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밀착형 SF
언젠가 모 잡지의 편집장님이 “인스타는 하이틴이나 20대들이 많이 쓰는 것 같고, 페이스북은 직장인들이 많이 쓰는 것 같은데, 작가들은 어떤 SNS를 많이 쓸까?”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트위터”라고. 의외로 다른 SNS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 트위터에서는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은 장르를 불문하고 꽤 많은 듯 보인다.
그렇다면 트위터에서 가장 유명하고 화제가 되는 한국 SF 작가는 누구일까? 많은 작가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작가는 역시 곽재식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생산력으로 환상문학웹진 거울에 매달 단편을 쉬지 않고 올리고 있으며, 그와 별개로 단행본이나 장편을 계속 발표하거나, 과학동아에 단편을 싣기도 한다. 오죽하면 트위터에서 작가의 집필 속도를 가리키는 농담으로 '곽재식 속도' 같은 말이 다 나왔을까.
집필 속도 외에, 곽재식 작가가 발표하는 단편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역시 '생활밀착형 SF'라는 점이 있다. 대표적으로 그의 소설 속에는 공무원 때문에 고통받는 연구원들이 종종 나온다. 이런 부분은 무척 희극적으로, 그러나 작중의 연구원과 소설 밖 독자들의 혈압을 함께 끌어올리며 표현된다. 이 나라에서 발표된 SF 중 연구원이 고통받는 분야에 있어 곽재식 작가는 거의 하나의 서브 장르를 이루었으며, '존잘님'이라고 불릴 만 하다.
그렇다면 여성 작가 중에서 생활 밀착형 SF를 주로 발표한 사람은 누가 있을까. 얼마 전 책꽂이를 눈으로 훑다가, 작고 귀여운 책에서 그 답을 찾았다. 에픽로그에서 발표된, 지금은 절판된 <김순옥 여행기>의 박해원 작가가 그에 해당할 성 싶었다.
우리에게 그 다음은 올까
박해원 작가는 만화 동인 출신으로, 평론이나 만화 창작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져 왔다. 동인지 등을 꾸준히 발표하던 그는 2006년, 만화언론 <만>에 웹툰 <거대한 문화유산>을 발표했다. 이 만화에서 그는 아슬아슬한 세계와 그 균형을 위해 분투하는 소녀 총재님 사이의 갈등을 다룸으로써, 체제와 개인이 충돌할 때 사람들이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거나 봉합하려 하는지에 대해 우화적으로 다루었다. 이후 한참동안 활동이 뜸했던 그는, 2013년 <김순옥 여행기>로 <큐빅노트> 공모전에 입선하며 SF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후 <신기한 과학 도구> 앤솔로지에 발표한 단편 <핸들을 돌려라>와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슬픔을 다룬 <헬렌의 일기장>을 함께 묶은 것이 이 단편집, <김순옥 여행기>다.
<김순옥 여행기>는 사후세계를 여행하고 지도를 만드는 노인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탐사자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다시 귀환시킨다. 저 세상을 탐사하러 간 노인들이 보내는 그 세계의 데이터를 기록하고 별자리를 연구한다. 그 동화 과정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김순옥은 그런 연구에 합류하고, 이제 첫 번째 여행을 떠나려 한다. 이야기는, 아마도 길고 긴 이야기의 시작일 수도 있는 딱 그 대목에서 끝이 난다. 아쉽지만 산뜻한 결말이다.
<핸들을 돌려라>는 모두가 자율주행을 이용하여 교통사고가 거의 나지 않는 시대, 8년 간 특정 지역에서 네 번의 같은 형태의 교통사고가 발생한 것을 빅데이터를 이용하여 수사하는 교통 경찰들이 나온다. 이들은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예전에 발생했던 교통사고의 기록이 자율주행 서비스들 사이에 유령처럼 떠도는 것을 잡아내고 대책을 마련한다. <헬렌의 일기장>은 사고로 죽은 부장이 숨겨놓았을지도 모르는 비밀 개발일지를 찾아 게임 속 NPC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상대를 그저 NPC가 아니라 친구로서 대했을 때에야 비로소 풀릴 수 있었던 비밀을 통해 NPC와 게임 플레이어의 관계맺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적인 SF
세 편 모두, 지금보다 아주 조금 뒤의 미래, 지금의 기술 용어들이 거의 그대로 쓰이고 있는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들이 움직이고 생각하며 활동한다. 지금은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들이 나오는 SF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SF라는 장르 안에서 아직 한국은 보편적인 배경이 아니고 한국인은 세계시민적인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엔지니어나 연구원들이 지금의 기술을 사용해 이야기를 나누는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주목할 만 하다. 불과 세 편의 SF 소설을 발표한 박해원 작가에게서, 곽재식 작가의 작품들을 떠올리며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한편으로 이 <김순옥 여행기>를 읽고 그 다음 작품들을 기다리며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 이 사회에서, 결혼하고 직장에 다니며 아이를 기르는 여성 작가가 극복해야 할 일들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와 박해원 작가는 비슷한 또래로, 학교에 다닐 때에는 같은 커뮤니티에서 활동한 적이 있으며, 비슷한 시기에 취업을 하고, 또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했다.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응원하는 동시에, 직장을 다니며 아이를 낳고 육아를 계속하며 작품활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다. 만약 상대적으로 결혼이나 출산이나 육아에 대한 부담이 적었다면, 그것이 성별의 문제든 시스템의 문제든 지금보다는 나은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지금쯤 더 뛰어났을, 그녀의 두 번째 단편집을 손에 들고 있지 않았을까.
이 리뷰가 핀치에 실릴 무렵에는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할 예정인 나 역시 다시 한 번 같은 고민에 빠져 있다. '나'는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들은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시스템 속에서 우리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고민 없이, 작가의 차기작을, 단편집의 재출간을, 그리고 나 자신의 생존까지 모두 안심하고 기원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