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동을 그만둔 지금, 나는 누구의 흔한 상상처럼도 살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서른 즈음이 되었으니 순진하고 성실한 남자를 유혹해 호화로운 결혼을 하는가? 혹은 내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고독한 삶을 사는가? 어쩌면 성노동 주변에 기생하는 패션뷰티 산업에 종사하며 여전히 준-창녀라 손가락질 당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과거를 완전히 세탁하고 번듯한 직장을 구해 주변 사람들을 기만하는 예쁜 여사원 1이 되었는가?
어느 것도 아닌 나는, 아직도 예전과 똑같은 싸움을 묵묵히 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나는 웬만한 다른 사람들보다 좋은 계층에 있고 좋은 조건을 타고났으며, 양보하고 베푸는 친절을 미덕이라 알고 있고 내 스스로가 강해야 한다는 신조를 붙들고 산다. 이것들은 참으로 선량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사회가 내 여성성을 착취하기 위한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안다. 그 경계가 어디인지 눈치챌 정도로 영리함에도 불구하고, 부당함을 끊어낼 정도의 힘은 부족하다.
나는 내 소질과 적성과 전공과 능력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럼에도 나를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주변 남자들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을 잘 하는지, 혹은 업무 측면에서 무능한지도 계속 지켜보고 있다.
나는 소위 말하는 똑똑하고 만만찮은 여자다. 동시에 마음만 먹으면 남자 같은 것쯤 하루에 하나씩 휘어잡고 흔들 수도 있다. 페미니즘은 나의 창이지만 아무 때나 꺼내지 않고, 만들어진 여성성은 나의 방패이지만 그 또한 아무 때나 꺼내지 않는다. 두 가지가 말 그대로 모순이라고? 아니, 모르는 소리.
나는 ‘여자’가 되는 데에 25년이 걸렸지만, ‘여자’로 평가받기 위해 인생을 바쳐 노력하지 않는다. 그보다, 나는 대상화되지 않은 온전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취급받기 위해 노력한다. 그 와중에 표면적인 정치적 올바름이나 주장의 일관성이 설 자리가 어디 있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까지 내 자아를 항상 지켜야 했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온건하고 경우바른 행동과 정반대로, 본질적으로는 아주 이기적으로 생각하도록 변해야 했다.
좋은 섹스 상대가 되어준다고
누가 상 주지 않는다
예쁘다, 착하다, 좋은 섹스돌이다. 낮에는 숙녀고 밤에는 요부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이런 기준을 잘 지켜서 듣는 칭찬은 결과적으로 매우 공허했다. 영화 <은교>에 그런 말이 나온다. 젊음은 잘함에 대한 상이 아니다.
맞는 말이지만 맥락을 생각하면 이 말은 참 더럽다. 젊음은 상이 아니고 늙음은 벌이 아니라는 말로 젊은이(소녀)를 후려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늙은 자는 젊음(+여성)을 탐하고 욕망하고 있잖은가. 그런 말 할거면 그 욕망이나 먼저 치우고 이야기하시든지.
젊음, 젊은 여자, 젊어서 예쁜 20대 여자—라는 것은 다른 모든 이들이 탐하고 욕망하고 트로피처럼 여긴다. 하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그것이 어떤 잘함에 대한 보상도 아님을 깨달으라고 한다. 한마디로 넌 아무것도 아니니까 우쭐대지 마라 이 소리다. 물론 아니긴 하지. 그런데 이때까지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강화하고, 그렇게 했을 때만 한 사람의 ‘가치있는 여자’로서 대해주었던 온 사회의 강화는 어디로 쏙 빠지고 갑자기 젊은 여자에게 주제를 알라며 후려치기이신가? 그 젊고 예쁜 여자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공짜로 네놈들 앞에 예쁘게 짠 나타났다고 생각한다면 경기도 오산이다.
상이 아니라는 말은 그 속성의 우월함에 대한 가치를 희석시킨다.
