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핀치 타래정신건강관계

우산

맏딸로 살아간다는 것은

순간의 유일

“엄마, 나 여기!”

7월의 장마가 시작되었다. 귀하디 귀한 내 새끼 비에 젖을 세라, 앞다투어 교문 근처에 서 있는 사람들을 지나치는 소녀. 혹시나 우리 엄마 있을까 슬쩍 살펴보지만 오늘도 우리 엄마만 없다. 우중충한 하늘처럼 회색빛의 칙칙한 하굣길. 쏟아지는 폭우를 얇은 비닐우산으로 막아들었다. 빗방울 소리가 다른 이들의 소음을 삼킨다. 소녀는 슬프지 않았다. 어쩌면 외로웠던가. 30분 남짓의 거리 골목길을  부러 씩씩하게 걸었다. 웅덩이에서 발을 담가 첨벙첨벙. 집에 가는 길 들꽃 앞 진흙에서도 질척질척. 운동화가 젖어도 상관없다. 어리고 작은 여자아이는 우산에게 묵묵히 감싸안겼다. 우산의 존재는 비록 온기는 느끼지 못할지언정 아늑함을 느끼기에  소녀에게 더없이 충분했다. 이제 집에 가야지. 소녀의 작은 입술에서 나온 읊조림은 투명한 빗방울이 되어 번진다.


차가운 열쇠와 이어져 있는 빨간 실을 하얀 목에 걸고서 소녀는 아무도 없는 집으로 담담히 향한다. 민지는 집에 가면 엄마가 맞이해 준다는데, 아, 교문에서 맞이해 주려나, 따위의 생각과 동시에  제 부모님을 떠올리다 고개를 젓는다. 떠올려 보면 고작 비닐 우산일 뿐인 그것에 위로를 받았던가. 열쇠를 꽂아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회색의 커다란 무선 전화기의 벨이 울린다. 발신자 번호를 볼 수도 없는 전화기였지만 소녀는 알 수 있다. 일부러 수화기를 늦게 들었다. 일종의 어리광 정도라고 치자. 이 전화를 받지 않기까지 하면 엄마는 날 걱정해서 일하지도 못할 거야. 

“여보세요….”

전화는 왜 늦게 받니, 집에는 잘 왔니, 배는 고프지 않니, 집에 창문은 제대로 닫혀 있니, 쏟아내는 나의 보호자에게 저는 괜찮다고 더욱 강조하여 안심시키는 소녀는 갓 여덟 살이었다. 

유난히도 우산에 집념, 집착이 생겨 버린 나는, 현재까지도 찢어져 쓸데없는 우산들까지 우산꽂이에 가득하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의 어릴적의 우산들이 현관에서 꼭, 몇 초는 더 머무르게 만들고는 한다. 펼쳐보는 우산마다 고장나 있으면 온갖 짜증이 나서 바쁘다는 핑계로 현관에 던져 버리곤 귀가 후, 언제 그랬냐는 듯 우산꽂이에 넣어 둔다. 참 쓸모도 없지. 나의 외로움은 그렇게 여덟 살부터였을까. 비가 내릴 때부터 외로웠을까. 비 오는 게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에서야 나는 부모님을 이해한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맞벌이 부모의 첫째딸 이라는 이유로, 맏딸이라는 무조건적인 기대가 존재했기에 아무래도 괜찮아야 했다. 소녀에게는 두 살‘이나’ 어린 여동생이 있었으며, 막내딸로 자란 여동생의 성숙함 또한 소녀의 몫이었기에. 소녀에게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기에. 언제나 어른스럽고 성숙하기만한 아이로 자라야만 한다.  

어릴 적의 나는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두려워했다.  모순적이게도, 빗방울 소리를 낳는 우산을 사랑했다.   

SERIES

나는 괜찮지 않습니다.

순간의 유일의 최신 글

더 많은 타래 만나기

주접

플레잉 카드

헤테트

#플레잉카드 #트럼프카드
버드 트럼프Bird Trump 원고를 하고 있는데 택배가 왔다. 까마득한 언젠가 텀블벅에서 후원한 플레잉 카드 (=트럼프 카드) ! 원래 쟉고 소듕한 조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맹금류를 제외한 새를 무서워하는 편) 이건 보자마자 이성을 잃고 냅다 후원해버렸다. 그 뒤로 잊고 살았는데 오늘 도착. 실물로 보니 과거의 나를 매우 칭찬해주고 싶다.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어, 세상에. 하다못해 쓸데없이 많이 들어있는 조..

13. 대화하는 검도..?

상대의 반응을 보며 움직이라는 말

이소리소

#검도 #운동
스스로를 돌이켜보기에, 다수의 취향을 좋아하는 데 소질이 없다. 사람들이 아이돌이나 예능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체온이 2~3도는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대화에 섞일 적당한 말이 뭐 있지?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 뭐라도 이야깃거리를 던져보지만 진심이 없어서인지 어정쩡한 말만 튀어나온다. 결국 혼자 속으로 “난 만화가 더 좋아.."라며 돌아서는 식이다. 맛집에도 크게 관심이 없고, 어째 운동 취향도 마이너한 듯하고.....

보장 중에 보장, 내 자리 보장!

이운

#방송 #여성
나는 땡땡이다. 아마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듣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 팟캐스트는 쓰잘데기 없는 고민에 시간을 올인하고 있는 5천만 결정장애 국민들을 위한 해결 상담소로, 철저하게 비밀을 보장하여 해결해 준다는 취지하에 만들어진 방송이다. 그리고 ‘땡땡이’는 이 취지에 맞게, 사연자의 익명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하다 만들어진 애칭이다. 비밀보장 73회에서..

4. Mit Partnerin

여성 파트너와 함께

맥주-

#여성서사 #퀴어
여성 파트너와 함께 이성애 규범과 그 역할에 익숙해진 내가, 동성애를 하기 위한 일련의 역할들과 그 수행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실용적- 불필요한 장식이 없고 기능에 충실한-인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여가로 쓸 수 있는 시간에는 사회에서 ‘여성적’ 이라고 해석하는 복장을 하고 있기를 좋아한다. 하늘하늘하고, 레이스나 프릴이 달려 있고, 패턴이 화려한 옷들. 재미있는 것은 패턴..

말하지도 적지도 못한 순간들 -12

환자가 떠난 후 남은 딸이 할 일

beforeLafter

#죽음 #장례
끝났다. 사흘 간의 지옥같고 전쟁같고 실눈조차 뜰 수 없는 컴컴한 폭풍우 속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끝났다는 것이 식이 끝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럽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엄연히 존재했던, 60여년을 살았던 한 '사람'을 인생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후루룩 종이 한 장으로 사망을 확인받고, 고인이 된 고인을 만 이틀만에 정리해 사람..

병원이 다녀왔다

..

낙타

정신병원과 한의원에 다녀왔다 이번엔 둘다 끝까지 치료하고 싶다.....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