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가 되는 건 괜히 안 읽고, 안 보는 청개구리 마인드 때문에 지난 몇 년간 출판 시장에서 최대 이슈였던 <82년생 김지영>을 읽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여있는 자그마한 책. 막상 읽기 시작하니 다 읽는 데에는 30분 남짓이 걸렸다. 시사 프로그램 제작에 몸담았던 작가의 경력 때문일까,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의 묘사라기 보다는 르포의 나레이션 같은 느낌으로 등장인물과 작중 배경을 서술한다. 중간중간 인용되는 통계자료는 이러한 인상을 더욱 강화한다. 무미건조하고 담담한 문체에, 한 여성의 일대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이 소설은 특기할만한 재미는 없다. 재미있는 소설책을 찾고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지는 않을 거란 의미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 그리고—각계각층의 여성이 이 책의 독자였다는 사실만으로 논란이 될만큼—왜 그렇게 폭넓은 여성독자를 가질 수 있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82년생 김지영>(아래 <김지영>)에 대한 가장 흔한비판은 사회 내 성차별을 과장하여 여성들의 피해의식을 자극하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만 읽힌다는 것이다. 덕분에 문학적으로 빼어난 점이 없는데도 베스트셀러 소설이 될 수 있었다고 말이다. 작품이 성차별을 과장해서 표현했는지 아닌지에 관한 논란은 차치하더라도—애초에 딱히 과장은 없는 것 같지만—<김지영>의 핵심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실로 다양한 방면에 걸쳐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스레 상기시킨다.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은 ‘태어나서부터’가 아니다. 여자 아이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차별을 경험한다. 작중 김지영의 여동생이 될 수도 있었던 태아는 출생 전에 지워졌다. 산아제한 제도 하에서, 아들은 꼭 하나 낳아야 한다는 시모의 압박에 못이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학급에는 언제나 남자아이들의 수가 여자아이들의 수에 비해 여섯 명 가까이 많았다. 맨 뒷자리 책상 몇개는 언제나 남자아이들로만 이루어진 두세 쌍의 차지였다. 정확한 이유를 알게 되기 전까지, 나는 원래 자연적으로 남자 아이가 태어날 확률이 더 높은 줄 알았다.
내가 초등학교에서 가장 싫었던 점 중 하나를 김지영도 똑같이 경험한다. 김지영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남자아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만 담임 교사로부터 돌아오는 조언은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애들을 괴롭히는 거야”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뿐.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말은 두고두고 여자가 남자와의 관계에서 취약해질 수밖에 없게 만들고, “남자는 원래 그러니까 네가 이해해야 해”라는 레퍼토리를 용인하게 만드는 데에 큰 공을 세운 듯하다.
내가 다닌 중고등학교는 김지영의 학교처럼 남자아이들부터 급식을 받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비슷한 경험은 가지고 있다. 급식을 배식받는 줄은 남자줄과 여자줄로 나뉘어 있었고, 남자아이들이 받는 급식의 양이 여자아이들의 두 배는 족히 된다는 것은 그 누가 봐도 명확했다. 물론 그때는 그 누구도 차별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같은 돈을 내도, 어차피 여자아이들은 많이 줘봤자 남길 거라는 말로 정당화되던 관습이었다. 게다가 이맘때쯤이면 아이들은 이제 사회가 자신들에게 바라는 모습이 무엇인지 대충 깨닫고 그 기대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부응하게 된다. 애초에 여자아이들이 점심을 배부르게 먹지 않고 남기도록 만든, 여성에게 부과된 미적 기준. 그리고 활동적이기 보단 정적이길 요구하는 여성성. 체육 수업에서 자유시간이 주어졌을 때, 남자애들에게는 축구를 시켜도 여자애들에게는 앉아서 수다를 떨라고 한 후 “이 편이 너희들도 더 좋지?”라고 묻는 체육 교사에 말에 아이들이 아무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정말 좋아서가 아니었다. 교복 치마를 벗어도 차마 벗지 못한 복잡다단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건 그 당시조차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김지영씨의 언니는 자신의 꿈을 좇아 언론 관련 학과로 진학하려 했지만 “‘여자 직업’으로 선생만한 게 없다”는 통념에 못이겨 교대에 진학한다. 지금에야 우스갯소리처럼 털어놓을 수 있지만, 내가 모 여대, 그것도 사범대에 진학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이와 아주 동일한 이유가 아주 조금은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나중에는 적성에 안맞아 전과를 하고 말았지만. ‘여자로서 좋은’ 직업을 추구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김지영이 정신과 상담을 받게 한 직접적인 원인인 출산과 독박육아일 것이다. 여성에게 지워지는 출산과 육아라는 짐을 짊어질 수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도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길이니 말이다. 으레 그래야 하는 듯 육아를 담당하는 것도 억울한데 그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면 이후에 복귀하기도 힘들고, 집안에서의 가사 노동은 그 가치를 무시당할 뿐이다.
