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의 추악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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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의 추악한 기억

내 우울의 이유 (1)

순간의 유일

ㅡ갑자기, 진짜 문득 또 생각이 났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꼭 생각이 나는 것 같다. 울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내가 한심하다. 물론 내 잘못이 없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안다.  그렇지만 나는 자꾸만 내가 그곳에 가지 않았었더라면, 싫다고 울고불고  소리쳤더라면, 누군가에게 이상하다고 얘기했더라면, 하루라도 빨리 엄마에게 얘기했었더라면, 도와달라고 했었더라면 적어도 그랬었더라면 그런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날 저녁, 엄마는 왜 나한테 비밀로 하라고 했을까, 혹시 내가 부끄러웠을까. 언제부터였는지 생각나지도 않는다. 유치원생 때부터였던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나는 6살. 엄마한테 킥킥거리며 비밀 지켜야 한다며 얘기한 건 3학년, 10살.  5년. 10살 인생에 5년. 답이 없다. 엄마는 그날 뭐라고 했었을까. 왜 동생을 재우고 내가 잘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왜 신고하지 않았을까. 왜 더 이상 나에게 관련된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을까. 안경테, 머리카락, 헤어 스타일, 얼굴 생김새, 화분, 휠체어, 더위사냥 아이스크림, 1층 벤치. 모든 것이 너무 생생히 잊혀지지 않는다. 나든 그 새끼든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생각이 나는 걸까. 고통스럽다. 살인을 한다고 과거가 사라질까. 내가 더러운 걸까, 그 새끼가 더러운 걸까. 우리 엄마는 당시 내가 부끄러웠나. 오늘도 악몽에 숨이 턱 막힌다. 그래도 나는 이번에도 근처에서밖에 맴돌지 못하겠지. 왜 나였을까. ㅡ


평소의 명절과 다름없이 엄마의 포근한 품에서 안겨 배웅을 받고 자취방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엄마와 통화했다. 집에 잘 가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내 목소리에 피곤함이 들렸는지 엄마는 본가로 다시 들어오는 게 어떻겠냐며 말을 꺼낸다. 지겹게도 몇 년간 들어온 말이지만, 오늘은 좀 다르게 들린다. 며칠 전의 다이어리 때문이었을까.  본가로 와라, 가지 않겠다의 반복. 결국 시답잖은 말다툼으로 전화를 끊었다.  


어릴 때의 추악한 기억은 더럽게도 오래간다.  자그마치 10년이 지나서야, 그제서야 나는 엄마에게 그날 일을 물어볼 용기가 생겼다. 그것도 바보같이 목소리 들을 용기는 없었나 보다.


[내가 왜 본가에서 살지 않으려는 걸 아느냐고,  나는 그 도시가 싫다고, 매년 내가 울었던 것을 아느냐고, 그때 당시에 왜 나한테 숨기라고 했느냐고, 엄마가 내 눈도 안 보고 무섭게 말해서 나는 내가 잘못한 줄 알고 내가 잘못했다고 했던 건 생각나냐고. 엄마, 몇 년 전에는 그 사람 집앞에 맞은 편 계단에서 그 집 보고 있었어. 나오면 죽여 버리려고, 뭐라도 하려고 갔는데, 몸이 떨려서 그냥 집에 왔었어.  나는 엄마가 미웠어.  왜 나한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어? 엄마는 내가 부끄러웠어?]

 ㅡ 경찰 조사라도 받게 해서 벌 주고 싶었는데, 지금은 가해자 탓을 하는 사회지만 그 당시에는 피해자를 탓하는 구조였기에 벌보다 소문이 더 무서웠다고 한다. 어린 여자애가 몸 간수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성에 대해 못 배웠다는 소문이 나면 내 학교 생활에서부터 내 생활, 내 모든 삶이 흐트러질까 염려하셨단다. 생각이 날 때마다 엄마도 너무 고통스러워 그 집에 찾아가서 난리를 쳤단다. 그 집 자식들도 다 알게 하고 소리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침을 뱉고 난리를 치고 그랬단다. 내 잘못이나 내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당신이 더 큰 벌을 주지 못하고 그 노인이 죽었다는 게 당신 잘못 같단다.  온 세상이 잘못했다고 한들, 나는 잘못이 없단다.

 

서로 목소리 들을 용기가 없어 텍스트를 주고받는데 오타가 너무 나서 결국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한참을 정말 한참을 서로 울었다.  당신은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고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울었다. 또 10년을 묵힌 얘기를 이제 와서 꺼내들어 너무 죄송하다고 했다. 죽은지도 몰랐다고. 그것도 모르고 난 아직도 매일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며, 왜 자기 마음 대로 죽냐고 엄마와 나는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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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에 결론은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힘들어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까.  이것이 내 우울의 이유라면 이유이다. 서로 울며 엄마와 몇 시간을 통화한 것도 몇 년 전의 일이지만, 여전히 나에게 치유되지 않은 문제이고, 시간에 따라 점차 잊혀지겠지. 잊혀져야만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나는 살기 위해, 잊기 위해 이 글을 썼다. 나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지낼 수 있고, 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엄마와 나는 그리고 뭇 여성들이 언제나 그랬듯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가 되어 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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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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