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대학 동아리의 늦깎이 신입생

핀치 타래검도운동여성서사

01. 대학 동아리의 늦깎이 신입생

살면서 처음 만난 내 모습들

이소리소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의 분위기를 내볼까. 취업난으로 동아리의 인기가 짜게 식었던, 그래도 여중생 시절에 본 시트콤 <논스톱>의 여운에 캠퍼스 낭만을 못 놓던 2005년. 그때의 이야기다. 


검도는 왜 때리는 부위를 말로 알려주는거지?(굳이)
검도는 왜 때리는 부위를 말로 알려주는거지?(굳이)


대부분의 1학년들은 대학의 낭만을 뒤로하고 공무원 수험서로 눈을 돌렸다. 내가 다니던 데는 서울 하위권 학교였어서 재수할 게 아니면 취업부터 챙겨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새학기를 맞아 학내 게시판에 여러 동아리의 손그림 포스터가 붙어 있었건만, 졸업을 앞둔 4학년마냥 마음이 폭삭 늙은 신입생들 눈에 그런 게 보일 리 만무했다. 그랬던 시절 2학년이던 나는 조기 취업준비의 대세를 거스르고 있었다. 남들보다 1년 늦게 동아리 입부원서를 낸 것이다. 운동에 대한 경험도 감각도 부족한데 거기에 사회성은 더더욱 부족한 상태로. 

왜 검도 동아리였을까. 죽도를 어깨에 매고 다니던 고등학교 만화부 선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대학 가면 같이 검도부에 가자"며 같은 대학을 지원했던 친구의 말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사실 만화 ‘바람의 검심' 속 십자 상처의 주인공에게도 검도 선택에 대한 약간의 지분이 있다). 친구는 그 대학에 붙고 나는 떨어져 지금의 대학에 입학했다. 굳이 맹세를 지킬 필요는 없지. 암. 그래도 말의 잔상은 남아 나를 어떤 선택으로 이끌었나 보다. 가입하러 동아리방으로 가는 길에 슬슬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남들 1학년 때 동아리 들어가는데 나만 2학년 때 시작해서 소외되면 어떡하지? 1학년들과 동아리 동기가 되는 건데 호칭 문제 하며(나중에 ‘누나'와 ‘언니'로 자연스레 정리됐다) 학교 동기인 2학년들과는 족보가 꼬이는데 괜찮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나 지금이나 쑥스러운데 할 거 다 하는 게 특기였어서, 그렇게 사학과 2학년생은 동아리방의 문을 열었다. 2020년인 지금까지 죽도를 휘두를 거라곤 전혀 생각 못한 채.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필요한 게 뭔지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감각이 있다고 생각한다. 배 고프면 밥을 찾아먹는다거나 고민이 있으면 해당 주제의 책을 찾는 식으로. 당시의 나도 자신에게 필요한 뭔가를 선택하는 본능이 발동했을 터다. 격한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예감 말이다. 우울감도 심했고 몸에 대한 자신도 없었고 친구 사귀는 것도 서툴렀다. 그대로 웅크리다가는 우울감이 지구의 멘틀을 뚫고 내핵까지 뻣칠 기세였다. 수많은 고민으로 헤집어지는 머릿속이 잠깐이라도 멈췄으면. 잡념을 버리려면 몸을 괴롭혀야지. 엄청난 땀과 근육통을 동반할 강한 움직임으로. 그 강도 높은 몸짓과의 인연이 검도다.

2학년으로 동아리 새내기가 된 나는 1학년인 동아리 동기들과 검도의 기본동작을 배워갔다. 첫 번째는 ‘보법'이라 불리는 발 동작. 무릎을 살짝 굽혀 오른발을 내밀고 왼발은 오른발과 주먹 하나 반 정도의 넓이로 벌린다. 그 다음 왼발 앞쪽을 오른발 뒤꿈치 정도 맞춰 뒤로 보낸다. 그 상태로 뒤에 있는 발이 몸을 앞으로 밀어주며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다. 일명 밀어걷기. 아이가 걷기부터 익히듯 2005년 검도 동아리에 들어온 ‘검도 어린이’는 걸음마인 밀어걷기를 시작했다.

“머리!” “손목!” “허리!" 기본 타격부위인 머리와 손목, 허리를 치는 동작을 동아리 선배(이자 학번 동기)의 구령에 맞춰 연습했다. 기본자세를 연습할 때마다 타격부위를 기합으로 외치는 게 신기했다. 어딜 때리는지 굳이 말하다니 참 친절하기도 하지.  공격에 대한 예고로 상대방에게 내 공격이 읽히는 문제가 기합이 아닌 몸의 속도와 자세에서 비롯된다는 건 좀더 나중에 알았다. 

검도에서의 체력소모는 그간 경험한 체육활동 중 가장 컸다. 고등학교 체육시간 중 가장 싫어하던 게 오래달리기였는데 그보다 훨씬 더 했다. 특히 끔찍했던 건 발을 앞뒤로 뛰면서 칼을 들었다 내리치는 ‘빠른머리' 동작. 선배들이 간혹 “빠른머리 치기 1000회 실시!”를 외치면 300개까지는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누가 자꾸 저승강을 건너오라 손짓하는 것 같고, 500개 이후부터는 내가 칼을 뻗는 게 아니라 칼이 내 팔을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손의 악력이 없어서 죽도를 쥔 왼손은 물집이 잡히고 터졌다 아물기를 반복했다. 손바닥이 흡사 너덜너덜해진 구두가죽 같았다. 손 모양이 미워진다고 싫어하는 여자애들도 있었고 동아리 남자 선배 중 한 명은 “그 손바닥 갖고 남자친구 사귀겠냐"고 한 마디했다. 

신기한 것은 그 고통이 생각만큼 싫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픈 만큼 내가 살아있는 것 같았다. 만화나 소설을 보면서 “저런 멋진 모험은 캐릭터들이나 하는 거지"하고 감정이입하며 나무늘보처럼 움직임에 인색했던 나다. 그런 내가 연습을 통해 숨이 헐떡일 만큼 몸을 움직이고 다쳐가며 많은 수련을 해내고 있었다. 

분명 운동신경은 없는데. 시합 감각도 없어서 동기들끼리 대련하면 잘 지는 쪽인데. 대학입시 때도 TV 있는 방에 들어가 엄마에겐 공부한다고 말하면서 드라마 보고 놀았는데.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수련하기 시작했던 내 모습은 뭐였을까. 평소에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다가도 죽도를 쥐면 크게 기합을 내지르는 나. 쫄보인 주제에 대학연맹전 시합에 참가해 매번 예선탈락하면서도 긴장감과 성취감, 좌절감 속에 울고 웃었던 나. 심지어 검도부원과 첫 연애(그 선배 말은 틀렸어)까지 시작해버린 나. 


그렇게 검도를 하면서 인생에서 ‘처음 만나는 나’들이 늘었다. 

낯설고 생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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