이처럼 여성으로 태어나 받는 차별은 삶의 곳곳에서, 그것도 다양한 시기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차별은 너무나 친숙하고 또 다양해서 그게 차별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정도다. 실제로 이 책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피해의식이나 새삼스러운 호들갑이 아니라 ‘담담한 공감’이다. 작품 내에서 서술되는 에피소드를 읽으며 눈앞에 떠오르는 수많은 나의 경험들. 그리고 이어지는 깊은 ‘현타’. 너무나 많은 요소들이 얽히고설킨 이 덫 같은 사회구조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그들과는 다르게’ 살아온 걸까? 너무 촘촘해서 빠져나갈 수 없을 듯이 보이는 그물로부터 우리는 과연 탈출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실타래를 풀려면 너무 많은 힘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이전 세대는 여태껏 순응하며 살아온 것이 아닐까 등등. 그래서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l과 같은 사회주의Socialist 페미니스트들은 말했다. 여성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려면 사회의 생산구조, 섹슈얼리티와 재생산, 어릴 때의 사회화 과정 등 모든 방면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변화가 일어나야한다고.
기회의 차이
가부장제의 종식을 위해 등장한 페미니즘에는 다양한 사조가 있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이성적인 인간임을 역설하며 여자와 남자에게 동일한 교육과 동등한 기회를 제공할 것을 요구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흔히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여성적 특성—이를 테면 여성은 의존적이라거나 사적인 영역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던가 하는 특성은 애초에 여성과 남성의 사회화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불균등한 기회를 받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여성에게 부여된 여성성이라는 젠더가 여성을 가부장제에 매어두는 원인이라고 보고 섹스와 젠더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고자 하는 급진적 페미니즘도 있다. 파이어스톤Firestone과 같은 페미니스트는 여성성이나 남성성 같은 사회적인 성차를 없애는 것에서 나아가 재생산에서의 생식 역할, 즉 생물학적인 성차까지 없애고자 했다. 여자가 아이를 임신하고 또 출산하는 것이 여자와 남자에게 배당된 젠더를 정당화하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가 열달 동안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었으니 아이에 대한 친밀도나 이해도도 훨씬 높을 것이기에 여성이 주된 양육자가 되는 게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한편 마르크스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가 여성을 주변적인 역할에 남게 하는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출현으로 인해 일터와 가정이 엄격하게 분리되었고, 그 결과 가사노동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여성의 지위를 하락시켰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가사 노동을 완벽하게 사회화시키거나 임금제 가사노동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며 가사를 담당하는 여성의 노동 지위의 향상을 꾀한다.
여성의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는 정신분석 페미니즘도 등장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우리가 유아기 때 경험한 모든 것들이 우리의 무의식의 영역으로 옮겨가 우리의 삶에 계속해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조인데, 이들은 생물학적인 성차를 거부하며 성별 간 차이는 사회적인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성이 양육을 전담함으로써 양쪽 성별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고 여자와 남자가 동등하게 양육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각각의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다. 그만큼 여성을 억압하는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이렇게 다양한 원인이 전부 동시에 유효하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불공평한 대우를 받으며 자란 것도 문제고, 서로 다른 성역할을 맡는 것도 문제고, 사회의 생산 구조도 문제고, 그로인해 특정한 모습으로 형성된 여성의 내면도 계속해서 여성을 옥죈다고 말이다. 이렇게 다층적인 요소가 여성의 지위를 그 시작부터 모두 결정해놓았다고 분석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그래서 다면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진정으로 여성이 해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여성의 억압을 분석하고 또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종합본 같은 이론을 만들고자 목표를 세웠다. 페미니즘에 있어서 그야말로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이론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통합 이론은 가능한가?
