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진 [나무가 되어]
먼 한 점에서 소리가 시작된다. 소리는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20년을 기다린 가락일 테니 어찌 그렇지 않겠나. 그리고 그 소리는 오래 견디고 침묵한 시간만큼 진지하고 신중하게 낮은 포복을 시작한다.
앨범은 조동진의 이름 앞에 흔히 붙는 포크보다는 앰비언트로 분류하는 것이 유효해 보일만큼 사운드와 분위기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매만져진 소리 숲 사이, 자연과 시간, 추억과 회한을 담아 곱게 고른 단어와 문장이 스쳐 지난다. 아름답다. 자칫 한국 대중음악사 속 전설로만 기록되었을 이름의 현현한 현재를 만날 수 있기에 더더욱.
이민휘 [빌린 입]
2012년, 틀도 없고 근본도 없는 구장구장 리듬으로 많은 이들을 사로잡았던 무키무키만만수의 돋보였던 활약 이후 이민휘의 행보는 느리지만 선연했다. 몇 번의 영화음악 작업과 몇 번의 공연이 지나고 서울에서 브루클린까지 7년 여의 시간에 걸쳐 다져진 노래들이 한 장의 앨범이 되었다.
입과 혀로 쌓을 수 있는 갖은 만행과 난행을 바탕으로 쓰여진 메시지의 날카로움은 가사, 멜로디, 편곡 등 모든 면에서 극도로 제한된 만듦새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생의 비릿함을 전한다. 단언컨대,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며 흔히 만날 수 있는 30분이 아니다.
75A [75A]
앨범은 상반신을 활짝 열어젖힌 여성의 몸을 앞세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흔히 판단하게 되는 얼굴은 부러 가려져 있다. 그 위에 알맞게 놓인 글자 75A. 이 익숙한 숫자와 알파벳의 조합은 당신이 떠올리는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유의미한 기호는 양 보다는 음에 가까운 에너지로 개성 있는 결과물을 꾸준히 발표해 온 프로듀서 그레이와 기묘한 무드를 자아내는 싱어송라이터 오요 두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여성의 아름다움’을 목표로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고민하고 다듬은 노래들을 감싸 안는다.
낯선 분위기만큼 듣는 이에게 해석과 사색의 여지를 주는 앨범이다. 음악, 사진, 영상 모두를 함께 감상하는 것을 권한다.
검은잎들 [메신저]
지난해 즈음부터 자꾸만 귀에 걸리는 음악이 있었다. 꽤 투박한 매무새였지만 벌어진 틈새로 새어 나오는 빛과 향기가 심상치 않았다. 밴드 ‘검은잎들’이었다. 이들의 음악은 스스로 내건 ‘Britpop Made in Busan’이라는 캐치프레이즈만으로도 쉽게 설명이 가능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다보면 어쩐지 조금 더 욕심이 난다.
시인 기형도를 연상시키는 밴드명에서 더 스미스, 조이 디비전, 데이빗 보위 등과 자연스레 연결되는 멜로디와 사운드까지, 앨범은 한국 땅에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예민하게 겪어낸 이들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생의 순간들을 차곡차곡 펼쳐 놓는다. 조금 부끄러울 만도 한 그 기억에 정면으로 맞서는 뻔뻔함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끌린다.
9와 숫자들 [수렴과 발산]
[수렴과 발산] 속 9와 숫자들은 본격적이다. 지난 7년 간 많은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 온 특유의 서정과 온기는 그대로지만 풍성한 사운드와 시대와 호응하는 메시지가 심상치 않다. 아낌 없이 사용된 브라스 세션이 돋보이는 ‘검은 돌’, 8,90년대 우리가 사랑한 ‘고급 가요’를 연상시키는 ‘싱가포르’, 이들다운 장난기가 그대로 살아있는 ‘다른 수업’ 등 친숙한 노래들에 앞서 ‘안개도시’나 ‘엘리스의 섬’이 놓였다.
그 언제보다 커다란 힘과 의지를 전하는 노래를 들으며 한 밴드의 성장과 우리가 밟고 있는 시대를 떠올리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다. Solitude and Solidarity, 고독과 연대라는 앨범의 부제를 다시 한 번 눈으로 쓰다듬는다. 서로의 고독이 만나 연대를 통해 발산하며 꿈을 향해 나아가는 그 지난한 길 위, 이 앨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