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해를 한다. 했었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까. 오늘은 손목을 긋지 않았다. 글을 쓰는 지금도 긋고 싶은 충동이 여전하다. 매일 이렇게 참는 중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글쎄. 이제 곧 여름이니까. 때로는 이런 단순한 내 태도가 내 삶을 지탱한다.
멍청했던 내 과거의 정신적 빚. 갚아지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힘들어야 할까. 감도 오지 않았었던 나의 어제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 자연히 조그마한 숨구멍이 트인 오늘, 나는 살아가고 있다. 살아내고 있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는 옛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며칠 전에는 많은 꿈을 꿨다. 온갖 색깔의 잡생각이 한데 섞여 까맣게 되어 컴컴해지고나서야 마침내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무엇인가 그리웠다. 베개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나에게는 그에 합당한 핑계가 필요했다. 무슨 일이냐 물어오는 누군가에게 엄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은연 중에 그리웠던가. 웃기고 있네. 뜬금없이 엄마는 무슨 엄마. 어이없게도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집이 그리웠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 언제든 무너져 꺽꺽거리며 울 수 있는 곳, 그럼에도 끝끝내 나를 꿈꾸게 만드는 원망스러운 나의 그곳.
나는 울었다. 대상이 없는 그리움은, 나를 이렇게나 비참하게 만든다. 근원이 무엇인지도,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를 내 절절함이 까맣게 타고나서야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매초 매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내가 참혹하다. 자살을 실행치 못한다는 변명을 비겁하게 합리화하는, 내가 참담하다. 그렇게 애석하게 흘려보내기만 시간속의 내가 처참하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이제는 괜찮은 줄 알았다면 거짓말이다. 괜찮지 않아서 나는 더욱 괜찮은 척하며 스스로 용썼고, 제 감정에 무신경하려 타감정에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심이 나를 얼싸안을 때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육신이라도 움직였다. 차라리 명확한 이유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아직도 괜찮지 않은 이유를 나는 정말 하나도 몰라서 나는 울었다.
통각은 학습되는 것일까. 여러 생각들이 오갈 때면 손목이 아리는 것이 우습다. 아파 마땅해야 할 나의 존재가 느끼는 통각이 하찮아서 우습다. 딱 손목 그었을 때만큼의 아리는 것이 느껴져서, 내 몸이 내 아픔을 기억하는 듯해서, 긋는 순간 웃던 나의 모순이 떠올라서 우습다. 미친년이지. 왜 사는지 모르겠다. 정확히는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바라는 방향이라도 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나는 진심으로 이번 여름이 내게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온갖 색깔이 합쳐지면 새까만 색을 띈다. 온갖 색깔의 빛들이 합쳐지면 새하얀 빛이 된다. 까맣게 타 버린 내 꿈은 다시금 하얀 빛을 띌 수 있을까. 내게 그런 날이 올까. 오늘 나는 하얀 꿈을 꿀 수 있을까. 하얀 꿈. 지랄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