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아티스트들은 남성 아티스트에 비해 ‘보통 인간’으로의 정체성보다는 한층 과잉된 캐릭터성을 커스터마이징 해야 하는 숙제와, 자기검열에 대한 (남성에 비해)비교적 엄격한 사회적 요구를 함께 안고 있다. 이런 모든 과제를 극복하고 자의식 어필에 주저함이 없는 여성 아티스트들만이 두각을 나타내고 살아남는다. 물론 이미 대체 불가한 네임밸류를 쌓아 올린 여성 아티스트들조차 씬과 미디어의 대상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달에는 지코, 올티 등 한국의 남성 힙합 아티스트들이 단체 채팅방에서 니키 미나즈(Nicki Minaj)를 향한 성희롱성 발언을 한 것이 공개되어 논란이 된 바 있다. 이 불합리의 지점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분노는 실제 여성 아티스트들에게는 매일같이 의문과 과제로 쏟아질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면 다음 의문을 꺼내볼 수 있다. 과연 여성 아티스트가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본인의 콘텐츠 제작과정에서, 여성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대상화되는 현실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여성 아티스트의 콘텐츠를 감상하며 이러한 고민을 때때로 넘겨받는 느낌을 피할 수 없고, 외면할 수도 없다. 젠더 의식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굳이 의식할 필요가 없는 ‘보통 인간’으로서의 고민 위에서 시작되는 창작물보다 비전형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여성 아티스트의 창작물은 마이너리티만을 위한 콘텐츠는 아니지만 어떤 특정 대상에게 더 유효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젠더 이퀄리즘만을 외치는 것이 공허하다는 인식은 운동과 문화적 코드를 통해 세계적인 흐름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나 반갑게 생각하는 건 2010년쯤을 전후로 굉장히 다양한 캐릭터의 여성 솔로 아티스트들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자연스레 이들의 중심 리스너층이 되는 이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다. 필연적으로 여성 아티스트는 어떤 여성의 꿈이 된다. 그녀들의 형형히 빛나는 자의식으로 하여금 어딘가의 평행우주에서는 내가 저런 모습으로 살고 있었으면 하는 수많은 꿈들이 세대를 거듭해 무한 카피된다.
찰리 XCX(Charli XCX)와 티나셰(Tinashe) 처럼 인터넷 뮤직을 즐기는 키드들에게 소비되며 주목 받기 시작하여 팝의 아이콘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담긴 아티스트들의 콘텐츠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내 자신이 자넬 모네(Janelle Monáe)의 타고난 재능과 그라임스(Grimes)의 시대가 원한 재능을 부러워하고 사랑하며, 멜라니 마르티네즈(Melanie Martinez)의 새 비디오 공개일을 기다렸다가 찾아보고, 즈네이 아이코(Jhené Aiko)의 목소리를 듣기 좋은 날씨를 기다리고, 개인적으로 ‘2017 Album of the Year’로 꼽는 작품을 발표한 스자(Sza)의 덕질을 하는 등 여성 아티스트들의 콘텐츠에 더욱 거리감을 좁혀 즐겨 듣는 여성들의 취향을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초기작부터 뚜렷한 존재감으로 씬에 등장한 여성 아티스트들은 끊이지 않고 나오는 중이다. 2017년 최고의 히트 싱글 ‘Bodak Yellow‘를 발표한 여성 랩퍼 카디 비(Cardi B), 인기 걸그룹 피프스 하모니(Fifth Harmony)에서 탈퇴해 솔로 커리어를 시작한 카밀라 카벨로(Camila Cabello), 트렌디한 EDM에 스케일 있는 독특한 퍼포먼스를 구현하는 유니크한 캐릭터의 뫼(MØ), 당당한 캐릭터와 대중성 있는 음악색깔로 월드와이드 팝아이콘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두아 리파(Dua Lipa), 패셔너블하고 아방가르드한 FKA 트윅스(FKA twigs), 현R&B/소울계의 핫아이콘 조자 스미스(Jorja Smith), 싸늘한 톤의 얼터너티브 리듬에 쿨한 콘텐츠를 내놓는 아브라(ABRA), 뜨거운 보컬로 건조한 얼터너티브 소울 곡들을 발표하고 있는 나오(Nao), 오롯이 아름다운 자신과 호흡, 빛으로 가득 찬 콘텐츠를 통해 인상적인 포지셔닝을 보여주고 있는 사브리나 클라우디오(Sabrina Claudio), 90년대 골든 에라의 R&B 디바들을 떠올리게 하는 아우라의 케레라(Kelela) 등 나열하기 벅찰 정도다.