그래서 예쁘다는 칭찬은 곧 ‘너만큼 예쁜 애 널렸다’로 변하고, 착하다는 칭찬은 ‘그런 애 아닌 줄 아니었는데 완전 ㅇㅇ녀네’라는 비난으로 손쉽게 변한다. 그 예쁘고 착한 본인이 어떤 인생을 들여 그러한 자신을 형성해왔는지는 가볍게 무시된다.
나는 어려서부터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가진 장점을 남을 위해 베풀어야 한다고 배웠고 그 성과에 만족을 느꼈다. 그리고 사실 내가 온 세상에서 깽판을 칠 정도로 위대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은—중2병이 나은 이후로는 - 자존감이 점점 떨어져서, 한바탕 추락을 겪고 나서는 결국 ‘도대체 어떤 일을 해야 내가 남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될 수가 있나’를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아무 것도 할 줄 모르고(모른다고 생각하고 있고) 가치 없는(없다고 생각한) 내가 당시에 칭찬 받고 있던 유일한 분야는 예쁜 것이었고, 섹스를 잘 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그것을 강화했지만 물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거나, 제일 명기라거나, 하는 것은 누구도 보장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그들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그놈들은 흡족함을 표현하느라 내 앞에서만 예쁘다 예쁘다 예쁘다, 나를 계속 자기 변기로 삼기 위해서 너하고 섹스 좋다, 잘한다, 마인드 좋다————! 그렇게 말하는 것뿐 아닌가. 심기에 거스르는 순간 ‘까짓거 뭐 그리 예쁘다고?’라든가 ‘창녀가 섹스 잘하는 게 당연하지’ 따위의 말을 들을지 몰랐다. 혹은 그게 내 착각이고, 내게 매달렸던 남자들 중 내가 그들을 버리고 떠나서 자살이라도 하고 싶었을 정도로 푹 빠진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들 옆에 있을 때만 확인받을 수 있는 우수함이 ‘내’ 자존감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어쨌든, 방황은 끝나고 내 몸뚱어리가 남기는 했다. 그리고 아마도 아직까지 수많은 남자들이 욕망하고 망상하는 비현실적인 이미지에 얼추 부합하는 이 몸을, 나는 놈들이 아니라 오직 내 쾌락을 위해서만 쓰게 되었다. 그건 좋은 일이었다.
몸도, 돈도, 더욱
아득바득 지켜야 했다
몸의 상처는 낫지만 마음의 상처는 낫지 않는다고? 누가 그런 속 편한 말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몸의 상처가 낫는가? 남자들이 멋대로 굴리고 남는 여자 몸의 상해는 대개 완전 회복이 불가능하다. 임신이라도 하면 그만큼 수명을 깎아내리는 것이고, 젊음과 가임능력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점에선 '몸을 판다'는 표현도 일리가 있지.)
설령 개중에 가벼운 병증 몇 가지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된다 하더라도, 여자 몸에 유독 엄격한 세상의 잣대는 그것을 결코 ‘완전 회복’으로 인정해주지도 않는다.
내가 쓴 화류계 이야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화류계도 꽤 할만하고 괜찮다’라는 의도로 읽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운이 좋았고, 살기 위해 온갖 눈치를 동원했고, 큰 빚을 지지 않았고 그걸 갚을 만큼 잘 벌었고, 무엇보다도 여성의 신체에 대한 지식이 사전에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몸에 대해 말하자면, 매달 산부인과에 가서 검진을 받았다. 각종 검진비를 합하면 한 번에 15만원정도 든다. 그 외에 자잘한 상처, 질염, 방광염 같은 것은 그냥 집에서 참은 적도 있는데 늘 병원을 다니는 아이라고 별종 취급을 받았다.
