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님과의 면담 이틀 후인 월요일, 대리님과 차장님께 5일간의 휴무 결재를 올렸다가 차장님께 반려되었다.
“지금 시국이 어느 시국인데 경상남도를 간다고? 네가 갔다가 혹시라도 코로나에 걸려서 출근이라도 하면 우리 전부 문 닫아야 돼. 그리고 너 다녀오면 2주 동안 자가 격리 해야 해. 출근 못 해도 괜찮아?”
최대한 늦게 가는 방향으로 기간을 설정해 두고 시국을 지켜보자는 차장님의 말씀을 듣고 자리를 떴다. 가족들과 상의 후에 다시 말해 달라고 차장님은 말씀하셨지만, 나는 퇴근 후에도 출근 전에도 가족들과 얘기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감히 입 밖으로 내기 조심스러웠던 것이었을까. 가족들도 그래서 나에게 말하지 말라고 동생한테 신신당부한 것이었을까.
다음 날, 회의 시간에 차장님은 공개적으로 나에게 질문하셨다. 부모님이랑은 얘기해 보았느냐고, 이 시국에 설마 내려오라고 하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나는 울컥하는 마음에 대답하고 싶었다. 내려오라고 해서 내려가는 게 아니라고, 내가 내려가고 싶어서 내려가겠노라 결심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무릇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그렇듯 나는 조용히 웃기만 했고, 내 속은 그렇게 문드러졌다.
마음이 아리다는 이유만으로 언제까지고 피하기만은 할 수 없다.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정말로 숨이 차 전화를 제대로 못 받으시는 모습을 보며 속상해서 웃었다. 할머니, 많이 안 좋아? 내 친구가 먼저 전화해서 미안해. 내가 일하느라 바빴어. 할머니께서는 웃으시며 다 똑같은 손녀라며 일한다고 고생이 많다며 되려 나를 걱정하신다. 1분이 넘지 못하는 전화에 내 친구의 안부까지 꼭 전하라며 조심하라고 거듭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할머니가 괜히 미웠다. 할머니, 미안해. 할머니의 큰 손녀는, 할머니 강아지는 아직 할머니를 보낼 준비가 안 됐어.
할머니와의 전화를 끝내고 아빠에게 통화해서 물어보자 정확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2년 전, 허리 수술을 받고는 아픈 곳이 많게 느껴져서 담도 쪽이 편찮으신데 지나가는 아픔이라고 생각하셨단다.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가 보니 이미 몸에 퍼질 대로 퍼져 전이되었고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라고 한다. 짧게는 3개월 정말 길면 6개월이라고 한다.
나는 외가 친가 통틀어 첫째로 태어나 많은 사랑을 받았고, 나는 태어나서 아직까지도 2n년을 살면서 누군가를 떠나 보낸 적이 없다. 내 주변 누군가는 사고사로 갑작스럽게 잃은 게 병사하신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하더라. 이별에 경중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래. 적어도 준비할 시간이 주어진 거다. 비록 현재 코로나 19 때문에 본가에 내려가지 못하고 내려간대도 면회가 불가하지만, 내가 앞으로 평생 할머니 얼굴 한 번, 딱 한 번이라도 더 못 볼 수도 있겠지만. 다 괜찮다. 할머니가 나를 사랑하는 걸 아니까, 내가 할머니를 사랑하니까.
나는 이별이 어렵다. 내 생애 첫 이별을 준비하기에 나는 버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