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솔로지라는 것은 한국 SF 작가들의 단편을 만나기 위한 가장 보편적인 형태 중 하나다. SF를 출간하는 출판사 자체도 적고, 독자의 수도 많지 않다보니, 손에 꼽을 만한 어지간한 인기 작가가 아닌 이상 장편을 출간할 기회가 많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작가들은 적은 지면이나마 확보할 수 있는 단편을 많이 집필해 왔다. 그리고 그런 단편들은 특정 작가의 작품들을 모은 ‘단편집’보다는, 어떤 주제 아래 한데 묶여 ‘앤솔로지’ 형태로 출판되곤 했다.
물론 작가야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단편집을 내고 싶은 욕심이 크겠지만, 앤솔로지 형태만의 장점이 있다. 독자에게 '이렇게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아 놓았으면 한 명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특정 작가의 작품을 읽고 싶어 구입했다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자연스럽게 접할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마치 예전 잡지만화의 독자들이 처음에는 한 두 작가의 작품에 이끌려 잡지를 구입하다가, 자연스럽게 한 잡지에 실린 신인 작가의 작품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 것처럼.
그런 점에서 올해 초 '온우주'에서 간행된 <여성작가 SF 단편모음집>은 조금 특이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이 책은 여러 작가의 단편들을 한데 묶은 앤솔로지이지만, 특정한 주제를 두고 묶인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주제나 내용에 상관없이, 그저 작가가 여성인 것을 기준으로 삼아 열 편의 작품을 모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바로 지금, 한국에서 여성으로 SF를 쓰는 작가들이 지향하는 어떤 경향성을 보여주는 한 샘플로도 생각할 수 있겠다.
지금, 한국, 여성 SF 작가들의 세계
심완선 칼럼니스트는 이 책의 작품들을 “언어, 죽음, 해방”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핀치 독자들에게 먼저 소개하고 싶은 작품들은 이 기준보다는 조금 다른 분류를 적용하고 싶다. 권민정의 <치킨과 맥주>, 김지현의 <로드킬>과 박소현의 <기사증후군>이 그에 해당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여성혐오 범죄, 차별과 억압에 대한 담론은 계속 이어져왔다. #여자라서_죽었다는 말처럼 강력하게 우리의 폐부를 찌르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아직도 2등시민 취급을 받고 있음을 통렬하게 보여준 말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SNS에서 #XXX계_성폭력 해시태그를 통해 다양한 분야, 학교, 직장에서 벌어지는 성폭력들이 조금씩 물 위로 드러났고, 전세계적으로 #MeToo 태그와 함께 성폭력에 대한 폭로들이 이어지며, 다양한 분야의 창작물에서 여성 억압과 여성에 대한 폭력을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위에 언급한 세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
기가 죽어서 정말 죽었어?
권민정의 <치킨과 맥주>는 어떤 면에서 게임 같기도 한 소설이다. 30분 정도의 독립영화로 보고 싶은 이야기다. 간간치킨의 간장치킨을 사러 가기 위한 우영의 여정 속에 우리가 사회에서 겪는 수많은 위협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그 여정은 수많은 남자들의 추근거림과 폭력, 여기에 여성전용 대출의 광고판까지 포함한 지긋지긋한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게임에 가깝다.
김지현의 <로드킬>은 교통사고 피해 여성에 대해 '보라니'라 조롱하는 남초 사이트의 유행어에서 착안한 작품으로, 여성 숭배라는 이름의 여성혐오와, 여기에서의 탈출을 보여준다. 자궁을 버리고 유전자를 변형하여 힘과 편안함을 얻은 여성이 아닌, '자연친화적'인 유전자를 물려받은 소녀들은 1급 보호대상 소수인종, 희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진다. 정부는 이들을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에 기여한다”는 명목으로 보호소에 가두어 기르고, 이들이 성장하면 이들과 결혼하기를 희망하는 남자들의 선택을 받게 한다. 만약 이들이 딸을 낳으면 그 딸 역시 보호소로 보내진다.
이곳의 소녀들은 숭배의 대상인 동시에 2등시민이고, 남자의 선택을 받아 결혼해 나가지만 바깥에서 어떤 비극적인 일을 당하게 될 지 알 수 없는 자원들이다. 시윤은 이곳에서 탈출하려다가 보호소 뒤에 있는 고속도로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주인공은 결혼 상대자가 정해진 여름의 손을 이끌고, 시윤이 목숨을 잃은 그 고속도로 쪽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그리고 찻길을 건너는 고라니 일가를 따라 조심스럽게 그 길을 건너간다.
박소현의 <기사 증후군>은 이와 같은 경향성을 좀 더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갑자기 남자들이 죽어간다. 남자들이 갑자기 유행병처럼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그 원인이 '여자에게 기가 죽었기 때문'으로 밝혀지며 벌어지는 일들이다. 여자들은 격리시설로 끌려가 진한 화장을 하지 말라고, 하이힐을 신지 말라고, 소위 조신해지라는 억압을 받는 '사회화 교육'을 받는다. 심지어는 겨우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여자아이까지도.
억압과 폭력, 그리고 살아 남으려는 의지
의무교육과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우리는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거나 '문학은 인간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현실을 새로 구성하는 과정'이라는 말을 들어 왔다. 바로 지금, 2017년에서 2018년에 걸쳐 한국에서 살아가는 열 명의 작가들이 쓴 단편 중 세 작품에서 이와 같은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배워 온 저 명제들에 충실히 부합한다. 여성 작가들이 쓴 단편 속에서 우리는 억압과 폭력을,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아남으려는, 존엄성을 찾으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관점에서도 좋은 작품들이 많다. 특히 전삼혜 작가의 <궤도의 끝에서>는 전작인 <창세기>, 그리고 작가가 최근 쓰기 시작했다는 <팽창하지 않는 우주를 원해>와 연결되는 소위 제네시스 연작의 일부이다. 달의 토지 소유권을 사들인 제네시스라는 회사와, 이들이 달의 지표면을 거대한 광고판으로 활용하는 '문라이터'라는 기술이 나오는 이 세계관은, 건조하고 절박하며 서글프게 로맨틱하다. 언젠가 한 책에서 죽 이어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창세기>가 실려 있는 단편집 <소년소녀 진화론>도 추천한다.
필자는 작가도 영업을 잘 해야 살아남는다고 생각하는 뻔뻔한 사람이니까 여기에 한 문단만 더 보태겠다. 이 <여성작가 SF 단편모음집>에는 필자도 <바이센테니얼 비블리오필>이라는 단편으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