물론 그것도 내가 등록금을 내고, 월세랑 관리비도 내고 성노동에 드는 치장비를 다 지불하고도 충분히 남을 정도로 돈을 잘 벌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더욱이나 각종 성병의 증상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어떤 검사를 받아야 하는지 외고 있으며 심각한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해 회복 불가능한 심각한 질병에 대해서는 (남자를 구슬러) 적절한 예방법까지 취했기 때문에 그나마 창녀가 까다롭다고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을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성노동으로 흘러들어가는 여성들 대부분이 최소한 그런 준비라도 하고 갈 수 있었을 리 없다. 그 모두가 충분히 독한 마음을 먹고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타인의 평가에 짓밟히지 않을 정도의 끈질긴 자존감을 가졌다고 할 수도 없다.
남는 것은 결국 몸, 그리고 돈뿐이다.
성노동을 계속하든, 관두고 다른 일을 찾든, 계속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생활밑천이 갖춰지고 몸이 멀쩡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이다. 정신적인 안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수록 더더욱 재산과 육신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남아있으면 마음을 먹는대로 언제든지 절망에서 일어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어떤 성노동자는 일을 관두었을 때 자기에게 남은 것은 다시 입을 일도 없을 ‘100만원 넘는 명품 홀복’ 여러 벌뿐이었다고 한다. 이상하다. 솔직히 나도 ‘명품 홀복’이라는 게 있으면 단 하나!쯤 가지고 싶어서 다 뒤져봤는데 홀복 그렇게 비싼 것은 없었다. 쇼핑몰에서 파는 건 끽해야 한 벌에 10만원 20만원 하고, 본가 근처에서 튜토리얼을 했을 때나 강남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나, 홀복은 어디서 사냐고 실장과 마담에게 물었을 때 알려주는 로드샵에서의 가격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더 싸면 쌌지.
우리가 보통 아는 소위 ‘명품’ 브랜드에서는 홀복 비슷한 것을 만들지도 않았다. (있다면 이브닝드레스 뿐이다.) 어디 내가 모르는 곳에 암흑의 명품 홀복 장인이라도 살고있나? 만드는 주체가 없는데 도대체 파는 사람은 어디서 그런 걸 구해와서 파나? 게다가 누가 명품이라고 인정했나 그걸?
대체 그 아가씨는 어디서 명품 홀복이라는 것을 100만원씩이나 넘게 주고 그렇게 잔뜩 산 것일까. 글쎄,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은 있다. 대기실에 있다 보면 여러 종류의 잡상인들이 와서 영업을 한다. 건강식품 같은 걸 팔면 그나마 다행인데 내가 자주 본 건 짝퉁 가방 영업이었다. 그게 A급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짝퉁인 것을 그래도 수십만원이나 되는 가격에 파는데, 그걸 또 아가씨들이 산다. 그나마 그건 짝퉁인 걸 알고 사긴 하는데.
그게 아니라면 악질적인 중개상이 어딘가에 있었을 수도 있다. 처음 일을 시작한 아가씨가 홀복 같은 것을 어디서 구하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냥 실장이나 누가 홀복 소개해주면서 이게 명품이다, 이게 얼마짜리다 하면 그대로 믿고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기를 당했으면서, 그게 사기였는지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그 세계가 폐쇄적이다.
화대가 비싼가? 그 비싼 강남의 원룸에 살면서 홀복을 입고 머리를 하고 메이크업을 받고 매일 출근해, 당장 밑천이 없으면 사채를 써서 그것까지 갚아야 하는 화류계 아가씨에게 주는 화대가 비싼가? 혹은 여자와 섹스하는 데 드는 비용이 일반적으로 비싸다고 생각되나? 그 잘난 ‘능력남’이 어디다 갖다 꽂았는지 모르는 성기를 들이대고 쑤셔서 그 후에 여자가 일주일 내내 앓는 건 공짜라고 생각하나? 하긴, 임신도 가볍게 생각하는데, 잠깐 병원 좀 다니는 것 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다시 말하지만 치명적인 몇 가지 성병과 성기 건강상태에 대한 검진을 받는 것만으로도 한 번에 15만원이다. 요새 오피에서 남자들 얼마 내나?
