로 꾸미고 다녔고(흔히 새내기룩이라고 하는데 남학생 새내기룩은 본 적 없지 않으신가요), 남자애들 또한 비슷한 느낌으로 다녔으나 꾸민 느낌은 없었다. (그냥 흔한 공대생 느낌이었다.)
반수 실패로 애매한 복학을 한 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어서 눈이 아파도 렌즈를 끼고, 백팩 대신 예쁜 숄더백을 들고 전공책을 또 다른 손에 들었다.
그리고 항상 웃고 있었다.
그 모든 것에 현타가 와서 그냥 모자 쓰고 안경 쓰고 머리 질끈 묶고 백팩이나 대충 에코백을 들고 다녀도 미소만은 놓지 못했다.
그러던 나는 졸업이 다가오면서 많은 팀 프로젝트를 했다. 항상 팀 중 나 혼자 여자였고, 나이가 가장 많은 남학생은 어떻게든 나를 가르치려고 들었다. 그들은 나와 같은 학년이었으며 심지어 그중 어떤 아이는 우리 과가 아닌데 우리 과 전공지식으로 나를 타박을 주었다. 그 괴롭힘과 무시는 점점 인격적 모독 수준까지 갔다. 이에 대응하고, 팀 분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버린 것은 '웃는 얼굴'이었다.
아닌가? 미소를 버렸다기보다는 '억지로 웃지 않을 것'을 선택했다.
공대 특성상, 여학생인 나는 항상 막내였고, 소수였다. 그렇기에 남학생들은 알 수 없는 팀워크가 있었고, 그들 사이의 서열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울려 줄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웃지 않았다.
그렇다고 굳은 표정을 계속한 것은 아니고, 웃기지 않은데 억지로 웃지 않았다. 웃기거나 즐거우면 웃었다. 적당히 예의를 차렸다. 더 나아가서 무례하면 정색도 했다. 기본값을 +100에서 0으로 다시 설정한 순간부터, 나의 팀 프로젝트 생활이 훨씬 쉬워졌다.
누군가가 웃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면,
'웃기면 웃을게. 날 웃겨보도록'
라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
아직 재수 없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정색하면서 '사이다' 대응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강압적인 아버지나 그 형제들 사이에서 항상 웃거나 싹싹해야했던 장녀인 내가, 억지로 미소를 짓지 않은 건 굉장히 큰 발전이자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