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3일, 법무부가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폐지 공개 변론을 앞두고 제출한 변론요지서의 일부 내용이 CBS 노컷뉴스를 통해 보도됐다. “자의에 의한 성교는 응당 임신에 대한 미필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므로 이에 따른 임신을 가리켜 원하지 않는 임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피임의 기본적인 개념도 이해하지 못하는 놀라운 성 인지 수준이다.
보도 이후 비판이 커지자 법무부는 24일 설명자료를 발표했다. 하지만 해명이라고 내놓은 자료는 더욱 문제가 심각했다. “낙태 허용 시 낙태율 급증, 여성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 훼손, 생명 경시 풍조 확산 등 오히려 더 큰 사회적 병리 현상이 초래될 수 있다”라는 주장이 포함된 것이다.
낙태를 허용하면 낙태가 늘어난다고?
이런 주장은 낙태 금지론자들에게서 흔히 찾을 수 있다. 마치 여성들이 낙태를 꺼리는 이유는 오직 그것이 범법행위기 때문이고, 낙태죄가 폐지되는 순간 너도 나도 기꺼이 낙태를 반복할 거라고 믿는 듯한 논리다. 특히 낙태를 할 일도 임신을 할 일도 없는 사람, 즉 남자일수록 이런 주장을 쉽게 한다.
하지만 정작 낙태를 하는 여성의 몸과 마음이 겪는 구체적인 일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당연하다. 어떤 여성도 낙태 경험에 대해 드러내 놓고 말하도록 허락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임신은 여자와 남자의 행위 결과인데, 낙태는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여성의 범죄이자 수치로 여겨진다. 여성은 원치 않는 임신을 맞닥뜨렸을 때에서야, 갑자기 낙태가 무엇인지 온 몸으로 알게 된다.
익명의 힘을 빌어 낙태가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트위터 계정 슬프다(@sososososoos121)는 지난 2월25일 ‘#도와주세요’라는 해시태그로 시작하는 글을 올렸다. 전 남자친구가 갑자기 성관계 중 질내사정을 하고, 생리 전이니 괜찮다고 둘러대더니, 막상 생리가 안 나온다고 고민하자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연락을 끊었다는 내용이다. 임신중단약을 구입해야 할 것 같은데, 금전적 사정이 좋지 않아 도움을 구한다는 것이다.
‘슬프다’는 자책한다. 강간이 아니라 합의에 의한 섹스였기 때문에, 자신의 실수고 자신의 죄라고. “적극적으로 밀치고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라고, 그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익명의 사람들에게 거듭 사과한다.
도움의 손길이 조금씩 모였다. 2월27일, ‘슬프다’는 병원에 다녀왔다고 ‘보고’한다. 이후로 계정에 기록된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임신 중단으로 인한 몸의 변화와 대응책 위주로 간략히 줄였다. 산부인과에서 임신을 확인한 날부터 다시 생리를 시작한 날까지 41일간의 기록이다.
미프진을 먹은 뒤
2월27일, 병원에서 간호사 선생님과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호르몬 검사 결과 아이는 6주이고, 약으로 낙태할 수 있는 기간이라 안심이 된다. 좋으신 분들께서 많이 도와 주셔서 병원비도 잘 냈다. 그 중 누군가가 미프진을 택배로 보내주기로 했다.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응원과 격려를 보내줘서 지금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자신도 몸을 추스리면 꼭 같은 아픔, 불안, 초조함을 가진 여성분들을 위해 노력하겠다. 틈틈이 일기처럼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써 보겠다.
2월28일, 약이 도착했다. ‘슬프다’는 첫번째 약을 먹고 조금 잤다. 계속 어지럽고 골반이 아팠다. 한 끼도 안 먹고 자기만 하다가 김밥을 사러 나왔다.
3월1일, 생리처럼 피가 엄청 나와서 씻었다. 생리하는 것처럼 배가 아프고, 헛구역질과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두 번째 약을 30분 간 혀 아래에 두고 녹인 뒤 잔여물을 삼켰다. 많이 녹지 않아서 삼키는 게 힘들었다. 4시간 후 다시 마지막 약을 복용할 예정이다.
생리통과 비슷한 통증이 계속된다. 진통제가 듣는 듯하다가 안 듣는다. 누우면 피가 많이 나올까봐 엎드려만 있다. 식은땀이 나고 온 몸이 후들거린다. 너무 아프다.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5초 간격으로 3시간 째 반복된다. 마지막 약을 녹여 먹자 다시 고통이 찾아온다. 몸부림치며 참는다.
