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막 개봉했을 무렵, 재미있다는 입소문과 그걸 뒷받침하는 흥행성적에도 굴하지 않고 나는 이 영화를 외면했다. 디스토피아에서 총질을 하는데다가 미녀들을 다섯씩이나 감금해놓고 아내로 삼는 설정이라니. 줄거리를 슬쩍 보고 이것이 바로 남성향 판타지를 극한으로 구현해 놓은 결과물이구나 싶어서 일부러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개봉이 한참 지나 DVD가 나왔을 즈음이었다. 유난히 머리가 복잡했던 그날, 나는 아예 정신 나간 영화를 봄으로써 머리를 정화하려는 속셈으로 <매드 맥스>를 골랐다. 그런데 재생 버튼을 누르고 한참 보고 있자니 뭔가 이상했다. 이거 완전 에코 페미니즘? 에코 페미니즘이 여기서 왜 나와…?
'어머니 대자연'
이제 그만
이름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은 환경 및 자연을 자신들의 주장의 주된 요소로 삼는 페미니즘 사조다. 이들은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구조가 문명이 자연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구조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종속 구조의 본질적인 유사성 때문에 둘 중 어느 한쪽의 문제만 독립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에코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의 종식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연 파괴의 종식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에서는 오랜 시간 여성과 자연을 연관 지어 왔다. 아주 단적인 예로 우리가 '대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영어로 'mother nature' 즉 '어머니 자연'이다. 여성이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는 특징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연을 남성과 여성 둘 중 하나에 비유해보라고 한다면 아마 열이면 열 모두 여성을 고를 것이다.
기독교의 교리가 자연 파괴의 근원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환경론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기독교가 “신이 인간에게 자연을 소유할 권리를 줬다”는 잘못된 믿음을 퍼트리는 주요 공신이었다고 비판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때 그 신이 바로 남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기독교가 가부장적 구조를 공고히 하는 데에 얼마나 많이 기여했는지를 비판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에코페미니스트들은 그러한 남성적 신이 자연의 주인으로서 자연의 소유권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는 데에 주목한다. 남성이 자연에 대한 통치권을 가진다면, 그러한 자연과 연결 지어지는 여성에게도 남성은 동일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르는 남성-자연의 지배 구조와 남성-여성의 지배 구조는 <매드 맥스> 속 시타델Citadel에서 구현되고 있다. 물 부족과 방사능 오염 등 문제가 다분한 미래의 지구에서, 임모탄 조가 지배하고 있는 도시 시타델은 피지배층을 착취함으로써 유지된다. 전투용으로 키워지는 워보이War Boys들, 태어난 아기들에게 모유를 제공하는 역할만을 맡는 여성들, 임모탄 조의 소유물이자 그의 2세 번식을 위한 도구로 쓰이는 다섯 명의 부인들 등 철저한 분업이 이루어지는 시스템의 시타델. 임모탄 조의 부인들은 이곳에서 벗어나고자 탈출을 감행하고, 부인들을 데리고 도망치는 퓨리오사 일행을 ‘자기 것’—부인들—을 되찾으려는 임모탄 조와 그를 숭배하는 워보이들이 뒤쫓는다.
시타델에서 임모탄 조(아래 조)는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지배한다. 그가 애초에 권력을 갖게 된 이유는 그가 물, 즉 자연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이라곤 모래뿐인 세상에서 유일하게 시타델의 중심부에서만 초록 식물을 키운다. 조는 철저하게 자신의 통제 하에서 이러한 자연들을 지배하고 다시 그것을 통해 사람들을 지배할 힘을 얻어낸다.
가부장제 전에
가모장제
에코페미니즘은 그 안에서도 크게 두 가지 노선으로 나뉜다. 사회에서 말하는 여성과 자연 사이의 연관성을 거부해야 한다는 노선과 오히려 그러한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노선인데, 이 글에서는<매드 맥스>의 내용 상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을 강조한 입장을 중점적으로 살핀다. 여성-자연 연관성을 강조해야 한다는 입장은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분류되었던 돌봄, 양육, 직관과 같은 속성들은 자연과 밀접하게 관계될 수밖에 없고, 이 밀접한 관계가 가부장적 사회에서 평가절하 되어왔다고 지적한다. 여성들은 월경, 임신, 출산, 수유 등의 경험을 통해 남성들에게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가능해진 여성의 자연친화적인 면모는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가능케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페미니스트 메리 데일리Mary Daly는 가부장제 이전에 본래 가모장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에 따르면 여성들은 다른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여성들끼리뿐만 아니라 인간 외의 동물 및 자연과도 결속하는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생명을 만들어내는 힘도 없는 데다가 이처럼 자연과 결속할 능력도 없는 남성들이 여성들의 능력을 질투해 여성을 통제하고 파괴시켰으며, 나아가 여성과 연결된 자연까지도 그러한 통제와 파괴 아래 두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남성들은 여성을 착취함으로써 여성들의 능력을 연료 삼아 자신들의 파괴적인 활동과 제한적인 사고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데일리는 남성이 표방하는 문명을 여성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반대항으로 보며 전자를 질병과 죽음만이 있는 것으로, 후자를 건강과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본다.
