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은 SF 읽기 5. <저주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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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은 SF 읽기 5. <저주토끼>

해망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SF(Science Fiction)는 남성이 쓰고, 읽고, 향유하는 남성의 장르일까? 아니다! 여성이 쓰고, 여성이 읽고, 여성이 향유한다. 어떤 작가의 어떤 이야기를 오늘은 읽어 볼까, 외롭게 덕질하던 SF 팬들에게 좋은 SF를 골라 추천한다.

 


여성, 혹은 고독한 약자들이 겪는 현실과 환상특급

80년대 말, TV 외화시리즈 중에 <환상특급>이라는 것이 있었다. SF 작가이기도 한 로드 설링이 제작한 이 TV 시리즈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먼저 매 화 새로운 배경과 인물들이 나오는 옴니버스 형태다. 어느 도시, 어느 시골 마을, 특출나거나 빼어나지 않은 보통 사람들, 흔히 있을 법한 현실을 배경으로 셋팅해 놓은 뒤, 주인공의 앞에 뜻밖의 사건, 혹은 행운이나 불운이 전개된다. 그리고 반전 끝에 기분이 찜찜해지거나 묘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결말로 연결된다. 여기에 웬 남자가 나와서 음울한 얼굴을 하고 이야기를 소개하는 장면까지 더해지면 거의 <환상특급>이라는 이름의 장르라고 불러야 할 만한 전형적인 형태가 된다.

이런 형태의 드라마 시리즈는 <환상특급>뿐 아니라 여러 매체에서 비슷한 형태로 다시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믿거나 말거나>라든가 <어메이징 스토리>라든가, 최근작으로는 <블랙미러> 같은 것들 말이다. 국내에서도 약 20년 전, <환상여행>같은 시리즈가 이 형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MBC <환상여행>에 대해서는 곽재식 작가 블로그에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정보라의 <저주토끼>는, 바로 이 <환상특급>을 연상시키는 열 편의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 단편선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여성, 혹은 고독한 약자들을 주인공으로 한다. 조금은 권선징악적인 복수들을 수행하고, 성공하지만, 결말은 여전히 쓰디 쓰고 외로운 이야기들이다.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애초에 <환상특급>을 처음 만들었던 로드 설링 본인도 인종 문제와 같은 사회적인 문제들을 다루면서 검열을 피하기 위해 SF나 판타지의 형식을 사용했으니까. 그런데다 이 <환상특급> 시리즈는 로드 설링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아서 클라크, 조지 R. R. 마틴과 같은 작가들이 이 시리즈의 각본에 참여하기도 했고, 스티븐 킹에게도 영감을 주었던 시리즈니까. 

불의한 일을 겪은 약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 이야기들이, 내용면에서도 표현의 형식면에서도 이 시리즈에서 전래된 어떤 양식을 갖추고 있는 것은 결코 놀랍지 않다. 출판사에서는 이 소설집을 두고 “어여쁜 저주와 복수”, “불의가 만연한 지금 같은 시대에 부당한 일을 당한 약한 사람들을 위해 복수하는 이야기”라고 말했다지만, 그보다는 “그 복수가 끝난 뒤에도 변하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약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어머니

이 소설집에 실린 열 편의 단편 중 최소 세 편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머리>와 <몸하다>, <즐거운 나의 집>은 여성의 임신과 출산, 혹은 아이와의 관계맺기에 대한 은유와 공포가 담긴 이야기다.

<머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변기 안에 나타난 머리통이 자신을 어머니라 부르며 시작되어, 결국 그 머리통에게 잡아먹히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어머니일 수도, 머리통일 수도 있는 이야기다. 자신의 찌꺼기만이 모여서 만들어진 원치 않았던 아이, 혹은 가족 차원에서도 찌꺼끼에 해당하는 것들만들 받고 자랐을 원치 않은 딸로 생각하면 어머니의 관점에서는 더 찜찜하고 현실적인 호러가 된다. 머리통의 관점에서는 더 서글픈 이야기가 된다.

<몸하다>는 생리불순이 심해서 피임약을 의사가 처방한 것보다 몇 달 더 먹은 것 뿐인데 그대로 임신해버린 곤란한 상황에서 시작된다. 의사도 가족도 남성 배우자 없이 아이를 혼자 임신하면 태아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니 아이의 아버지를 찾으라고 강요하는 혼란스러운 상황. 주인공은 겨우 본궤도에 오른 논문을 중단하고, 학교를 휴학하고, 아이의 아버지가 될 만한 남자를 찾아 맞선을 본다. 그 맞선들의 지난함, 그리고 어떻게든 아이의 아버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가족들이 벌이는 행동들은 호러 정도를 넘어 살의를 불러일으킨다. 마지막에 모든 갈등이 무너지는 장면에서 주인공은 울음을 터뜨리지만, 읽은 독자는 안도하게 된다.

<즐거운 나의 집>은 시작은 평범한 흉가 호러물로 보인다. 하지만 독자는 곧, 대안적인 삶을 빙자한 한량같은 삶을 추구하며 아내에게 의지하는 남편과, 조금이라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인고하고 희생했던 주인공의 갈등을 깨닫게 된다. 집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는 남편의 무능이 사실은 배신이었음을 밝혀내는 장치가 되고, 주인공은 남편이 아닌 다른 관계를 통해 복수하고 의지하며 살아간다. 찜찜한 그림자와 함께.

여담

조금 다른 이야기로, 창작물 속의 외국어라는 것은 여러 면에서 좋은 장치가 된다. 더러는 이야기의 전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배경을 암시하며, 많은 경우 이야기의 분위기를 이끌거나 변화시키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노래에 괜히 영어 가사를 넣거나, 지난 세기의 순정만화에서 대사에 공연히 프랑스어 단어를 넣는다거나 하는 것들이 이 마지막 경우에 해당한다. 

대학에서 러시아와 SF에 대해 강의하는 작가의 이력 그대로, 이 소설 속의 외국어들은 러시아어나 폴란드어 같은 동유럽어들이다. 하긴, 로봇(robot)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도, 인조인간이 인간과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도 동유럽권과 체코 쪽이었다.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 고용이 보장되어 있던 동유럽권 사람들이 여가 시간에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글을 쓰고, 국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SF나 판타지의 형태를 빌린 것을 생각하면, 이 역시도 낯설지만 놀랍지 않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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