‘슬프다’는 같은 고통을 겪을 지 모르는 누군가에게 간곡하게 부탁한다. 어지럽고 힘이 없더라도 약 먹기 전날 꼭 밥을 많이 먹으라고. 막상 약을 먹고 나면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못 먹는다고. 보호자가 있다면 꼭 함께 있어야 한다고. 쪽지를 보내면 자신이라도 같이 있어주겠다고. 경험자라서 뭐가 필요한 지 안다고. 오버나이트 생리대와 기저귀, 이온음료, 물, 진통제, 철분제, 비타민을 옆에 챙겨 둬야 한다고.
3월2일, 배의 고통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꿈이었나 싶을 정도다. 그러나 머리맡에 뜯겨져 나간 머리카락들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두통과 어지럼증, 화끈거림이 남아있다.
3월3일, 어지럼증이 좀 나아져서 철분제와 비타민을 사러 간다. 4일 간 누워 살았더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3월4일, 새벽 5시쯤 극심한 복통으로 잠에서 깼다. 진통제를 두 알 먹고 다시 잠들었다.
3월5일, 진통제 안 먹어도 안 아프네! 했다가 호된 고통이 찾아왔다. 배, 허벅지, 골반이 미친듯이 쑤시고 아프다.
3월6일, 저녁을 먹고 한 시간 정도 천천히 걸었다. 체력 회복을 위해서다. 아직 골반과 팬티라인이 욱신거리고 쑤신다.
3월9일, 원래 이렇게까지 회복이 느린 걸까? 아직도 아래가 욱신거리고 마음껏 앉지 못한다. 평소에도 편의점 음식만 먹고 잘 챙겨 먹지 않아서 그런가.
3월11일, 진통제를 안 먹어도 될지 궁금해서 버텼더니, 자려고 눕자 배가 당기면서 쿡쿡 쑤신다. 일반 생리통과는 다른, 수술 후에 쑤시는 듯한 느낌이다. 진통제를 먹자 사라졌다. 화장실 가서 볼 일 보는 것도 굉장히 아프다. 장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아픔이다. 그래서 밥을 최대한 적게 먹는다.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 약을 먹은 뒤에는 아픔이 이 정도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다. 미프진 복용 후 11일 째, 생리대에는 피가 적게 묻고 휴지로 닦을 때에만 조금 묻어난다. 5일째까지는 피가 왕창 나왔는데 줄어드는 중이다.
3월12일, 산부인과에서 초음파검사를 했다. 질염이 있어서 치료하는 주사도 맞고, 수축된 자궁을 원래대로 돌려보내는 약을 받았다. 꽤나 아플 거라고 한다.
3월13일, 어제 저녁 먹고 진통제와 함께 약을 먹었다. 생리통, 허벅지 아림, 뜨거움이 합쳐진 정도의 아픔이다. 화장실을 못 가던 느낌이 나아졌다. 피가 멎었었는데 다시 생리하듯 나온다.
3월14일, 생리대에는 피가 잘 묻지 않는데, 휴지로 닦으면 마치 생리 이틀 째처럼 많이 나온다. 주사를 맞고 약을 먹은 뒤에는 피가 나올 때 느껴지던 신경을 자극할 정도로 심한 썩은 피 냄새들이 사라졌다. 미프진 먹고 난 뒤 피가 나오면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한 썩은 피 냄새가 진동했다. 그래서 아파도, 화끈거려도 아래를 꼭 씻었다. 지금은 냄새가 사라졌다. 미프진을 먹은 뒤 10일이 지나면 꼭 병원에 가서 질염 검사도 받고 주사도 맞아야 한다.
3월16일, 이제 진통제는 안 먹어도 괜찮다. 하지만 생식기 부분이 가끔 가다 욱신거린다. 다음 달에는 다시 일을 시작할 것이다. 어서 일을 시작해야 도움 주신 분들께 갚고 생활을 할 수 있다.
3월19일, 피는 슬슬 멎고 있다. 닦아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빈혈기가 심하다.
3월21일, 피가 다시 나온다. 3주간 나오거나 더 나올 수도 있다고 한다. 피가 나오니까 아랫배, 허벅지, 무릎이 엄청 쑤신다. 몸보다는 마음이 약하다. 자꾸 무서운 꿈을 꾸고, 괴로워진다. 꿈 속에서 여럿이 나를 탓하며 때린다. 회복이 된다면 정신과 상담도 받아보고 싶다.
3월22일, 피가 멎었다가 나왔다가 한다. 생리대를 계속 구비해 놔야 할 것 같다.
4월8일, 51일 만에 생리를 시작했다. 마음도 놓이고 기분도 좋다. 생리대 닿는 아래부분이 좀 화끈거린다. 앉아있기 힘들다. 하지만 이 정도면 4월 중반에는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후 ‘슬프다’ 계정은 이전처럼 자주 업데이트되지 않는다. 다시 생활이 시작됐다는 좋은 징조처럼. 가끔 근황을 올리고, 미프진·우먼온웹 정보계의 미프진 복용 관련 정보를 공유한다.