자의식
칼리 우치스(Kali Uchis)의 [Por Vida] 앨범 얘기에 앞서 여성 아티스트가 가지는 의미부터 얘기한 것은 이 앨범 역시 근 몇 년간 발표된 앨범 중 여성으로서의 꿈의 레퍼런스가 되는 ‘아티스트의 자의식이 효과적으로 구현된’ 작품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칼리 우치스는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의 소울과 레이디 가가(Lady GaGa)의 비주얼을 연상시키는, 그 자체로 이미 복합적인 여성 레퍼런스의 산물이나 마찬가지다. 그녀는 레트로 소울 디바로서의 아이코닉한 이미지 구현에 공을 들인 비디오들을 발표하며 일관된 색깔로 자신의 아티스트 브랜드를 드러내왔다.
앨범 전반적으로 90년대 소울풍의 슬로우 템포 프로덕션으로 레트로 무드를 재현하고 있으며 간결한 사운드의 플랫 비트들로 채워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싱글 ‘Loner’, ‘Know What I Want’, ‘Rush’ 등의 뮤직비디오에서 칼리 우치스는 팬시한 비주얼로 연출된 가공의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백금발과 핑크톤 헤어의 레트로 핀업걸로 정체화하며 그 세계의 무드를 즐기고 노는 모습을 그저 자유롭고 태연하게 보여줄 뿐이다.
칼리 우치스의 비디오들 속 가공된 레트로 월드는 곡마다 다른 설정 안에서 알 수 없는 미지의 배경이 된다. ‘Rush’ 뮤직비디오는 일행들과의 로드트립을 로우한 톤으로 담아냈고, ‘Know What I Want’에서는 혼자 가는 여행길에서의 해프닝을, ‘Loner’는 꿈속을 헤매며 사색에 잠긴 듯 다양한 빈티지 이미지로 꾸며진 장소들을 전전하는 그녀의 이미지를 나열한다.
불분명하고 모호한 장소들은 그 안에 위치한 레트로 핀업걸로서의 그녀의 존재감으로 인해, 시대와 지리적인 정보들이 지워진 채 보는 이가 전체적인 무드에만 집중하게끔 한다.
이러한 연출법은 이 앨범 전과 후, 칼리 우치스의 이름으로 공개된 비디오들에 꾸준히 적용된다. 칼리 우치스는 자신이 발표하는 모든 작업물을 통해 자유롭고 권태로운 레트로걸로서의 유희적인 이미지를 지속적인 셀링포인트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요약되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녀의 포지셔닝력은 확고하다.
다시 여성 아티스트들의 얘기로 돌아가서, 나는 굵직한 몇 아이콘이 ‘여성 아티스트’의 자리를 대표하던 때와는 달라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자의식을 전시하기에 거리낌이 없으며 비주얼과 프로덕션에 있어 뚜렷한 일관성을 내세우는 여성 아티스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 대해서 말이다. 이는 ‘자신이 어떻게 보여지는가’라는 물음에 이미 충분한 정체화를 통한 답을 가지고 만들어낸 결과물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낼 줄 아는 여성 아티스트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누가 만들어준 옷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전에, 이미 자신의 옷을 입고 유유한 걸음을 걸을 줄 아는 그녀들.
의미? 없어도 뭐 어때
그런 여성 아티스트들의 결과물들이 의미 있는 담론을 제시하는 콘텐츠가 아니어도,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게 무엇이든 그녀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자신만의 톤으로 마음껏 쏟아내어 놓는 현상에 일단 집중함이 좋을 시간이다. 물론, 우리는 시드(Syd) 같은 아티스트가 콘텐츠를 통해 자신의 재능에 대한 스웩과 퀴어 연애담을 펼치는 걸 보고 나아가 젠더 해방을 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녀가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젠더 프레임에 구애 받지 않고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선택 받은 재능을 가진 아티스트라는 점을 되새기면서.
또한, 그런 뛰어난 아티스트들이 활약하며 전에 없는 다양한 여성에 의한 콘텐츠가 지니는 가치가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며 ‘여혐 셀링’ 시장이라는 오욕을 모른 체하고 있는 K-POP 시장까지도 영향을 끼치길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아이유의 [Palette]가 국내 멜론뮤직어워드 ‘올해의 앨범상’과 미국 빌보드 선정 ‘올해의 케이팝 앨범 20’ 부문 1위에 오르고, 엄정화가 뛰어난 프로덕션의 웰메이드 신보 [The Cloud Dream of the Nine – 두 번째 꿈]을 발표한 2017년 말의 케이팝씬 한복판에서 상상할 수 있는 좋은 그림들을 늘리고 펼쳐 2018년 새해의 케이팝을 맞을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