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시합이 끝나간다. 시합장 밖에서 대기하던 내 마음이 결연해졌다. 도망치고 싶기도 도전하고도 싶은 이상한 기분. 솔직히 인정하자. 단체전에 나가고 싶어 했잖아.
시합에 대한 내 욕구는 분명했다. 팀원을 만나 재미난 팀워크를 발휘하고 싶었다. 압도적인 실력 차로 이겨도 쾌감이 크겠지. 엇비슷한 팀과 만나 승패 여부와 득점차를 계산한 것도 쫄깃할 텐데. 다른 도장의 여자 단체팀들이 생각났다. 함께 몸을 풀고 파이팅을 외치며 시합장으로 들어가던 모습. 참 부러웠다.
내게도 단체전에 나갈 기회는 종종 있었다. 지역구 대표로 출전하는 3.1절 검도대회라던가, 도장에 여성 관원들이 생기면 시합에 나갔다. 다만 3.1절 대회는 견우와 직녀가 애타게 만나는 칠월칠석처럼 1년에 한 번이었으며, 여성 관원들은 없을 때가 많았을 뿐이다. 사람이 노력한다 해도 혼자서는 불가능한 게 있다더니. 나에겐 단체전 시합 경험이 그런 건가 싶었다.
그러던 내가 단체전 1회전에서 시합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5kg이 넘는 호구를 입고 굳은 다리를 풀기 위해 폴짝폴짝 뛰면서 말이다. 검도의 신이 있다면 나의 소원을 이뤄준 것이지. 남자 선배들과 남자 단체전 멤버로 나간 건 예상 밖이지만.
기이한 구성으로 출전한 남자 장년부 단체전
매해 열리는 아마추어 검도대회. 그중 ‘한국사회인검도대회'는 가장 큰 대회이자 전국 규모 대회다. 여기에 흔치 않은 규정이 하나 있다. '혼성팀은 단체전 1팀으로 제한한다'는 내용. 남자 단체전의 인원이 부족할 때 여성 1인이 출전 가능하다. 실제로 이 규정을 활용한 팀을 잘 본 적은 없지만, 분명 있기 때문에 활용해보고 싶었다.
"저희 이번에 혼성으로 시합 나가봐요." 내 제안에 지도사범인 5단 순규 사범님이 호응했다. 호전적이고 빠른 칼을 구사하는 4단 재성선배, 그해 처음 도장을 옮겨와 꾸준히 연습량을 늘려가던 2단 진용선배, 도장의 터줏대감인 과묵한 4단 경진선배. 여기에 여자 4단인 나까지. 장년부 1명과 중년부 3명, 여성 1명. 최정예 영웅들의 팀 '어벤저스'보다 인간 한 명에 외계인 여성, 말하는 라쿤처럼 일관성 없는 멤버로 모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같았달까. 어떤 팀워크를 발휘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일단 시합을 나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좋았다. 단체전의 경험치를 쌓아볼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어차피 도장에서 남자 선배들이랑 대련하는걸. 져도 다 경험이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 향했다. 선배들과 도장에서부터 차로 이동, 호구를 챙겨들고 시합장 근처 주차장에 내리니 전국에서 온 각 도장의 승합차들이 빼곡히 주차돼 있었다. "머리! 손목! 허리!" 경기장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기본동작을 하는 시합 참가자들의 기합 소리도 생생히 들렸다. 살짝 들뜨기 시작했다. 평소에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연습했을 사람들. 1회전 통과 혹은 입상을 바라며 시합장에 모이는 거겠지.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전국에 모인 가운데, 총 12개로 구성된 드넓은 경기장 중 한 곳에서 우리 팀의 시합도 시작될 거였다.
들뜬 마음이 계속됐다면 어린애처럼 신나기만 했을텐데. 점점 마음 한켠에 긴장감이 들어찼다. 상대방의 칼 속도를 가늠해보려 장년부 시합을 구경했는데 웬걸. 선수들의 움직임과 타격에서 키와 힘, 스피드의 우세함이 피부에 와닿듯 확연히 느껴졌다. 아직 시합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얻어맞는 기분.
하긴. 남자 장년부가 검도의 꽃 같은 나이이긴 하다. 청년부 때보다 자세도 다듬어지고 경기 운영 감각도 나아진다. 연륜이 쌓이다 보니 상대의 공격 패턴을 읽어내는 감각도 발달한다. 그 상태에서 중년부보다 체력도 좋으니 상대 입장에서는 더욱 난감하다. 선수로서 최전성기의 연령대인 그들과 대결할 나. 아, 망했다.
선생님한테 먼저 손바닥 맞는 친구들을 바라보듯 살짝 안심하며 다른 시합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 점점 긴장감에 다리가 굳어갔다. 사기를 끌어올리자며 손바닥 하이파이브를 한 순규 사범님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긴장감 앞에 4단과 5단이 대동 단결하던 순간. 그 와중에 팀에서 첫 시합하면서 떨리는 기색이 없는 재성선배의 포커페이스는 경이적이었다. 저 선배처럼 나도 긴장감 앞에 개썅 마이웨이면 좋겠는데. 어느덧 우리 팀의 시합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첫 시합이 마지막이면 어떡해. 내가 단체전에서 제 역할을 못 하면 어떡해."
마음에서 여러 목소리가 불협화음을 내며 요동쳤다.
개인전과 팀 플레이의 차이
어느덧 선봉부터 중견까지의 선배들 시합이 마무리돼갔다. 곧 4번째 포지션을 맞은 내 차례였다. 숫자를 싫어하지만 계산이 필요했다. "어디 보자. 선봉이 2:1로 승, 2위는 1:1로 무승부, 중견은 0:2로 패했구나."
