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과 'kibun'의 문제에 대해서
딱 하룻밤.
이상한 사람들이 나에게 이상한 등급을 매기고 이상하게 소비(안)하는 이상한 나라에 나는 딱 하룻밤 있었다. 그 때만큼은 그 나라의 법칙이 나를 재단하는 유일한 기준이었다. 나는 홍등 아래를 새벽 내내 혼자 지키면서 내 가치없음에 화장이 지워지도록 서럽게 울다가 옆 가건물의 매우 빈곤해 보이는 잠자리에 웅크려 잠이 들었다. 다행히 전날 받은 8만원이 있었다. 늦은 오전 쯤에 일어나자마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짐을 챙겨 탈출했다.
거기가 경기도 어디쯤이라는 것은, 큰길로 나가 버스를 탈 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집도 절도 없었지만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가 조금 고상 떠는 룸살롱에서 안 팔리진 않으니까. 본가 근처에서 예행연습을 해본 것이 큰 도움이었다. ‘나를 사줄 수 있는 다른 (그나마 좀) 멀쩡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전날밤의 절망을 털고 일어서는 게 빨랐다.
바로 강남으로 갔다. 몇 군데 전화를 걸어 봤고, 나는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작동시킨 적 없었던 인간 평가 레이더를 바쁘게 가동했다. 여기는 법도 도덕도 없는 영역이었다. 베풂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처음으로 머리를 굴렸다. 나의 어려움을 숨기고 높은 가치를 매겨달라고 예쁜 척을 했다.
조금 어수룩하고 모범생 타입에 반반하게 생긴 실장을 잡은 건 꽤 운이 좋았다. (그리고 이 성실한 양반과는 한 번도 서로 성적 대상이 된 적이 없었는데, 자취방을 구하는 문제와 얽혀 나중에 이 사람의 존재가 고향의 부모님께 우연히 알려졌을 때 부모님이 그 남자는 웬 남자냐며 길길이 뛰었던 것도 참 아이러니하게 웃긴 일이다.)
확실히 나는 전날보다 많이 ‘존엄’ 해졌다.
나는 바닥의 바닥에서 순식간에 화려함 중의 화려함으로 격상되었다. 나는 테헤란로 근처의 렌탈샵에서 직원들의 추천을 잔뜩 받으며 옷을 골랐고 청담동에 가서 걷기도 힘든 구두를 선물로 받았다. 한 번 콜에 만원씩 하는 고급차를 타고 다녀서 3분도 채 걸은 적이 없었다. 한 번 세팅하는 데 2만5천원 하는 머리와 4만원 하는 메이크업이 있다는 것도 그날 저녁때 처음 알았다. (스스로 메이크업하고 눈썹만 붙이면 2만5천원인가에 해준다고 나중에 들었다.)
아가씨들은 가게의 가장 중요한 간판이기 때문에 그 경계 안에서는 가장 높은 존재였다. 동시에 바깥세상에서는 가장 멸시받는 존재였겠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런 마당에, 병만 없다면 남의 성기 좀 빤다고 그게 무슨 문제인가.
애널 좀 핥아준다고 (철저히 깨끗하게 씻은 다음이라면) 그게 무슨 문제인가.
어차피 세상에는 내가 스스로 섹스하고 싶어질 정도로 훌륭한 ‘남자(성적 대상인 의미로)’는 없고, 나는 그냥 물건 같은 고객들에게 내 할 일을 열심히 할 뿐이었다. 일을 열심히 하면 내 존엄이 손상되나?
간혹 인터넷에서 그런 우스개가 보인다. 예컨대 10억을 받으면 싫어하는 사람(주로 정치인) 누구누구 똥꼬나 좆 빨아줄 수 있냐고.(물론 그 정치인은 그런 것을 요구한 적 따위 없다.) 그게 남자들이 자기 존엄에 매기는 가격이다. (물론 그게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지느냐 아니냐 여부에 따라 가격이 좀 달라지긴 하겠지만 그것은 법적으로 명예훼손 시 발생하는 합의금액을 따른다 가정하자. 그것도 딱히 10억씩이나 될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얼마나 그 존엄인지 'kibun'인지 손상되어본 적이 없으면, 고작 그런 것에 억만금의 가치를 매기는지 모를 노릇이다. 애초에 그런 놈들에게 10억씩이나 주고 자기를 빨아달라고 하는 유명인사도 없는 게 당연한데. 이건희도 여자를 살 때는 500만원만 줬다.
정작 존엄을 파괴하는 균열은, 그보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곳에서 오는 법이었다.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모 호텔이었고, 그 후로도 나는 실장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인맥이 닿는 대로 여러군데의 업소를 전전하고 다녔다. 대기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경우에는 대부분 허름한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으라는 식이었다. 큰 호텔에 딸려있거나 따로 대기실이 없어 룸살롱의 방 하나를 대기실로 쓰는 경우에는 당연히 그보다 고급스럽고 화려했다. 물론 그렇다고 다 좋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웹툰의 모티브가 된 걸로 유명한 YTT에도 잠깐 있었는데, 거긴 대기실이 무슨 학교 운동장만큼 넓어서 분위기는 시장바닥 같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담인데 내가 거기 있었을 당시에 거기서 HIV 보균자가 두명 나왔다고 한다. 와우!)
구질구질한 것은 대기실만이 아니었다. 아가씨들은 평소에 호텔의 카펫 깔린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 타는 것은 손님과 함께 팔짱을 끼고 나갈 때뿐이다. 쪽문으로 들어와서 미로처럼 건물 구석에 숨어있는 비상계단이나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출근한다. 퇴근할 때는, 그래도 모든 영업을 마감한 다음이라면 다른 직원들과 사이좋게 웃으며 카펫 깔린 정문으로 퇴근할 수 있었다.
때로는 주방이 밖에서 보이는 곳도 있었다. 주방은 대개 좁았고 으레 다른 음식점에서도 그렇듯 별로 깔끔하지 못했다. 주방 아주머니는—물론 우리 아가씨들이나 웨이터들과는 대면해야 했지만—그림자처럼 일했다. 이 화려한 접대의 장에 ‘어울리지 않는’ 이면의 노동자는 감추어져 있어야 했다.
아가씨들의 대기실이, 비상계단이, 손님 앞에 감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도 사실은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벽이 뜯어지고 장판이 일어나는 방에서 뒹굴거리는 본연의 모습은 감추어져 있었다. 아가씨들은 이곳에서 가장 떠받들어지는 중요한 사람인데 정작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아무도 그녀들을 대접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손님의 성기를 빠는 게 내 존엄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내가 획득한 권력이, 대우받는다는 느낌이, 오직 손님으로부터 위임된 권력임을—허상이고 기만이었음을 깨닫는 것이 훨씬 ‘좆’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