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는 게 귀찮다. 점심 메뉴를 고르거나 카페에서 음료를 고르는 것도. 뭘 고르는 과정에서 검증된 몇 가지 중 하나를 고르고 만다.
하지만 검도 수련에서면 얘기가 달라진다. 비정기적으로 장비병이 찾아온다. 관심 있는 건 도복, 그리고 호구 장비에서 가슴과 배 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장비에서 배를 감싸는 이 부분을 ‘도'라고 한다)이다. 물론 나도 안다. 수련의 성과는 패션과 상관 없다는 걸. 좋은 옷을 입는다고 상대를 공격하는 그날의 타격 강도가 더 세지는 건 아니니까.
입는 옷이 멋지면 마음도 가벼워지고 행동에서도 수련에 대한 진지함이 묻어나지 않을까. 좋은 옷을 입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니까.
때론 다른 걸 입고 싶어
검도에 입문했을 때 도복과 관련하여 선택의 진입장벽은 매우 낮았다. 대부분의 도복이 곤색인 데다가 디자인도 한결같아서다. 청바지와 검은 폴라티의 조합으로 고정된 스티브 잡스식 간결함을 무도 패션에 적용하면 이런걸까. 하늘거리는 재질, 혹은 다소 두꺼우면서도 부드러운 재질. 재질은 달라도 색과 디자인은 똑같다. 그 한결같음에 뭘 고를지 깊게 고민 안해도 된다는 점은 편하다.
편하지. 편하지만, 때로 다른 걸 입고 싶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바닐라라떼 외길인생을 걷다가도 때로는 깔끔한 풍미의 핸드드립이 떠오르고 만다. 떠오르면 마셔야(혹은 사야) 직성이 풀린다. 순간 못 사고 놓친 옷이 나중까지 계속 떠오르는 것처럼.
일단 상상해보자. 연한 하늘색 도복? 혹은 차분한 파스텔톤의 쑥색 도복도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본 만화에서 주인공들은 다양한 색의 도복을 소화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나 때 보던 ‘바람의 검심’ 주인공은 연한 자주빛 도복을 입는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보는 ‘귀멸의 칼날’ 주인공은 아예 체크무늬를 소화하던걸..
수련패션의 방랑 과정
욕구가 분명해지자 국내 검도용품점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etsy처럼 직접 패브릭을 공수해 검도복(해외 검색을 할 때는 kengo gi, 혹은 hakama라 검색하면 된다)을 제작하는 미국의 도복 판매사이트까지 가봤다.
겨우 찾아낸 옷은 진홍색 도복 바지. 벚꽃 같은 산뜻함과 선명한 컬러감에 나까지 그렇게 선명해질까 싶었다. 하지만 가격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다. 환율을 계산해보니 20만원. 그 돈이면 막도복 상하의 세트를 4개 정도 살 수 있었다. 차라리 흰색 도복을 사서 손수 염색하고 말지. 검색 키워드를 ‘도복 구매'에서 ‘도복 염색'으로 바꿨다. 검색 결과 화면에는 검도부터 주짓수에 이르기까지 도복을 염색하는 여러 방법이 나와 있었다.
그렇다면 색은 뭐가 좋을까. 분홍? 보라? 머릿속에서 컬러풀한 도복을 입고 수련하는 내 모습이 슬쩍 떠올랐다. 장비욕심을 부린다고 눈총 받을까. 실력에 상관 없이 입고 싶은 건 입어야지. 4단이니까 (속으로는 특이하다 할 수 있어도) 실력 대비 장비 욕심이 과하다는 말은 안 들을지 모른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다면. 그래, 만드는 거다. 이왕 더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배를 감싸는 호구의 도 부분 컬러로 민트색을 써보고 싶다. 팔로잉하는 일본의 검도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본 적 있다. 같이 수련하는 친구가 배에 치약을 바를 거냐고 놀렸지만 아무렴 어떤가. 민트색말고 누디한 계열의 핑크색 도도 봤는데. 글에서나마 갖고 싶은 장비에 대한 상상력을 한껏 펼쳐봤다(누구라도 팔아주시면 감사하겠다).
