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혐은 데스크가, 욕은 기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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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혐은 데스크가, 욕은 기자가

김평범

최근 한 회식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인기 있는 신붓감 1순위는 '예쁜 여교사'고, 2위는 '평범한 여교사'고, 3위는 '못생긴 여교사'라던데. 하하하.

흔하디 흔한 술자리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가 나온 게 언론사 고위 간부의 입이었다는 점이 문제다. 이 자리는 내가 재직 중인 언론사의 회식자리였다. 자리에는 또 다른 선, 후배 기자들이 여럿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마주 앉은 후배와 몰래 카톡을 주고받았다.

"기대도 안 했지만 저렇게까지 생각이 없을 줄은 몰랐어."

이 소리를 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대화 주제는 어느새 '메갈'과 '여성 혐오'로 번졌다. 방금 우수 신붓감 순위를 열거하셨던 그 분께서 "요즘 여성혐오가 그렇게 심각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방금 하셨던 그 말씀도 여성혐오에요." 라고 한 여자 선배가 지적했지만 그는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듯 보였고, 어색한 술잔만 오가다 회식 자리는 파했다.

‘젠더 의식’, ‘여성혐오 문제’에
무심한 데스크들

최근 사회 전반에서 '여성혐오'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면서 기존의 잘못된 의식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이런 의식 개선이 잘 이뤄지지 않는 조직이 바로 언론사다.

문제 지적의 범위를 언론사 데스크로 좁혀보고자 한다. '데스크'란 언론사의 차장급 혹은 부장 이상의 연륜 있는 기자들로, 언론사의 게이트키퍼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기사를 작성하는 과정과 그 기사가 세상에 나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데스크의 젠더 감수성 부재가 '쓰레기 기사'를 양산하는 데에 얼마나 막대한 공을 세우는지 알 수 있다.

첫째, 기사 작성 단계다. 대부분의 기자들이 기사를 쓰자고 생각하는 시점은 크게 두 가지다. 스스로 취재를 한 기사를 쓰려고 마음먹는 경우와 데스크의 지시로 기사를 쓰게 되는 경우다. 후자의 경우를 살펴보자.

데스크, 혹은 '사장/국장의 지시를 받은 데스크', '데스크의 지시를 받은 선배'로부터 취재 지시 전화가 온다.

"어, A라는게 요즘 있다는데 한번 좀 알아봐."

이런 지시는 주로 특정 '야마(주제)'를 미리 정해서 내려오는데, 대체로 이런 식이다.

"어, 요즘 출산율이 낮아졌다는데 왜 그런지 알아봐."
"어, 요즘 화장실에서 일어나는 성범죄가 많다는데 화장실 페티시와 연관해서 쓸 수 있는지 알아봐."

출산율이 낮은 게 문제인가? 기본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해야 한다는 인식부터가 문제고 폭력적인 시선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지 않나? 화장실 페티시 때문에 범죄가 일어난다고? 그럼 공중 화장실을 다 없애면 범죄가 해결될까? 모두 웃기는 접근법이다. 하지만 젠더 감수성이 결여된 데스크의 경우 자신이 내린 지시의 문제점을 깨닫지 못한다.

둘째, 기사 표출 단계다. 기사는 기자가 쓴 대로 나가는 법이 없다. 데스크의 데스킹을 거쳐 나간다.

데스크가 악의를 갖고 여성을 비하하기 위해 기사 제목이나 기사 내용을 고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아무 생각 없이 고친 기사 제목이나 기사 내용이 여성을 비하하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문제다. 

사패산 살인사건 보도 기사들

그럴 경우 기사 제목을 좀 줄여보겠다고 무의미하게 'XX녀' 같은 것이 제목에 달리기도 하고, 기사가 원래 썼던 의도와 다르게 읽혀 버리기도 한다. ‘사패산 50대女’등의 기사가 그렇다. 기자의 생각과 무관한 자극적인 그래픽이 데스크의 지시로 만들어져 따라나가는 경우도 있다.

‘기레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모든 기자가 100% 젠더감수성을 탑재하고 기사를 쓴다거나, 기사가 쓰레기 같은 것이 데스크의 탓이라며 도망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언론사에서 이런 일은 은근히 비일비재하며, 데스크가 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이야기다.

