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세계검도선수권대회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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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세계검도선수권대회 현장을 가다

수련의 세월을 표현하는 치열한 몸짓들

이소리소



“컵라면 물을 붓고 있는데 내 뒤로 미야자키 선수가 지나갔어.” 

“물 붓던 걸 멈추고 싸인 받으러 갔어야지!" 


함께 시합구경 온 남자친구가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던 순간.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현역선수로 활약한 ‘검도계의 스타’ 미야자키 마사히로 선수가 유유히 사라졌다. 유튜브 속 유명 검도선수들이 화면 속에서 튀어나와 경기장 근처를 돌아다니던 현장. 그렇게 2018년 인천에서 열린 세계검도선수권대회는 전 세계 검도인들의 빅 이벤트 장소였다. 

나라마다 검도를 가장 잘 하는 사람들이 실력을 겨루는 검도인들의 올림픽. 이 대회에 검도 종주국인 일본과 검도 인구가 비교적 많은 한국에서는 실업선수 중 선발된 이들이 국가대표로 출전한다. 상대적으로 검도인구 저변이 약한 프랑스, 호주 등은 아마추어 선수들 중 선발전을 거쳐 그 나라 최고의 기량을 지닌 사람들이 참여하는 식이다. 각국의 탑 선수들을 비행기도 안 타고 볼 수 있다니.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기회였다. 귀찮아서 콘서트 티켓도 예매 잘 안 하는데 검도대회 티켓만큼은 오픈하자 마자 인터파크 티켓에 들어가 예매했다.  

이 정도의 열정을 보이긴 했지만, 나를 포함해 생활체육 검도인 중 실업선수들의 시합을 챙겨보는 사람이 그리 많진 않을게다. 야근과 만성피로가 도사리는 일상. 그 과로의 틈에서 영상 볼 시간보다 수련할 짬을 만들기도 벅찰 테니까. TV에서 검도시합이 방영될 기회란 거의 없고(전국구 대회인 대통령기 검도대회와 SBS 검도왕대회 정도가 전부다) 올림픽 정식 종목도 아닌 터라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물론 한국 실업선수들의 이름을 알아듣는 이가 있다면, 내장에서부터 덕심이 끌어오르는 검도 덕후일 가능성이 높다. ‘이강호' ‘박병훈' 등의 남자선수들, ‘허윤영' ‘차민지' 등의 여자 선수들 이름이 익숙한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여자 검도인의 입장에서 세계 수준의 여자 선수들 시합이 궁금했다. 남자 선배들이 수련에 대해 고민하고 알려주는 게 항상 감사한 일이지만 같은 신체적 조건에서 성장의 여정을 나누어줄 여자 선배가 없다는 아쉬움이 내심 있었다. 

예를 들어 머리치기 동작을 배울 때 자세 교정을 남자 선배들이 해준다 치자. 자세 자체는 교정되겠지만 그 다음의 또 다른 질문이 남는다. 교정된 자세로 나보다 힘과 스피드가 월등한 남자 선배에게 머리치기 공격을 시도하면 어떻게 될까. 힘이 세니 무조건 맞기만 하는 거 아닐까. 힘과 속도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타이밍 조절 같은데, 그 타이밍은 도대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조절하지? 이런 식의 고민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여성선수들을 직접 봐야지 싶었다. 키 큰 여성, 키 작은 여성, 빠른 여성, 느린 여성 등등. 체형도 인종도 다른 다양한 여성 검도인들이 자신만의 싸움을 해낼 테니까. 입으로 설명하진 않겠지만 몸으로 보여주지 않겠는가. 물론 선배들에게서 들었던, 검도 종주국 일본의 남자 검도선수들 시합장면도 챙겨볼 거였다. 선수들의 공격속도와 타격감을 그들과 같은 장소에서 보고 느끼는 것. 검도인에게 이건 최애 뮤지션의 공연관람에 열 올리는 밴드음악 팬들의 그것과 비슷하니까. 전설적인 락밴드 Queen의 팬들이 드럼의 강렬한 비트와 기타소리(여기에 프레디 머큐리의 가창력)에 흥분한다면, 검도팬들은 죽도 끝에서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타격소리에 일제히 환호하는 것이다. 뭔가를 두드리며 나는 소리에 사람들이 흥분한다는 점도 좀 비슷하다. 