낙태를 말했다고 가해진 폭력들
‘슬프다’의 기록에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낙태를 이야기할 때 겪는 일이 모두 들어 있다. 익명 뒤에 숨어서 도움을 준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이버 불링이나 공격을 한 사람도 많았다. 성희롱이나 “엄마 아파”, “전남친에게 연락해 봐라” 같은 전형적인 공격은 말할 것도 없고, “나 같은 남자 만나면 행복할 거다”, “그 아이와 함께 너를 받아주겠다”, “나와 사귀어 달라”는 요구를 쪽지로 보내기도 했다. '슬프다’는 다른 전형적인 공격에 대해서 침묵했던 초반에도 제발 그런 말만은 보내지 말아 달라고 호소한다.
또 다른 ‘공격’은 ‘슬프다’의 발화 태도를 향했다. 미프진을 복용 한 이후 매일매일 일기처럼 자신의 증상과 변화를 기록하며 ‘슬프다’는 웃는 얼굴의 이모티콘을 자주 사용한다. 여러분, 모두 행복하세요. 꼭 행복하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맛있는 것 많이 드세요. 주로 이런 인사말과 함께.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지적’했다. 이모티콘을 쓰면 가벼워 보인다고. 몸도 무거운데 트윗이라도 가볍게 쓰면 왜 안 되나? 비극을 소비하고 싶으니 충분히 비극적인 자세로만 말해야 한다는 것일까? 이미 임신 중단을 위해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고, 그 과정을 기록해서 공유하기로 한 것만으로도 ‘슬프다’는 엄청난 용기를 냈다. 그런데 이를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는 사람이 원하는 우울하고 슬프고 ‘무거운’ 말투가 아니라고 불평했다니.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다.
그래서 ‘슬프다’는 또 사과를 한다. 그게 너무 슬프다.
임신 중단을 겪고, 이를 있는 그대로 말했다는 이유로 이런 공격을 당하면서도, ‘슬프다’는 기댈 곳이 인터넷밖에 없다고 말한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도, 더럽거나 수치스러운 내용도, 혹시나 같은 처지의 여성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슬프다’는 모두 적는다.
그리고 트위터를 하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라고 고백한다.
이제 같이 더 행복해져요
‘슬프다’는 끊임없이 감사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도 꼭 여성과 약자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한다. 여성과 약자가 행복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울었다. 여자라서 이만큼 고통받아야 하는 엉망진창인 세상 속에서도 원망과 좌절에 멈추지 않고 연대로 나아가는 ‘슬프다’의 모든 말이 너무 아름다웠다.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인류애를 잠시나마 되찾은 것 같아서 울었다. 도움 받은 만큼 도움 주고 싶다는 그 간절함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아서 울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슬프다’의 기록을 읽기 전까지 임신을 중단한 여성이 겪는 아픔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막연히 힘들고 아플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걸 구체적으로 모른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잘 모르면서도 이미 임신을 원하지 않는 만큼 임신 중단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낙태가 합법화 되면 모든 여성들이 더 많이, 더 자주 낙태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이 기록을 쭉 읽어야 한다. 도대체 어떤 누가 자발적으로, 또는 그들이 즐겨 하는 표현처럼 '함부로' 이런 고통에 스스로를 밀어 넣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자문해 보길 바란다. 단지 처벌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낙태가 늘어날 거라고? 자기 일 아니라고 막말하는 거 아니다.
‘슬프다’의 기록은 임신도 임신 중단도 여성이 겪어내야 하는, 여성의 일이고, 따라서 여성의 권리라는 가장 구체적이고 물적인 증언이다. 자연히 낙태죄 폐지 논쟁이 ‘추상적인’ 권리 경쟁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법무부와 남성 권력의 특권을 낱낱이 드러내기도 한다. 이걸 다 읽고도 원치 않은 임신을 중단한 ‘슬프다’는 생명권을 침해했으니 범죄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신체적인 고통을 견뎌내고, 정신적인 괴로움을 떨쳐내고, 스스로를 치료하고, 돌보고, 회복하려 애쓰고, 다시 일상을 되찾으려 힘을 내고,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자신도 도움이 되고자 최선을 다하는 살아있는 인간, 아름답고 존엄한 인간 ‘슬프다’의 인생보다, 착상한 지 6주 된 세포덩어리의 ‘권리’가 우선한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는가?
필자 주: 미프진·우먼온웹 정보계 트위터 계정(@mifegynewowinfo)은 미프진을 이용한 임신 중단에 대한 더 많은 경험담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우먼온웹(https://www.womenonweb.org/)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소재의 단체로, 임신 중단이 불가능한 국가에 사는 여성들을 돕는다. 미프진이 필요한 저소득 여성을 위한 기부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