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녀됨의 기록: 2. 나는 빨리 '걸레'가 되어야 했다

생각하다성노동

창녀됨의 기록: 2. 나는 빨리 '걸레'가 되어야 했다

이로아

중간에 내가 화를 내서 멈추기는 했지만 미수/기수로 따진다면 기수였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이것이 강간이 될 수 없음을 그때조차 너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부모로부터조차 ‘남자를 밝힌다고’ 낙인찍힌 년이니까. 여기 와서 자라고 한 게 나였으니까. 세상은 내 편이 아니었고, 나와는 생각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고, 나는 그 거대한 대상을 설득할 능력이 없었다.

몸은 일주일 동안 아팠지만 신고는 물론 안 했다. 게다가 나는 놀랍게도, 조금쯤은 그래, 이렇게 한 번 섹스를 해 주면—정복당해 주면—놈의 이해할 수 없는 연애감정도 사그라지지 않을까 체념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날 이후 아예 나를 애인으로 생각하고 대하는 놈의 행동거지였다. 애인이 된다는 것은 친구관계와 다르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완전히 새로운 인간관계의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깟 놈에게 정복되고 소유된다는 것이, 또 대외적으로 그렇게 취급된다는 것이 어떤 모멸인지를 비로소 인지했다.

놈은 나를 제 친구들 앞에 데리고 가서 밥과 술을 사며 자랑스레 소개했다. 다름이 아니라 ㅇㅇ대 여자인데, 어릴 때부터 몇 년이나 짝사랑하다가 얻어낸 전리품이라고 (혹은 조만간 그렇게 될 거라고) 말이다. 열 번 찍어 나무를 쓰러뜨린 성공적인 사례라며 기세등등한 꼴이었다.

나무? 쓰러뜨려? 연애가 곧 소유가 아니라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남자가 여자를 정복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 인식조차 그들에게는 없었다. 구역질이 났다.

놈은 연애라고 착각하는데 나는 아니었으니, 자연히 이 관계는 스토킹이 되었다. 나는 밤에 멋대로 찾아와서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고 그 앞에서 새벽까지 버티다 돌아가는 놈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놈을 제거하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무작정 만나지 않는 것은 답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단지 친구관계라는 선을 그으려 애썼을 뿐이다. 스토킹에 대한 인식도 없을 때였고, 끝내 내 나름대로 한다고 한 것이 놈을 대면하고 솔직한 멸시를 표현하는 것뿐이었다.

사람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고 평생 배웠고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 입은 자존감은 신기할 만큼 모욕을 쏟아냈다. 이 모든 것은 그동안 착하게 외면해왔던 사실이었다.

놈은 끔찍할 정도로 못생겼고, 체격도 작고, 공부고 운동이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몸에서는 아무리 씻어도 역한 냄새가 났다. 유일하게 조금 한다고 자부하는 한 가지는 남들이 취미로 하는 것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이놈이 공부머리가 있는 꼴을 못 보았는데 그 때는 제 주제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놈과 대화를 하면 언제나 깡통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가르치면 좀 나아질까 기대한 것도 그 정도 두고 봤으면 되었다. 가망이 없었다. 놈은 그 동안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단지 ‘내가 하는 말이니까’ 헬렐레 듣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도대체 예쁜 부분이 있어야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놈이 극단적인 짓을 저지를 정도의 쓰레기는 아니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너는 나를 소유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였는지 놈은 내 앞에서 사라졌다.

놈은 사라졌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첫경험.

빌어먹을 세상은 첫경험을 왜 그리 신성시하는가. 아니, 애초에 왜 인생 첫 섹스를 ‘첫경험’이라는 애매한 단어로 부를 정도로 거기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나. 다들 뭐라도 되는 것처럼 첫경험을 찬양했다. 첫경험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두근거려야 한다고, 설레어야 한다고 말이다. 첫경험을 치르는 여자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영원한 판타지였다.

20대 초반의 여자에게 집중적으로 주입된 순결과 사랑의 성교육은 첫경험이 소중한 것이어야만 한다고 내게 자꾸만 강요를 했다. 하지만 이미 나는 망했는데. 다른 어떤 것에서도 실패한 일이 드물었던 내가, 인생 단 한 번 오는 기회는 이토록 처참하게 말아먹었는데.

나는 그런 상태를 오래 견딜 수 없었다. 어떻게든 다르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강간 한 번쯤 당한 건 괜찮으니까 차라리 그 ‘신성한 첫경험’이 아니었다면 좋겠다. 내가 처음부터 아무 남자나 먹고 다녀서 섹스 한 번쯤에는 코웃음칠 수 있는 강한 여자였다면 좋겠다. TV나 소설에나 나오는 닳고닳은 그런 언니들처럼.’

나는 수많은 경험들 속에 첫경험이 파묻히기를 원했다. 하루가 급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걸레’가 되기로 했다. 그것도 속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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