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한번씩 간단한 글쓰기를 하려고 오늘도 죽지않고 왔다.
오늘 함께하실 음료는 딸기바나나스무디와 사과차이다.
딸은 딸이지 엄마의 친구나 상담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착각하는 엄마와 딸이 많다.
"아 옆에 옷가게가 생겼어!"
아빠와 함께 집에 있다가(둘 다 백수임) 엄마가 아빠한태 한 전화 내용을 우연히 들었다. 아빠와 사이좋게 있던것도 아니고 난 내방에 있었는데도 들린거면, 꽤나 엄마가 크게 소리지른거다.
엄마는 옷가게를 한다. 우리 중 유일하게 돈을 벌지만 자영업자들이 그렇듯 고정적인 수입은 아니고 이번에 코로나 사태까지 직격으로 맞았다. 그런데 바로 옆집에 옷가게가 생겼다니, 등골 브레이커로서 가만히 있을수가 없었다. 간단히 카톡을 보내고 저녁을 준비했다.
집에 밥 먹고 오나? 내가 저녁 만들어드림.
응 엄마 우울해 옷가게가 생겼다더라.
그렇구만 계란볶음밥 해줄게.
따딴!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엄마는 울상으로 돌아와서 아빠와 나에게 많은 하소연을 했다. 나는 계란 볶음밥을 만들면서 뒷모습으로 적당히 들어줬다. 우리집은 어떤 의미로는 담백해서, 엄마는 혼자 막 말하다가 "그래, 이건 인터넷쇼핑도 시도하라는 신의 계시야. 서로 잘되면 좋지"라고 결론을 짓고 이야기 주제는 자연스럽게 군대간 동생으로 바뀌었다.
삭막할지로 모르겠지만 이게 올바른 딸과 엄마의 거리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나는 엄마에게 용돈을 받아먹고 사는 백수이고, 취준생이고, 그렇다고 엄마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없으며 엄마는 나보다 어른이기에 나의 도움을 여기서는 받을 수 없다. (내가 도움이 안 되기 때문) 그렇다고 내가 그 모든 힘듦을 다 들어줘야 할 필요도 없다. 난 자식이니까. 오히려 내 힘듦을 그들이 받아주면 받아줘야지.
내 친구들은 꼭 장녀가 아니더라도, 딸이면 일단 무조건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다. 나도 한때는 그랬다. 그들의 경우, 이에 대해 힘듦을 토로하면 어머니들은 딸이 그것도 못 들어주냐,며 화를 내거나 배신했다며 딸의 착한 마음을 마구 긁어내렸다.
어머니가 어머니의 친구와 해야할 일을 딸이 다 해주고 있다. 이 사이는 친구가 될 수 없다. 하나, 세대차이. 둘, 딸이 더 미숙하고 경험이 적음. 그렇기에 공유하는 주제에 대해서 동질감을 느낄 수 없다. 셋,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은 어머니의 모든 것을 맞추어주려고 한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엄청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그렇게 되도록 그들은 길러졌다.)
어디서든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지만, 가족간의 거리는 특히 더 의식해야한다. 의식하지 않으면 또 기대하고 상처받기에. 아니, 가족인데 기대하고 상처받으면 어떤가. 그냥 이 '적당한 거리 의식하기'는 전보다 빨리 회복하는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