검도의 단체전은 각 팀에서 선봉-2위-중견-4위-주장 포지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1대 1로 승부한다. 각 시합의 승패를 따져보고, 승패가 동률일 경우 득점 수를 고려하는 방식이다. 앞선 결과와 점수를 계산해가며 시합해야 한다. 현재로썬 1승 1무 1패다. 내가 비기고 주장이 이기거나.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 최소 비겨야 했다. 무리해서 덤비다간 상대에게 틈을 내주는 꼴이니 조심해야지. 개인전과 팀 플레이는 시합의 전략이 명백히 다르다. 승리의 초점은 팀이지 내가 아니므로.
흰색 선으로 그려진 직사각형의 시합장. 그 앞에 서서 시합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운데를 향해 작게 두 걸음. 허리에 칼을 차고, 이번에는 크게 세 걸음. 가운데에 다다랐을 때 칼을 뽑아 상대를 겨눈 채 멈췄다. "시작!" 주임 심판의 외침이 시합의 진행을 알렸다. “이야아압!" 서로 기합소리를 내며 기선제압을 하는 전초전. 나도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꺄아아악!" 이게.. 기합인지 비명인지. 육식동물 앞에서 발버둥 치는 초식동물의 째지는 울음소리 같은 게 나왔다.
1점 실점. 섣불리 상대의 공격 거리 안에 들어가지 않으려 애썼는데 한 대 맞았다. 전체 러닝타임 3분 중 초반에 맞은 거니까. 앞으로 1점만 더. 몇 번 칼을 부딪히다가 상대가 머리 치기 공격을 시도하는 타이밍에 날아오는 죽도를 받아 상대의 오른 허리를 쳤다. 손에 시원한 타격감이 전해진 순간. 득점을 인정하는 주임심판의 심판기가 위로 번쩍 들렸다.
최종 스코어 2승 1무 1패
1점 만회했으니 제 역할을 해냈다 싶었는데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소처럼(실제로 소띠다) 뒷걸음치다가 뭔가 얻어걸리듯 물러나며 타격하는 퇴격 머리치기 공격이 들어갔다.
1점 실점에 2점 만회. 종료를 알리는 휘슬과 함께 시합이 끝났다. 어. 이겼다…? 칼을 꽂고 퇴장하는데 비명과 기합을 고루 섞어 쓴 탓에 목이 쉬었다. 내 다음의 마지막 순서인 주장 순규 사범님은 무승부. 우리 팀 최종 스코어는 2승 2무 1패였다. 1회전 통과다! 이긴 시합이었지만 철렁했던 순간이 있었다. 우리 팀 선수목록에 있는 나를 보고 상대편 도장 사람들이 이의 제기를 했던 것. 심판들도 해당 규정을 정확히 몰라 서로 묻거나 규정집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관련 규정 확인 후 시합이 재개됐다. 그 순간 외에는 순탄하게, 문제없이 끝났다.
이 팀원들로 얼마나 올라갔을까. 총 4회전을 치렀고 마지막 시합은 조 결승이었다. 전국에서 올라오는 각 지역의 도장들이 1회전만 뛰고 숱하게 발길을 돌리는 곳. 전국 단위 아마추어 대회에서 예상치 못한 경험치를 쌓았던 거다. 3승 1무. 시합에서의 내 개인 승률도 좋았다. 여자와 남자가 시합하면 체급과 힘 차이 등을 감안해 심판을 본다 했지. 그렇다면 얼마나 봐줬을까. 그 정도를 정확히 가늠할 순 없지만 스스로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부끄러운 순간이 왕왕 있었지만 뭔가 팀에서 역할을 해냈다는 사실, 시합을 거듭할 수록 선배들과 냈던 시너지가 실감났다.
여리기만 하지 않아!
시합할 때 무서움에 진저리 치며 소리를 꽥 지르기도 했다. 딸리는 힘으로 몸을 부딪히며 상대편과 칼의 중심을 잡기 위해 신경전도 벌였다. 평소에는 은연중에 얌전하고 예의있어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눌러놨던 내 모습. 시합장 안에서는 굳이 누를 필요 없다. 오히려 잘 꺼내 써야 한다. 언젠가 "상미씨는 시합장의 다른 언니들보다 여리고 착해서 아쉬워요"라고 말했던 선배님. 여린 건 맞지만 착하지만은 않아요. 욕심내고 소리지르며 이기는 순간도 있더라고요.
시합장 바깥에서 응원해준 타 도장의 인연들. 시합장과 도장 바깥의 수련을 통해 알게 된 이들의 응원 목소리가 두려워하는 마음에 등을 떠밀어준 것 같다. 시합 시간이 30초 남은 때부터 “20초!” “10초!”라고 큰 소리로 외치던 목소리들. 여기에 시합하는 순간에는 몰랐지만 시합 영상을 찍어준 애인이 알려준 작은 순간도 마음에 남았다. 상대의 손목 공격을 받아 머리치기로 점수 낼 때 “와~”하며 놀라워 한 시합운영 스텝이 있었다고. 그 말을 듣고 나중에 내 시합 영상에서 그 분의 목소리를 확인할 때 뿌듯했다.
그 분이 본 공격, 도장에서 수련할 때 내 손목을 줄곧 치던 선배와의 대련 덕에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건데. 몸에 박힐 정도로 연습한 것의 진가는 이럴 때 빛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