그런데 이런 원대한 목표를 듣고 나면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이들이 말하는 여성 억압의 복합적인 요소들을 모든 여성이 똑같이 경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지영>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점 중에 하나는, 여대를 다닌 나는 작중 김지영이 대학시절 경험한—주로 불쾌한 남선배가 등장하는—내용에 하나도 공감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결혼한 경험도 없기에 김지영이 결혼 후 겪는 일들도 내게는 생소했다. 그저 엄마를 통해 전해 들은 내용이 떠오르는 정도였을 뿐. 그리고 내가 앞으로도 비혼을 유지한다면 나는 영영 해당 경험을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여성의 억압을 통합적으로 설명할 이론을 만들겠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원대한 목표는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반박을 받게 된다. 여성의 삶을 하나로 통일해서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표준적인 이론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또한 그들은 이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환상이며, 지극히 남성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비난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목표는 실현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같은 여성이라도 계층, 인종, 문화에 따라 모두가 다른 경험을 한다. 얼마 전엔 신작 일본 만화책을 읽는데 새삼 아연실색했다. 줄거리는 대략 연애경험 없는 순진무구한 여주인공이 안정적인 노후준비를 위해서 잘나가는 남주인공과 사귀어 보기로 한다는 내용. ‘여자력’을 운운하고, 남자에게 의탁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노후를 보낼 수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설정이 아직까지 먹힌다니. 한국에서 이런 플롯을 빻았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도 분명 오래되지는 않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런가하면 일본인 여성과 백인 여성을 두고 내가 ‘여성’으로서 보다 동질감을 느끼는 대상은 아마 일본인 쪽이 될 것이다. 어릴 때는 피부색만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서는 그 피부색의 차이 때문에 삶에서 경험하는 내용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여성’라기 보다는 ‘백인’ 여성이라고 분류할 것이다. 설령 같은 백인이라 할지라도 계층에 따라서 여성의 삶은 또 차이가 난다. 상류층 여성과 극빈곤층 여성의 삶을 비교해본다면 아마 공통점을 찾기가 오히려 하늘의 별따기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여성간의 차이와 다름을 설명할 수 있도록 페미니즘 이론 또한 다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여자가 다수인만큼 그 이론도 다수일수록 좋다고. 그리고 이렇게 다수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자세 또한 가부장적 도그마에 저항하는 한 방법이라고도 이야기한다.
여성이라서 공유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여성들이 <김지영>을 읽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모든 여성들이 단순히 ‘여자’이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김지영>은 일본과 대만에도 수출이 되어 좋은 성적을 거뒀다. 즉, 우리가 <김지영>을 읽으며 떠올렸던 경험들이 반드시 한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서구사회에서 정립된 페미니즘 이론을 우리가 공부하며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분명 여성의 삶에는 시대와 인종, 문화를 뛰어넘어 ‘여성’이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작품 첫머리에서 김지영이 아직 아기인 자신의 딸, 대학 시절 동기, 그리고 자신의 엄마에 빙의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마치 여성인 이상 모두가 공유할 수밖에 없는 삶의 부분이 있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여성들이 함께 공통점을 공유한다는 것은 여성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이 된다. 개별적인 차이를 완전히 간과해서는 안되겠으나 그렇다고 차이만을 너무 강조하는 것도 좋지 않다. 페미니즘 사상은 다양한 사조로 분류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사조를 나누는 작업은 굉장히 애매하고 까다로운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서로 겹치는 부분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편의상 분류를 하긴 하지만 오히려 칼 같이 나눈다는 것이 억지일 정도이다.
<김지영>이 보여주고 있는 가부장제의 매트릭스는 그 안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도저히 그 안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벗어날 엄두조차 들지 않을만큼. 하지만 매트릭스가 공고한만큼 여성들은 그안에서 서로 공통분모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매트릭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함께 경험을 나누고 연대하며 다양한 이론을 발전시켜왔다. 실제로 페미니즘은 이미 완성된 학문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중이며 또 꾸준히 발전해가고 있는 학문이다. 이론에 기반한 실천을 통해서 여성의 삶의 많은 부분은—더딜지언정—확실히 더 나아지고 있다.
그러니 아직 탈출구를 제시해줄 완벽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포기하기는 이르다. 여성 동지들의 가능성과 힘을 믿어보는 것이 훨씬 낫다. <김지영>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것은 그래서 고무적이다. 소수의 특별한 경험을 서술하는 책이라면 코어 팬층은 가질 수 있을지언정 폭넓은 독자는 확보하지 못한다. 하지만 <김지영>은 여성 삶의 보편성을 서술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또 그들에게 그러한 삶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줬다. 이건 분명 앞으로의 페미니즘 담론에 있어 커다란 동력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