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5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총격 테러가 발생했다. 이민에 반대하는 인종차별주의자의 테러였다. 50명이 사망했고 또 50명이 다쳤다. 테러범은 이슬람 사원을 공격했고, 많은 무슬림 교도들이 희생됐다. 같은 날, 내가 지내던 오클랜드에서도 폭발물로 의심되는 가방이 발견됐다. 이번 사건과 무관하다는 기사를 봤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다음 날 시내에 나가니 평소와 달리 이상할 만큼 백인들밖에 안 보였다. 주차장에서 깨진 유리창을 보고 덜컥 겁이 났고, 길에서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백인 남성이 무서웠다. 그날 외출을 하기 전에 수없이 고민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의연하게 일상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나오자...
어느 날 마침내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즐거운 신혼여행을 마치던 날, 파트너는 떠나고 나는 뉴질랜드 땅에 남았다. 이민이라는 거대한 목표 아래 각자 맡은 역할이 있으니 참아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한국행 비행기가 출발하던 그 순간, 나는 모든 게 막막해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사람과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세상에 없는 기분이 든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는 매일 꼭 붙어있지도 않았고, 바쁠 땐 겨우 통화만 할 때도 많았다. 그때랑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도 참 달랐다. 헤어진 것도 죽은 것도 아닌데도 곁에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프거나 힘들어도 절대로 당장 달려와 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없는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
애인과 함께 뉴질랜드에 살기로 했다. 결정은 했지만 둘 다 외국에 살아본 적이 없어 그게 가능할지 짐작이 잘 안 됐다. 거처를 옮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신중하게 결정하고 싶었다. 우리가 하면 할 수 있을지, 거기서 과연 살 수 있을지 탐색해볼 단계가 필요했다. 그 첫 단계가 바로 나의 워킹 홀리데이였다....
한국에 살 때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스포츠를 좋아했더라면 ‘대한민국!’이라도 한번 외쳐봤을 텐데 그렇지도 않고, 내가 속한 국가는 여성이나 성소수자를 국민에서 자주 배제하는지라 애국심을 가질 일도 없었다. 놀랍게도 뉴질랜드에 오고 나서 파트너와 함께 ‘역시 우린 뼛속까지 코리안!’ 하는 날이 많아졌다. 비행기를 타고 열두 시간을 날아온 이곳에서 가장 그리운 건 한국 음식이다. 한국 식당도 있지만, 당연히 한국에서보다 두 세배의 가격을 내야 하고, 현지인의 입맛에 맞춘 건지 내 입엔 너무 달거나 짜다. 한국마트에서 장을 봐도 채소 같은 식자재의 종류가 조금씩 달라서 내가 찾던 고향의 그 맛은 아니다....
뉴질랜드는 이민자의 나라다. 원주민 마오리가 살던 땅에 유럽인이 이주해왔을 뿐 아니라, 여전히 해외에서 태어난 많은 사람이 뉴질랜드로 향한다. 작년 한 해 동안 뉴질랜드의 순 이민자 수는 약 5만 명이고, 뉴질랜드에서 매년 태어나는 아기의 숫자는 약 6만 명이다. 순 이민자 수와 출생자 수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이대로라면 여기서 태어난 사람과 여기로 이주한 사람의 수가 비슷해질 것이다. 순 이민자가 아니라 뉴질랜드에 이민해 들어온 사람의 수만 따지면 작년 기준으로 15만 명에 조금 못 미친다. 여기서 태어난 사람들은 외국으로 나가기도 할 테니 조만간 이민자가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 이민자의 수와 꼭 같지는 않겠지만, 뉴질랜드 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