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교부터 독서실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다 말할 수 있어요
고전시가 읽으며 ‘여성적 어조’와 ‘남성적 어조’ 나누기, 같은 반 여자애들 얼굴 가슴 다리 순위 매겨 줄 세우기, 여대는 남자가 없어 재미없다는 조언하기, 십 년 전에 나도 속했던 풍경이다.
한데, 남자애들끼리 혹은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보이루’일부 남성들 사이에서 ‘보지 하이루’라는 뜻으로 쓰이는 여성혐오적 인사말 인사하는 것, 페미니즘 도서를 읽은 걸 생활기록부에 적지 못하는 것, 화장을 안하고 등교하면 선생님으로부터 왜 민낯으로 왔냐고 핀잔을 듣고 마스크를 쓰게 된다는 것은 처음 들은 이야기다. 일 년에 두어 번 진행되는 면피용 성평등 교육으로는 누구의 의식도 개선할 수 없었던 거야.
그러나 악조건 속에서도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이들이 있으니 더 이상 학교는 ‘잔잔함’을 유지하기 힘들게 됐다. 학교 안의 십대 페미니스트들. 우리는 그들을 만났다. 바깥과 단절된 채 아무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학교에서, 이들이 ‘다수’에게 먹혀들지 않고 매일 조금씩 빛을 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 대전의 여자 고등학교 한 곳, 공학 두 곳의 학생들을 만났으며 고등학교 이름은 편집팀이 임의로 정했다. ☞ 최高, 동高, 면高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
학교는 바깥이랑 교류가 안 되니까... 이 안에서만 틀린 말들이 돌고 도는 것 같아요. 답답해요.
대전 페미니스트 모임을 만들었어요. 모임에서 만난 분이 시위 가신다고 해서, 제가 시위 팻말을 대신 만들어드렸거든요. 근데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얼굴도 못 본 사이에서 페미니즘 하나만으로 연대하고 사람들을 알아가고 세계를 넓혀가는 게 너무 신기하고 좋았어요.
저 혼자였으면 아무것도 못 했을텐데 저희 학년에만 페미니스트 7명 정도 있어요. 그래서 확실히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아요.
“학교를 졸업하면 나는”
저는 외과 의사가 되고 싶어요. 남의사가 불법촬영이나 각종 성범죄 저지르는 걸 너무 많이 봐왔잖아요. 의대에 들어가서도 과탑을 하고 싶어요.
저는 경찰공무원이 되고 싶어요. 현실에서 경찰이라고 하면 남자경찰을 먼저 떠올리는 게 있잖아요. 그 생각을 없애고 싶어서 경찰이 되고 싶어요.
저는 장래희망보다는 친구들이 페미니즘을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권력이 여자에게 많이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다 정반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어요.
“학교를 졸업하면 나는”
수능 끝나고 아무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을 때, 생기부에 뭔가 할 수 없을 때, 학교에 포스트잇 붙여서 사회 나가기 전에 친구들한테 뭔가 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선생님이 되면, 학생들 머리가 굳어지기 전에 빨리 일깨워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는 언론 쪽 일을 하고 싶어요. 지금 있는 신문사들이 너무 보수적이라고 생각해요. 신문이나 잡지 쪽에서 일하면 좋을 것 같아요.
세 학교는 분명 다른 학교인데, 여섯 명의 학생들에게 같은 말을 들었다. 생활기록부에 적힐까 봐 조심하게 된다는 것. 학생들 사이의 여론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 학교 안 페미니스트들이 겪는 이중고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주변 친구들을, 환경을, 자신을 바꿔내고 있었다. 동高 인터뷰가 끝나고 우리가 말했다.
저희는 이동해서 면高 학생들을 만나요. 얼굴도 모르는 친구들이긴 하지만, 학교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을텐데 그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있어요?
친구들은 “아-” 하고 잠깐 멈칫하다가 천천히 그러나 힘있게 말했다.
동高 학생들이 면高 학생들에게
같은 여고인 분들은 지금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을 전파해줬으면 좋겠고, 공학분들은 진짜 힘내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전교 1등이 꼭 여자였으면 좋겠어요!
각자의 자리에서 탑이 되어서 나중에 이 세상을 바꾸어가는 과정에 함께 하고 싶어요. 그렇게 바뀐 세상에서 같이 살고 싶어요.
동高 학생들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너무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 도중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원래 친하고 정서적으로 도움이 되던 사람들을 못 만나게 되니까 힘들었어요. 그랬는데 누군가 옆에 있다는 걸 일깨워줘서 너무 고마운 것 같아요.
사실 동高 친구들이 교내에서 포스트잇 운동했다는 말 들었거든요. 그거 듣고 너무 멋있어서 저도 하려고 마음먹었어요. 기회가 되면 만나보고 싶어요.
인터뷰 BOSHU 권사랑 서한나
사진 최高, 면高 학생들이 직접
정리 BOSHU 김다영
디자인 BOSHU 신선아
디지털 편집 PINCH 신한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