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은 SF 읽기 7. 해가 지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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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은 SF 읽기 7. 해가 지는 곳으로

해망재

여성, 소수자, 약자들이 직면한 문명의 붕괴

종말 문학, 즉 아포칼립스 SF는 SF의 하위 장르다. 이 장르에서의 종말은 단순히 지구가 멸망한다, 인류가 멸망해서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 인간이 이룩한 어떤 세상, 다시 말해 문명의 붕괴를 보여준다. 이 문명은, 전기를 쓸 수 있고 자동차가 굴러가는 것 뿐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규칙들을 포괄한다. 법으로 통제되고, 폭력이 규제되고, 인간적인 연대가 일어나고, 사회 구성원들 간의 최소한의 신뢰가 유지되는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진 시대. 천천히 시나브로 종말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부터, 이미 끝장이 난 어떤 시대에 내던져진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남거나 혹은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사고실험까지. 그런 점에서 종말 문학은 인간이 문명을 통해 쌓아올린 인간성을 포기할 것을 종용받는 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는 바로 이런 종말을 다룬 아포칼립스 SF이자, 극단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인물들의 퀴어 로맨스이기도 하다. 솔직히 최근 몇 년간 순문학으로 분류되는 작가의 작품들을 덜 읽다 보니 최진영 작가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읽었음을 고백한다. 이 작품은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라인업이며, 이 시리즈에는 정세랑 작가의 <보건교사 안은영>과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가 포함돼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한 시리즈에 포함된 몇몇 책이 마음에 들면 그 시리즈의 기획이나 편집자의 안목을 믿고 같은 시리즈를 계속 찾아서 읽기도 한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대체로 그랬다. (그리고 이 책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아마도 나는 머지 않아 같은 작가의 작품 중 제목이 마음에 드는 <구의 증명>을 찾아 읽게 될 것이다. 매우 높은 확률로.)

아포칼립스 SF에서 종말이 오는 계기들은 주로 전쟁, 핵무기, 좀비, 바이러스 등이며, 이 소설에서는 갑작스레 번진 바이러스 때문인 것으로 설명한다. 하루만에 국내에서만 10만명이 사망했고, 그 다음날에는 그 다섯 배가 사망하는 바이러스로 사람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문명은 붕괴된다. 인류가 어떻게 이 바이러스와 투쟁하고 대처했는지, 왜 실패했는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이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일단 소설 속의 인물들이 이 사태에 대해 파악할 시간 자체가 부족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는 있다. 지나는 겨우 이틀 사이에 한 동네에 살던 친인척 50명 중 30명이 죽었다고 설명한다. 중고차 매매업을 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환란중에도 환금성이 좋은 금붙이 같은 것을 받고 차들을 팔아치우고, 탑차 두 대에 살아남은 친척들과 생필품들을 싣고 한국을 떠난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뉴스나 SNS를 통해서 뭔가 대처할 만큼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 소설 속의 인물들, 화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바이러스로 갑작스레 딸을 잃은 류는 시내 여행사의 상담 직원으로 맞벌이를 했던 두 아이의 엄마였다. 도리는 대출을 끌어안은 대학생이고, 아버지가 살해당한 뒤 여동생 미소를 책임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다. 가족과 함께 여행하며 이웃집 소년인 건지, 길에서 만난 도리와 미소 자매를 차에 태워 함께 데려가는 지나 역시도 도리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을 뿐이다. 이들은 모두 이 갑작스런 재난을 설명할 만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독자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이들과 함께 아무 정보 없이, 러시아에 내동댕이쳐진다. 마치 코맥 매카시의 <로드>처럼.

목소리

정통적인 SF의 관점에서 이 소설은 다소 밋밋하다. 종말 문학의 정돈되고 규격적인 형식을 가져왔지만, 어떤 기술이나 재난이 세상을 바꿔버린 과정을 당장 직면하는 고통과 내면의 감정만으로 다루는 것은 때로는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있다. 꼭 어떻게 감염되는지, 생존자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의 문제만이 아니다. 도리는 중국행 배표를 훔쳐 동생과 함께 대륙으로 건너왔지만, 지나의 일가친척이 탄 두 대의 탑차는 북한을 어떻게 지나왔을까. 이 환란의 시기에 류와 그의 가족들은 어떻게 러시아로 넘어올 수 있었을까. (물론 류가 여행사 직원이었다는 점에서 어떻게든 항공권을 구했으리라고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런 부분에 대해 소설은 때로 불친절하다.

하지만 문학적인 장치들이 이 소설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 이를테면 인물들의 나레이션이 그렇다. 목소리를 가지고 나레이션으로 상황을 서술하는 캐릭터들은 모두 여성이거나 어리거나 약자이며, 작가는 이들에게 거의 비슷비슷해 보일 만큼 같은 말투를 부여했다. 이들은 별개의 서사를 가진 캐릭터인 동시에, 비슷한 말투의 나레이션이라는 장치를 통해 약자성으로서 하나로 묶인다. 

또한 이런 '목소리'의 유사성은 생존을 위해 인간성을 저버리는 시대에 인간성을 간직하고 있는 캐릭터들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부분으로 보인다. 지나가 도리 자매를 탑차에 태워달라고 호소하고, 도리를 지키고 사랑하게 되고, 그리워하는 것도. 그들이 헤어졌다가 성당 문이 열리며 다시 만난 순간, 두 사람이 “거기 도리가/지나가 있었다”라고만 서술하는 것도. 모두가 지쳐 주저앉아 있던 그 순간에 그 두 사람만이 서로 바라보며 다가가 끌어안는 것도.

벽을 내린 사람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모두가 서로에게 벽을 높이 쌓아올린 채, 그저 자신의 생존과 욕망만을 바라보는 시대에 인간성을 믿고 서로에 대해 벽을 내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바이칼 근처에서 만난 자매에게 잠시 자신의 아이를 부탁하는 어머니, 그 어머니가 필요한 것을 가져가라며 열어 준 트렁크에서 통조림 두 개만을 받아가는 자매, 우리 가족과 친척 외의 사람들은 배척하거나 죽이고 강간하는 가족들과 달리 곤경에 빠진 사람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젊은 여자. 재난 속에서 사랑하게 된 사람이 건네 준 립스틱을 바르고, 그 상황에서도 씻고 단정하게 지내려고 하는 태도. 모든 문명이 무너진 세계에서도 소변이 마려운 아이의 등 뒤를 가려주며 어떤 상황에서도 수치심만은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

기본적으로 SF란 기술이나 재난이 세상과 사람 사는 모습을 어떻게 변화시켰느냐에 대한, 불가역적인 상황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그 변화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어떤 것들의 이야기들이 더욱 선명해진다고도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경이감을 불러일으키는 종류의 SF는 아니다. 하지만 종말 문학으로서, 여성이고 소수자이고 약자라는,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이들이 오히려 간직해 나가는 연대와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깊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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