주니어 기자들이 부당하다고 느껴도 데스크들에게 도전할 마음을 먹지 못하게 만드는 언론사의 조직 분위기도 이런 악순환에 한 몫 한다.

수습기자 6개월 동안 선배들에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경찰서에서 새벽에 깨고 새벽에 자는 일을 반복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은 단언컨대 '말 잘 듣는 기자'다. 한 언론사의 경우 이 기간 동안 회식자리에서 선배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혼낼 정도로 철저히 교육시킨다고 한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바로 윗선배에게도 찍소리 못하는 억압적인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런 상황에 데스크에게 '지시가 부당하다'거나 '데스킹이 잘못됐다'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데스크들이 스스로 "내 권위에 도전하려 들지 말라"며 기자를 찍어 누르는 경우도 여럿 목격했고, 나도 직접 당하기도 했다.

'데스크 바이라인' 붙이면 어떨까

기자들이 쓰는 기사에 꼭 따라붙는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이다. 기자의 이름과 이메일 주소가 기사에 함께 따라붙는 것을 ‘바이라인’이라고 하는데 난도질을 거쳐 나가는 기사에 달랑 기자 본인 이름만 달리는 것에 부끄러움과 창피함, 분노를 호소하는 동료 기자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나의 경우 특히 사건사고 기사를 쓸 때 스스로의 원칙이 있다.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기사에 쓰지 않고, 잔인한 수법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지 않고, 범행이 발생한 지명이나 장소가 독자가 특별히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기사에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쓴 기사가 아무 생각 없는 데스킹을 거쳐 ‘여혐’ 기사로 둔갑해 표출될 때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고쳐달라고 쉬이 말하기도 어렵다.

이름 석 자를 운운하며 '기레기'라고 까이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건만 이제 무슨 호라도 된 듯 '여혐'까지 따라붙기 시작하니, "여혐은 데스크가 했는데 욕은 내가 먹었다"는 한 동료 기자의 볼멘소리가 남 일 같지가 않다.

'바이라인'은 누구의 지시로 쓰인 기사인지, 제목은 누가 고쳤으며 기사는 누가 손봤는지 등을 말해주지 않는다. 만일 바이라인에 교열한 사람이 누구인지 따라나가게 되면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던 데스크들도 조금은 신경 써서 기사를 보게 되지 않을까.

또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성평등 보도 준칙을 마련하고 데스크와 기자들에게 철저히 교육하는 것이다.

7월 1일 여성모임 ‘불꽃페미액션’은 기자회견을 열고 언론의 성차별적인 보도방식 개선을 요구하며 언론중재위원회에 성 평등 관련 시정권고 심의기준을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사건과 무관한 가해자와 관련된 긍정적인 정보를 나열하는 방식은 뉴스 소비자들이 무비판적으로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하는 효과를 낳을수 있다”며 “피해자의 이름과 성별을 따서 이름을 정하는 방식, 가해자 생애애 대한 감성적 보도 등을 비판한다”고 밝혔다.

이같은 보도기준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기자협회는 일부 특정 보도에 대해 준칙과 권고 기준, 윤리강령 등을 마련해두고 있다. 이 중 눈에 띄는 것이 '성폭력 사건보도 가이드라인', '인권보도준칙',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 등이다.

한국기자협회의 인권보도준칙

인권보도준칙 제4장 ‘성 평등’ 항목에는 ‘언론은 성별과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성차별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언론은 사람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거나 성을 상품화하는 보도를 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이는 늘 잊지 말고 명심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자든 데스크든 이를 교육 받을 기회는 많지 않다.

방송사와 신문사, 통신사 등 주요 언론매체에 재직 중인 친분 있는 기자들에게 이같은 권고나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한 방송사 기자가 “‘인권보도준칙’은 회사로부터 받았다”고 답한 것 외에 대부분은 “모른다”고 답했다.

다만 가이드라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자가 모르고 데스크는 지킬 의지가 없다면 관행처럼 굳어진 성 차별적 보도 행태가 나아질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앞으로도 무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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