<매드 맥스>에서는 이러한 대비가 단적으로 나타난다. 우선 남자만으로 구성된 워보이들 (이름부터가 '보이boy'다!) 은 앞뒤 가리지 않고 명령에 따라 상대를 죽여댄다. 시타델은 남성들을 위주로 돌아가는 공동체로, 납치해온 외부인은 불에 달군 도장을 찍어 노예로 삼고, 파괴적 본능을 자극하기 위해 전투를 나갈 때마다 헤비메탈을 연주하는 기타리스트를 탱크 앞에 매달고 다니며,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에게 바늘을 꽂아 피의 공급원으로 쓰는 등 파괴를 본능으로 삼는다. 심지어 워보이들은 조의 명령을 위해 자기 한 몸을 불살라 적을 죽이면 발할라Valhalla라는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 등 자기 파괴적인 모습까지 보인다.
반면 앞서 언급되었던 모유 수유를 담당하는 여성들을 비롯, 5명 중 2명이나 임신 중인 조의 부인들은 양육과 생명의 잉태라는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조의 오른팔까지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전투 군단의 대장 퓨리오사는 본래 녹지로 뒤덮였던 ‘The Green Place’ 출신이다. 이 곳은 영화 속에서 ‘The Green Place of Many Mothers’ 즉 '여러 어머니들의 푸른 땅'으로도 불리는데, 이 '여러 어머니들'이라는 것은 가모장제 공동체로서, 퓨리오사는 어렸을 적 이 공동체에서 시타델로 납치되어 왔다.
지난한 도망의 끝에 퓨리오사 일행은 겨우 그녀의 고향 푸른 땅에 도착하지만 본디 비옥한 땅이었던 그곳은 이미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로 여느 다른 곳들처럼 변해 버렸다. 아무런 식물도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돌이켜본다면, 이런 자연 파괴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영향이 고스란히 미치며, 임모탄 조와 같은 인물이 자연을 독점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해 결과적으로 인간 사이에서의 파괴와 착취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자연과 여성 억압의 문제가 맞물려있다는 그들의 주장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조의 부인들이 조에게 예속당하고 있는 관계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연의 문제 또한 해결해야 한다. 영화 속에서 퓨리오사와 조의 부인들이 끊임없이 녹지를 찾아 떠나는 이유는 아마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과의 연관성이 있다는 점은 공통이라 치더라도, 다른 피지배민들과 때깔(?)부터 다른데 임모탄 조의 부인들이 착취 계급으로 분류되는 게 타당하냐는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수잔 그리핀Susan Griffin이 역설하는, 남성들이 동물을 가축화하는 것과 여성들을 순화시키는 것 사이의 유사성을 고려한다면 조의 부인들 또한 근본적으로 피지배민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핀은 아이를 낳고 오로지 주부이자 엄마로서만 살았던 자신의 2년 간의 시간을 '가축의 삶'으로 정의한다. 엄마로서의 삶 그리고 가축의 삶 모두 사람들이 신경을 써주지만 결정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건 동일하기 때문이다. 조의 부인들도 마찬가지다. 황폐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았으며 잘 관리된 존재들이지만, 다른 피지배민들처럼 조의 ‘소유물’일뿐이다.
해방을 위해서
파괴를 멈춰라
여성과 자연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입장과 반대되는, 그런 연관성을 오히려 경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에코페미니스트들마저도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는 자연 파괴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 또한 그들이 문명에 속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에도 동일하게 속해 있으며 그들이 자연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매드 맥스>의 맥스는 에코페미니즘의 모범적인 남성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기존의 착취 구조에 가담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을 되살리는 데에 주력한다. 퓨리오사가 생사를 오고 가는 시점에서 맥스는 기꺼이 자신의 피를 수혈하여 그녀의 생명을 구하고, 퓨리오사 일행이 '여러 어머니들'로부터 받은 씨앗의 싹을 틔울 수 있는 방법을 조언한다. 맥스는 황폐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녹지가 남아있는 곳, 바로 이들이 도망쳐 나온 시타델을 향해 다시 돌아가 조의 권력을 탈환하라고 권하는데, 이는 곧 조가 독점하고 있던 자연을 다시 인간에게 돌려놓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타델의 탈환에 성공한 퓨리오사가 그동안 제한됐던 물을 원래대로 콸콸 흐르게 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드 맥스>가 페미니즘 영화라는 의견은 개봉 이후 꾸준히 있었다. 감독 조지 밀러George Miller는 이에 대해 일부러 의도한 적은 없고, 그저 스토리가 진행되며 자연스레 따라나온 결과라고 말한다. 하지만 조의 부인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캐릭터에 몰입하는 것을 돕기 위해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작가와 페미니스트 이브 엔슬러Eve Ensler를 촬영장으로 초대해 배우들과 이야기할 기회를 주선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이 영화를 제작하는 데에 있어 충분히 의도적으로 페미니즘적 요소를 집어넣은 것이 아닐지 유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