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상대 앞에서 안 쫄 수 있을까?
검도 도장에서 40~50대 남자선배들을 상대하다 보면 이런 마음이 계속 튀어나온다. 힘과 스피드, 거기에 노련함까지. 10년을 넘게 검도해온 나보다 두 배 가까이, 혹은 그 이상으로 오래 해온 사람들이다. 그들 앞에 서면 두터운 시멘트 벽에 던져지는 계란의 기분이 짐작 가능하다. 깨질 걸 알면서도 던져지는 계란과 뻔히 질 걸 알면서 달려드는 나.
남자랑 대련할 때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여자는 뭘 할 수 있을까? 상대가 몸을 부딪혀올 때는 온몸이 찌릿찌릿 아픈데 그냥 참아야 할까? 한 남자 사범님은 “남자는 양(陽)의 기술인 머리치기를 잘 하고 여자는 음(陰)의 기술인 손목이나 허리를 잘 친다”고 하던데 진짜일까? 선배들은 수많은 조언을 해준다. 하지만 나이와 성별, 신체 조건 등을 고려할 때 나와 비슷한 상태에서 고민하며 답을 찾아줄 사람이 없다. 숙련자들의 수많은 조언 중 나와 비슷한 조건의 사람이라면 어떤 걸 택할까. 항상 궁금했다. 정확한 성비는 모르겠지만 경험상 검도의 여성 비율은 무척 낮다.
예전 도장에는 여자분들이 좀 있었지만 지금 도장에서는 혼자 여자인 순간이 많다. 다른 여자가 있다 해도 한 두 명 정도. 물론 실력 차가 클 때는 여자가 남자를 이기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더딘 속도로 실력이 늘어가는 과정을 버텨야 한다. 압도적인 상대에게 매번 맞는 걸 알면서도 덤비는 거다. 막막함에 몸이 움츠러들 때가 많았다. 마음이 쪼그라든다 싶어 대련 도중 죽도를 내려놓고 손으로 가슴을 문지른 적도 있다. 그래도 10년 이상 검도를 해왔으니, 나름의 경험치를 기반으로 대처 방식을 생각해봤다.
먼저 내가 어느 순간에 맞는지 알아채기. 그간 제일 많이 한 게 ‘맞기’니까 이건 쉽다(과연)! 계속 상대를 관찰하다 보면 내가 어떤 순간에 맞는지 감이 잡힌다. 상대가 무서워 손을 들고 막으려다 손목을 맞거나, 상대가 공격할까봐 계속 몸의 한쪽 부분을 막다가 반대쪽을 맞는다거나. 이런 식으로 맞는 상황을 정리하다 보면 ‘이건 하지 말아야겠다'는 기준이 선다. 뭘 해야 할지 모를 때는 하면 안 되는 것부터 떠올렸다. 두 번째 대처방식은 선배들의 ‘힘과 스피드'에 '타이밍으로 대응하기'. 남자 선배들은 보통 공격의 횟수도 많고 속도도 빠르다. 하지만 첫 공격과 그 다음 공격의 간격을 잘 관찰하면 약간의 틈이 보인다. 이 때를 잡아 공격을 시도해보곤 했다. 성공의 빈도는 아주 조금씩, 천천히 늘어났고 성공할 때마다 그 대처방식이 몸에서 익기 시작했다.
죽도에 실리는 상대의 힘을 흘려 죽도를 제끼고 공격을 막기도 했다. 혹은 상대가 공격하기 위해 몸을 띄운 순간 살짝만 힘을 줘도 죽도가 중심을 벗어나 공격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검도에서 힘은 분명 중요하지만 ‘힘'만으로 하는 건 아니었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기, 혹은 몸의 힘을 적절한 타이밍에 활용해 상대를 제압하기. 남자보다 힘이 약한 여자들이 좀더 고민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공격 방식이다. 애초에 여자들이 잘 한다기 보다 신체 조건 안에서 거듭 고민하며 발달하는 부분이랄까. 남자 사범님이 여자와 남자가 잘 하는 기술에 차이가 있다고 말한 건, 다른 신체 조건 하에서 검도 실력을 쌓기 위해 고민한 과정이 다르기 때문일 거라 짐작해본다.
이제는 남자선배들과 대련할 때 예전만큼 쫄지 않는다. 물론 아예 안 쫄리고 안 맞는다는 건 아니다. 여전히 압도적인 힘에 눌리는 순간이 있다. 다만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는 과정에서 내가 해낼 수 있는 공격이 생겼고, 지금의 눈높이에서는 또 다른 해결 과제가 보인다. 딱 그만큼의 성장이다. 10년 넘게 검도를 했지만 여전히 더 성장할 부분이 느껴진다. 미지의 영역이 잔뜩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