내어줄 준비가 됐다, 시간이던 지갑이던
좋아하는 마음이 임계점을 넘어서면 가진 걸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 솟아난다. 사람이나 동물이라면 시간과 마음을 내어줄 것이다. 좋아진 대상이 어떤 특정 분야라면? 좋아하는 마음의 문을 여는 프리패스는 바로 자주 열리는 지갑이다.
메모에 재미를 붙였다면 장만하는 문구류가 하나씩 늘어난다. 핫트랙스에서 산 마스킹테이프일 수도 있고 라미 만년필라던가 미도리 노트처럼 필기감을 높여줄 특정 브랜드의 물건일지 모른다. 요가에 진지해졌다면? 초반에는 취향을 모르니 남들이 많이 사입는 레깅스를 살 수 있다. 처음 장만한 요가복이 마음에 안 들지 모르지만 구매의 여정에 포기란 없다. 결국 취향에 맞는 디자인의 요가복은 언젠가 내 손에 들어온다.
이렇게 좋아하는 뭔가와 연결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관련된 물건을 곁에 두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 몸과 그 물건이 맞닿는 시간이 켜켜이 쌓이고, 그 과정에서 물건을 대하는 자기만의 몸짓이 생긴다. 다른 분야도 이럴진대 검도와 관련된 물건들은 내 곁에 좀더 오래 붙어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물건에 길들여지는 몸
일단 5kg에 달하는 호구는 입는 즉시 묵직한 존재감(정확히는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이 정도 무게의 장비를 몸에 착용한 채로 한 시간 가량 바삐 움직인다. 기본연습과 대련, 시합 등을 하다 보면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장비들은 연장된 신체마냥 몸과 닿아 있다.
거울 앞에서 자세를 잡을 때마다 죽도에 닿는 손 안쪽면이 어디인지, 죽도를 쥐는 팔목의 각도는 올바른지 점검한다. 사람이 물건을 길들이기도 하지만 물건도 사람을 길들인다. 수련이 깊어질수록 팔목의 각도는 죽도를 정확하게 다루는 방식으로 고정되기 시작한다.
칼을 잡고 휘두르는 몸의 자세들이 익숙해질수록, 죽도는 몸의 일부처럼 내가 주는 힘을 더 정확하게 칼 끝까지 전달하여 상대를 타격할 것이다. 물건과 내가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과정은 흡사 어린왕자와 여우 같다. 시간을 두고 길들이면서 대체 불가능해진달까. 손잡이가 두꺼운 죽도에 익숙해진 탓에 얇은 죽도는 그리 좋아하지 않게 됐다.
이렇게 오래 길들여지는 사랑(..?)에 대해 말했지만, 검도 장비에 대한 마음이 꼭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 것도 안다. 검도 도복을 보고 도장 등록을 했다는 초보자들도 있으니 말이다. 덕통사고랄까. 첫눈에 반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 않은가. 도복이 ‘평상복'의 의미로 정착한 지 오래인 입장에서는 동의할 수 없지만, 도복 특유의 염색과 천 재질이 사람들 눈에 띄나보다.
“와, 이 인디고 색상 완전 제 취향인데요?”
세탁할 도복을 들고 동네 슈퍼에 갔는데 계산대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전에 원단 일을 했다는 직원분은 내 한쪽 팔에 있던 도복을 보더니 재질과 색깔(살짝 바랜 듯 선명한 인디고 색상이 킬 포인트였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이 말을 들은 내 반응이 미지근했을 뿐이다. “방금까지 제 땀을 머금고 축 젖어있던 이 옷 말인가요...?”
절대로 싫어서 이렇게 말한 게 아니다.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