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S
(이후로 점은 빼고 쓰겠다.)
이 알파벳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요정이자 여신이자 당당한 세 여성이었던 그룹이 떠오른다면 당신도 나와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을지 모른다.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다. SES가 2014년 MBC 무한도전 '토토가' 무대에서 팬들을 찾았던 데 이어, 데뷔 20년을 맞아 완전체로 팬들을 다시 찾는다는 소식을 최근 전했다. SES의 모습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팬중의 하나인 나에게는 몹시 기대되고 설레는 소식이다.
내가 이들의 매력에 빠지게 된 것은, 그러니까,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요즘말로 '덕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서정적인 노래 가사와 예쁜 외모, 그리고 트렌디한 걸스힙합 리듬을 타는 제법 파워풀한 춤사위에 나는 금세 SES를 동경하게 됐다. 이후 한 살 어린 여동생까지 꼬드겨 이들의 팬으로 만들었다. 내 동생은 가녀린 몸매와 전형적인 예쁜 얼굴을 지닌 유진을 특히 좋아했고, 나는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소탈한 매력이 특징인 바다를 좋아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나의 팬질은 비루하기 그지 없었다. 초등학생이 연예인을 좋아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SNS나 온라인을 통한 정보수집 같은 것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어떤 지경이었느냐면, 연예인의 소속사에서 정식으로 나오는 '음반'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라서 동네 좌판에서 파는 불법 복제 카세트테이프가 내가 처음 산 이들의 앨범이었을 정도다.
어릴 때는 시골에 살았던 데다가 아버지도 엄해서 덕질의 모든 통로는 막혔다. 팬클럽 '친구' 가입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고, 고작해야 그룹의 상징색인 보라색 볼펜을 사모으거나, 청소년 잡지에 나오는 멤버들의 사진을 오려모으는 일 정도였다. 지금처럼 VOD 다시보기도 제대로 없던 시절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들이 출연하는 방송 일정을 미리 확인했다가 TV에 나오는 모습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제법 바쁜 활동을 했었는데, 이들의 활동 소식이 간간히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읽는 스포츠신문에 오를 때면 일일이 가위로 잘라 스크랩북을 만들기도 했다.
SES의 노래를 어디서든 듣고 싶은 마음에 '마이마이'(워크맨)을 사달라고 엄마를 조르고 졸라 초등학교 3학년때 드디어 기계를 손에 넣었다. 그 후 다시 용돈을 모아 CD플레이어를 살 때까지 카세트테이프는 하도 많이 들어서 늘어졌고, 집에 있던 오디오로 공테이프에 옮겨 녹음한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유진의 단발머리가 예뻐서 따라 잘라봤다가 '절대 저런 머리가 될 수 없구나' 라고 깨달았던 것은 혼자만의 흑역사다.
내가 이들에게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빠진 것은 왜였을까. 이들은 분명 '소녀', '여자친구'같은 현재 걸그룹으로 이어지는 흔한 이미지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SES는 이를 넘어 팬들에게 좋은 '친구'나 '멘토'가 되어주려는 흔치 않은 걸그룹이었다.
한 멤버가 집 앞에 찾아온 사생 팬에게 정성스럽게 쓴 손편지를 주면서 건강 등을 염려해주었다는 이야기, 아이돌로 살면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에서 전해져 오는 멤버들의 마음가짐 등을 떠올려 보면, 이들은 팬클럽 이름 '친구'처럼 이들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친구로 먼저 다가가고자 했던 그룹이었다.
