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난 별로인 사람에게 계속 맞고 있다

핀치 타래검도운동여성서사

10. 난 별로인 사람에게 계속 맞고 있다

오래, 많이 맞아본 사람이 잘 때리게 되기도..?

이소리소

명백한 실력 차에도 최선을 다해 대련연습하는 초보자. 꾸준한 연습 끝에 시합장에서 멋지게 한판 따내는 아마추어 선수. 젊은 수련자들에게 맞을 건 맞고 이끌어줄 건 이끌어주시는 6~7단 고단자 사범님들. 

꾸준히 좋은 태도를 지켜가는 사람들을 보면 놀랍다. 이들이 나와 직접 알거나 멀찍이 바라만 봤던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꾸준히 노력을 관철시키는 모습. 실력을 몸으로 한껏 표현하는 순간. 지기 싫은 마음을 내려놓고, 맞아야 할 때 아낌없이 맞는 태도. 상대를 주의깊게 관찰하고 개선점을 알려주는 섬세함까지. “사람은 때로 튼실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다." 책 <용의자 X의 헌신> 속 대사처럼, 건실한 수련생활을 해내는 모습 자체로 나를 응원해준다. 

반면 이런 사람들도 있다. 타격부위(머리-손목-허리-찌름)가 아닌 겨드랑이나 팔꿈치를 쳐서 상대를 다치게 하는, 그래놓고 사과 한 마디 없는 사람. 연습대련 후 한판시합을 했는데 본인이 져놓고 “그렇게 하면 안돼"라며 훈계하던 사람. 본인보다 저단자를 앞에 놓고 “너 이거 못하지?”라며 타격대마냥 상대를 일방적으로 치던 사람. 더 많이 노력하고 쑥쑥 성장하는 후배 모습에, 그 노력을 닮기보다 뒷담화를 선택한 사람까지. 이럴 때의 인류애란 신기루처럼 덧없다. 


상대를 주저 앉히는 사람들 

“튀는 놈이 있으면 훌쩍 두드러져 보이지. 자기가 얼마나 한심한지. 위에서 끌어내려 하고. 그게 안 된다는 걸 알면, 비웃고 깔보고 선을 그어 멀리하지. 그렇게 해서 다시, 자기에게 눈을 감지.” 

오랜 수련생활을 거치면서 내 머릿속에는 ‘안 좋은 사람' 폴더의 사람 리스트가 있다. 만화 <배가본드>의 대사를 보며 몇 사람들을 떠올렸다. 본인 수련보다 상대방을 주저 앉히는 데 탁월한 사람들 같으니. 하지만 속풀이는 만화 장면 몇 개를 SNS 에 올리는 데 그쳤다. 왜 올렸는지 글로 안 쓰고 딸랑 사진만. 호구쓰고 기합을 내지르다가도 죽도를 내려놓을 때의 나. 이렇게 소심하다. 

나보다 잘 하는 사람들을 깎아내리면 빠르게 안심될 지 모른다. 시샘하는 상대가 사라지면 속시원하겠지. 하지만 도장에서 배울 점 있는 사람들이 사라졌다면, 그때의 위안은 정말 좋은걸까. 마치 천적이 사라져 균형이 무너진 생태계처럼, 다른 사람을 사라지게 하고선 다른 갈등으로 본인이 사라지는 경우를 종종 봤다. 


노력은 참 번거로운 것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잠깐만. 잠시, 가슴에 손 좀 얹어보고.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을 뒤에서 터무니 없이 욕하거나(살짝 뭔가 흉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팔 힘으로 밀어 상대를 밀어뜨린 적은 없다. 다만 ‘재능 없고 못 하는 사람'이란 말로 스스로를 가두곤 했다. 내 경력의 절반쯤 되는 사람(내 경력이 기니까 상대는 한 5~6년차쯤 된다)에게 시합이나 대련에서 진 후 시무룩해질 때가 있었다. 

“어떻게 연습하신 거에요? 저는 야근 많고 연습량도 적고.. 몸도 뻣뻣해 실력이 잘 안 늘더라고요. 정말 부럽네요." 