물론 성노동은 악행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으로 인해 폭력이나 멸시 등의 대우를 받는다면 가해자가 잘못한 것이고, 피해자는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또 지금은 불법인 산업이니 합법으로 해달라고 투쟁하는 것도 정당한 의사표명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노동에 발을 들인 후 무사히 빠져나가기는 개인에 따라 매우 어려운 문제다. 그래서, 더욱 스스로 철저히 자기의 몸과 돈을 관리하며 생활해야만 한다. 지금은 성노동을 하다가 부당한 일을 당해도, 법의 보호조차 받을 수 없다는 현실도 감수해야 한다. 결국 그 법을 바꿔달라고 투쟁하는 것도, 우리들 본인이 멀쩡히 살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나.
그래서 내가 창녀고, 마녀인데요
돌이켜보면 나 같은 사람이 사회의 소위 ‘정상적이고 선량한’ 사람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그 ‘정상인들처럼’ 살고 있다고 하면 심기가 불편하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이 창녀를 색출해서 공개처형하고 어떤 피해자도 내게 걸려들지 않도록 온 세상에 경고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나는 익명을 쓴다. 거짓 프로필을 쓴다. 이것은 내가 창녀됨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저 공개처형을 부르짖는 머저리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왜, ’선량한 피해자’가 어딘가에 있을까 봐 걱정되나? 괜찮다. 나는 충분히 양심적이고, 나와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은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다들 알고 이해하고 있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된다.
남자들은 자기와 한 번 얼굴 볼 일이 없는 사람인데도 누가 창녀인지 그토록 알고 싶은 모양이다. 특정 부류의 여자를 결혼상대로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멍청한 경고문들은 남자들 사이에 얼마나 부질없이 떠돌아다니는가. 한때는 야한 여자를 거르라더니, 진짜 유흥 종사자들은 평소에 야하게 다니지 않고 추리닝이나 입고 다니니 강남에서 추리닝 입고 다니는 여자를 경계하라고 한다. 외로우니 요크셔테리어나 말티즈 같은 강아지를 키우고, 노동환경때문에 담배를 피우고, 현실의 인간관계가 없으니 여가시간에는 PC방이나 집구석에 틀어박혀 FPS게임이나 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물론 그건 어느 정도 귀납적으로 맞는 말이다. 정말로 그 ‘강남 룸 아가씨의 교과서’를 따라 살고 있던 친구도 내가 잠깐 돌봐준 일이 있다. 일 시작하자마자 PINK 추리닝이랑 돈도 없다면서 60만원짜리 강아지부터 사더라….왜죠.
간호조무사를 조심해라, 유치원선생을 조심해라, 패션뷰티산업 종사자 조심해라…. 이 사람들은 남자들에게 아무 죄도 없이 노는 여자, 준-창녀로 취급받으며 창녀와 균질한 이미지로 소비된다. 그 중에 ‘창녀’가 아닌 여자를 면밀하게 구분해내는 것은 남자들의 원하는 바가 아닌 모양이다. 대신,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여러 여자들을 대충 창녀로 낙인찍는 것 자체를 즐거워하며 낄낄대는 것 뿐이다. 그 ‘낙인’이 찍힌 쪽의 입장은 아무 관심도 없다. 그런데 사실은 그 낙인 찍힌 쪽들도, 찍은 쪽한테 아무 관심이 없다.
남자들에게 그녀들은 모두 그냥 길에 지나가는 타인들이다. 소개팅에 나와서 자기를 속여 유혹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조차 99.9%의 그들에겐 망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사실 창녀이고 마녀인데, 길가는 남자들에게 나는 그냥 길가는 여자일 뿐인 것이다. 동창들에게는 그냥 평범한 동창일 뿐이고, 데면데면한 직장동료에게는 데면데면한 직장동료 여자일 뿐이고, 인터넷에서 만난 키배 상대에게는 그냥 키배 상대이지 거기서 내 ‘창녀됨’이 나올 필요도 근거도 없다. 누가 내게 잘해주지 않는다면 보답할 이유가 없고, 내게 해코지를 않는다면 복수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아무 상관없는 타인들이여, 창녀 옆을 그냥 스쳐 지나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