SES는 우악스러운 억지 청순이나 무조건 벗고 보자는 섹시 컨셉을 강조하지 않았다. 대신 각 멤버들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럽고 건강한 모습이 내 맘을 사로잡았다. 한결같이 예쁜 인형같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여성에 대한 왜곡된, 또 획일화된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SES 멤버들이 함께 하는 모습이 마냥 지속되기를 바랐지만, 이들은 각자 자신의 길로 자연스럽게 나아갔다. 그것은 내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이들의 해체 이후의 활동에 대해 팬으로서 '갈라섰다'는 말을 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따로 또 같이 계속해서 서로를 응원하고, 함께하는 '친구'의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 주며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있었기에 나는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을 잃은 슬픔 대신 인생에 본받을 수 있는 언니 셋을 얻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내가 정작 SES의 노래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이미 SES가 해체한 지 오래인 지난해 여름의 일이었다. 직장인이 되고도 몇 년이 지나서야 조금이나마 주말에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됐고, 나는 바다의 단독 콘서트가 열린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티켓팅에 성공해 콘서트로 향했다.
바다는 이 콘서트에서 자신이 소녀로서 가수의 꿈을 꾼 시절, SES의 멤버가 된 이야기, 이후 홀로서기에 성공하기까지의 이야기를 한 편의 연극처럼 풀어나갔다. 바다의 목소리로나마 SES의 명곡도 이 자리에서 듣게 됐다.
콘서트에서 새삼 뭉클함을 느낀 것은 바다는 성공한 뮤지션으로, 유진과 슈는 각자가 꾸린 행복한 가정으로, 자신이 선택한 삶을 잘 지켜내고 키워나가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지금의 나와 SES 멤버들이 하는 일은 다르지만 어찌보면 이들은 여성인 내가 성장해나갈 길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SES는 시간이 흐르고 성장해가면서 초기 활동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덧씌워진 '요정'의 이미지를 스스로 벗어던지고, 점차 성장하는 '여성'의 모습을 여러 측면에서 보여주었다.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SES 덕분에 나 역시 그들과 같은 멋진 여성으로 성장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 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SES 재결성을 기념해 지극히 주관적으로 뽑은 노래 베스트 5
1. Shy Boy
-전체적으로 신비로운 요정 콘셉트로 발매되었던 2집 수록곡.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오히려 지금 듣기에도 몹시 세련된 곡이다. 정식 활동은 없었지만 멤버들의 활동 모습을 편집한 뮤직비디오가 있는데, 건강하고도 밝은 SES의 모습이 그대로 녹아 있어 이들의 풋풋한 시절을 되새김질하기에도 좋다.
2. 친구
-1집 수록곡. 대표적인 팬송. "세월이 지나 먼훗날에 내가 그리워 생각이 날 때 그땐 가끔씩 나를 기억해줘" 라는 가사가 어릴 땐 '이게 무슨 잔망스러운 가사지' 싶었는데, 지금 들으면 SES에 관한 모든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와 눈물을 흘리게 되는 노래다. 이 노래 듣고 나서 5집에 '친구-두 번째 이야기' 듣고 나면 그야말로 그리움에 폭풍눈물.
3. Choose My Life
-5집 수록곡. '내 삶의 주인공은 나이고 가장 필요한 것은 소중한 나 자신'이라는 아주 멋진 가사말이 인상적인 노래. 하루를 상큼하게 열기에 적절한 셀프 응원가.
4. JOY
-4집 수록곡. "맨발로 당을 딛고 날아온 것처럼 두 팔을 벌려봐요.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대 품에 있어 전부 가진 걸요." 우리가 살아가는 가치가 '행복'이라면 그것은 사실 우리에게 있다는 희망적인 가사와 미디움 템포의 멜로디가 편안하게 듣기 좋은 노래.
5. Twilight Zone
-본격적인 '뮤지션'으로서의 서막을 연 3집 앨범의 후속 활동곡. 이미 대중에 너무 알려진 노래들은 뽑고 싶지 않았지만 이 노래는 그럼에도 포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 자체의 세련됨은 물론이고 각 멤버들의 스타일 역시 놀랄만한 수준이었는데, 특히 세미 정장 스타일의 시크한 패션이 여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요즘 말하는 '멋쁨'(멋있고 예쁨)의 원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