체육관에 도착하니 세계 60여 개 국에서 모인 선수들이 시합장 안팎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각 나라의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대회장 근처의 검도용품 부스를 구경하는 선수들. 네덜란드나 프랑스 같은 서양인의 이목구비와 도복의 조화가 퍽 낯설었다. 무엇보다 눈을 끌었던 건 검도 관련 영상에서 숱하게 본 일본의 유명 검도선수들이었다. 일본 검도계의 전설인 미야자키 마사히로와 에이가 나오키, 그 제자급 선수인 다카나베 스스무라니. 현역선수가 아닌 코치진으로 등장했음에도 오랜 검도 인생에서 쌓인 연륜이 베어나는 모습들이었다.  

현역 일본 국가대표 명단에는 전일본선수권대회 역대 우승자인 니시무라 히데히사, 다케노우치 유야 등의 이름이 보였다. 여자 선수로는 국내 네티즌들이 번역한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뮤영했던 야마모토 마리코, 3년 전 세계대회에서 여자부 개인전과 단체전 우승을 거머쥔 마츠모토 미즈키가 있었다. 그들의 멋진 주특기를 확인하고 싶어 유명선수를 볼 때마다 “체크다"를 반복했던 만화 <슬램덩크>의 경태의 마음으로 그들의 이름을 되뇌였다. 토너먼트 개미지옥을 치르는 선수들의 시합으로 눈을 돌렸다. 

다들 강했다. 일개 아마추어 검도인인 내 입장에서 본 그들의 플레이는 달랐다. 여자부 시합의 경우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선수들은 몸싸움에서 충분히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일본이나 한국의 여자 검도 선수들은 순간 공격의 타이밍을 잡아내는 집중력, 공격의 틈을 만들어내는 풋워크 등 전반적인 경기 운영에서 눈에 띄었다. 

힘을 쓸 때는 힘을 쓰고 섬세하게 공격의 틈을 만들어내는 움직임. 상대가 공격을 실패하는 순간을 노려 주저없이 상대의 중심을 파고드는 칼. 여성들의 시합 방식도 남자들의 시합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다만 좀 다르게 다가오는 부분은 있었다. 중요한 승부를 결정짓는 순간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거나 살짝 엇박자로 시도하는 공격같은 것들. 남녀 각각의 개인 부문 결승전을 비교할 때 이 생각이 좀더 뚜렷하게 올라왔다. 

동시에 머리치기를 한 끝에 한판을 성공한 남자부의 득점 순간과, 공격을 할 듯 말듯 살짝 칼을 들었다가 타이밍을 변화시켜 상대의 손목에 죽도를 내리꽂는 여성부의 득점순간.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사분의 일, 삼분의 일 박자로 정직하게 흘러가던 곡에서 변박자의 멜로디가 치고 올라온 듯했다. 힘으로 누르기 보다 상대 반응에 감응하는 검도랄까. 모든 여성이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아님을 안다. 다만 그 시합들을 통해 뚜렷히 느꼈다. 빠르고 힘쎈 검도가 전부는 아님을. 저런 공격패턴을 체계적으로 배웠을지 오랜 기간 수련하며 몸으로 깨우친 건지 과정을 알 길은 없지만. 망설임없는 그들의 몸짓이 겹겹이 쌓인 수련의 세월을 표현하고 있었다. 

종종 챙겨보는 어떤 기자의 인터뷰 기사에 이런 말을 봤다. “계속한다는 건 그냥 숨쉬듯 놓지 않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오래 한 사람이 보여주는 우주는 깊이가 달라요. 그 시간을 들였기 때문에 찾은 우주에요.” 뮤지컬 가수로 오랫동안 자신의 일을 갈고 닦았던 인터뷰이의 멘트, 그 말처럼 나 같은 아마추어는 선수들이 만들어낸 깊은 우주 어딘가의 먼지 같은 일부를 보고 자극받는 거겠지. “오, 저렇게 멋진 득점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라면서. 도장에 돌아가면 몇 개 흉내 내봐야겠다. 

근데 대회의 끝을 갈수록 화가 올라올라오는 건 왜지? 몸은 결승전이 벌어지던 한일 남자 단체전 시합장에 박힐 기세로 쏠려 있었다. 어느덧 관중석 언저리를 부여잡으며 화내는 나. 

“심판님들! 방금 한국쪽이 공격 성공했잖아요. 왜 점수로 인정 안 해줘요?! 그리고 한국 관중석 위쪽의 몇몇 분들. 축구 응원하듯 “대한민국~~” 이러지 말라고요. 시끄럽게 응원하지 말라고 관내 방송하는데도 안 듣다니. 다른 나라 사람들 보기에도 부끄럽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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