연습이 끝난 후 샤워실에서 상대에게 연습방법을 묻기도 했지만 그걸 내 수련방식에 꾸준히 녹여내지 못 했다. 오늘은 기본동작 각각 20회씩 다 해야지! .. 라고 했다가 호구 쓰고 대련하는 주변 분위기에 말려 실패. 기술연습 하는 요일을 따로 정해봐야지!..라고 하다가 다 같이 대련만 하는 분위기에 묻혀 실패. 재능도 없으면서 왜 매번 노력하는 데까지 실패하는가! 천성이 빈둥빈둥이라 당연한 결론일지 모르겠다. 

노력은 이처럼 번거롭다. 그러니 따라잡지 못할 상대를 보고 “쟨 인사를 잘 안해서 건방져”라며 슬쩍 흉을 보는 게 편한 길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검도를 나이 먹을 때까지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피치 못한 사정으로 수련을 멈추는 순간 또한 올 것이다. 좋아하는 걸 제대로 질리도록 해도 언젠가는 끝난다. 남을 깎아내리거나 요행을 바라며 뒷걸음질치기에는 이 순간이 아까웠다. 내 수련의 길을 제대로, 건강한 방식으로 즐기고 싶었다. 그 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소심한 탓에 못하는 말을 대련을 통해 몸으로 해보고 싶었다. 

“상대를 굳이 깔아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높아질 수 있어.” 

“대련할 때 상대를 함부러 치다니, 나랑 대련할 때 용서하지 않겠어.”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를 외치던 소녀만화 속 주인공 같지만. 


맞고 또 맞다 보면 또한 때릴 수 있지 아니한가 

무찌르고 싶은 사람과의 실력 차가 클 때는 한동안 대련을 피했다. 상대를 함부로 치는 사람의 경우 자세가 엉망인 경우가 많은데, 그런 사람과 대련하면 나도 자세가 흐트러져 다 함께 엉망이 되고 만다. 

좀 자세가 안정됐다 싶을 때부터는 껄끄러운 상대를 피하지 않고 꾸준히 대련했다. 보통 나보다 빠르고 힘쎈 경우가 많아 계속 맞았지만. 자꾸 맞다 보니 어쩌다 맞는지(내가 쫄아서 멈칫하는 순간에 상대가 때림)를 알게 되고, 어디를 더 자주 맞는지 알게 되고(손목을 자주 노리시는 구나), 나중에는 상대의 공격을 되받아치는 순간(손목공격을 받아 머리를 쳐야겠다)이 생겼다. 때리고 싶을 때 때릴 수 있을 때까지 상대를 관찰하며 맞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었달까. 

많이 맞아본 사람이 때리기도 잘 한다고..?
많이 맞아본 사람이 때리기도 잘 한다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상대와 대등해지거나, 혹은 상대를 제압하는 순간이 생기면 기쁨이 컸다. 수련자들끼리 대련 후 점수내기 시합을 할 때가 있는데, 무찌르고 싶었던 상대와 점수내기 시합에서 4일 연속 이겨보았다. 약한 상대만 골라 상대하던, 나보다 힘쎄고 빠른 나이 많은 후배와 대련하면서 계속 팡팡 때리던 순간도 생기고 말이다. 

다만 서글픈 건 참 오래 걸렸다는 사실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본때를 보여줄 때까지, 자세를 가다듬고 기본 공격을 연습하며 필요한 응용동작을 익히는 데 걸린 시간이 길었다. 생초보였을 때 무찌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압도적인 실력 차 때문에 덤빌 엄두조차 못 내고 찌그러들었을 것 같다. 

굳이 수고롭게 견딘 이유는 뭐였을까. 세상에는 검도보다 재밌는 것도 많은데. 다만 잘 하는 일만큼이나 버틸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드물다는 걸 안다. 버팀의 과정에서 스스로가 맞다고 믿는 마음을 몸으로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도 뿌듯했다. 

정직하게 다듬은 몸과 마음의 품위. 그걸 오랜 시간 갈고닦은 데서 오는 힘은 분명 세니까. 투박하게 밀어붙이는 데서 오는, 느리고 힘센 변화를 경험했다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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