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검도는 별로 안 맞는 거 같아. 아무리 해도 안 늘어." 1년 정도 도장을 다니다 발걸음이 뜸해진 여검우의 말이었다. 도장에서 ‘별이 바람에 스치우듯’ 사라지는 여검우들. 그들의 뒷편에서 울적하고 힘빠진 게 한두번번이 아니다. 헤어짐도 만남의 동전의 양면일 뿐. 이렇게 쿨하게 마음 먹으면 되는데 쉽지 않다. 가려면 나를 사뿐히 즈려밟고 가란 말이오 친구여. 더이상 도장에 나오진 않아도 정이 많이 들어 그 친구와 종종 문자를 주고 받았는데, 어느날의 대화 끝에 이런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검도하기 싫었던 시절
오래 검도를 해도 시합에서 1회전 탈락을 도맡아 하던 나. 관절이 녹슨 깡통로봇처럼 뻣뻣하게 움직이던 나. 특히 학습이 더딘 나로써는 ‘못하는 게 고정값’이었다. 이 친구는 혹시 학창시절부터 모범생이어서 ‘잘 해내는 게' 중요한 걸까. 잘 못해도 매일 수련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한걸. 이런 (꼰대같은) 생각을 가장 오랜 검도친구인 애인에게 말했다. 대답이 뜻밖이었다. “너도 똑같은 이유로 검도 그만두고 싶다 말한 적 있거든?!”
음..? 이게 무슨 말? 수련 빠지기 싫다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도장으로 달려가는 내가? 지금의 나만 본 도장 선배들이라면 상상도 못 할 텐데. 야근 티켓에 당첨돼도 기본이라도 연습하겠다며 도장 한켠에서 죽도를 휘둘렀던 난데. 그런 내가 검도를 그만두고 싶다 말했다니. 언제 그랬는지 영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제자리 걸음이다 싶어 느꼈던 무력감은 확실히 기억한다.
수련 도중 관장님의 지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을 때 호면을 쓴 상태로 죽도로 머리를 맞기도 했다. 자세를 교정해주던 중년의 남자선배는 바로 해내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던지 호통을 쳤다. 호면을 썼으니 누가 얼굴 못 보겠지. 눈물이 울컥 차올라서는 장비를 안 벗고 도장 한켠에 앉아 조용히 울곤 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을까. 그만해야 하는 게 아닐까. 땀에 절은 채 샤워실로 향하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암흑의 터널 구간
검도 수련자들은 실력의 성장곡선을 흔히 계단 모양으로 비유한다. 아무리 해도 느는 것 같지 않고 때로는 뒷걸음질 치는 것 같기도 한 암울한 구간. 그때의 실력 그래프는 밋밋한 일자이거나 혹은 바닥으로 달음질 칠 때도 있다. 어떤 운동이던 일정시간 이상의 연습량이 쌓여야 성장의 수직 곡선을 그리겠지만, 유달리 검도는 다른 종목 대비 터널 같은 암흑기가 길다. 일정 수준의 실력을 위해 갖춰야 할 자잘한 요소가 잔뜩 있어서다.
부드러운 하체 동작, 칼을 휘두르는 상체의 움직임, 죽도를 쥔 손의 조작, 상대의 공격을 읽는 눈, 공격의 적기를 파악하고 몸을 던지는 타이밍 등등.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더니 취미생활마저 디테일 없이는 쉬이 즐겁지 않다. 그래도 각각의 기초가 몸에 익은 상태에서 시원하게 성공하는 한방. 그 순간을 제대로 경험했다면 죽도를 쉬이 놓기 어렵다. 이렇게 길게 말해보지만 사실 “누군가를 친다는 것은 그냥 기분이 좋아요"라고 한 외국 펜싱선수의 말이 전부일 지 모른다. 인간의 본성이 꼭 선한 것에만 즐거움을 느끼는 건 아니니까.
더딘 성장 속도만큼이나 검도생활의 발목을 잡았던 건 도장에서의 인간관계였다. 퇴근 후 취미생활을 하러 가는 그곳도 하나의 사회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도 있지만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눈 앞에서 싸움이 일어나기도, 대놓고 싸우지는 않지만 상대 의견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그 자체로 어긋나기도 한다. 도장에서의 인간관계 중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은 이런 식이다. 왜 도장에서 다 함께 정해야 할 일들이 소수의 논의를 거쳐 일방적으로 통보되는지. 도장 내 소모임인 검우회의 회비를 안 냈을 뿐인데 왜 승단심사와 시합출전을 막는지.
별 말은 안 해도 싫은 티를 감추지 못하는 내 표정을 나도 안다. 도장 내에서 그런 룰을 만드는 사람들과 친해지지 못했다. 일하고 오면 머리치기 동작 연습하려고 죽도를 휘두룰 힘도 없다. 소중한 에너지를 그런 비합리적인 룰에 써야 하다니. 퇴근해서까지 관계의 부침을 겪는 게 슬플 노릇이었지만 현실이 그랬다.
아마 검도를 그만두고 싶다며 울먹울먹하던 순간은 그런 회사생활과 검도생활에서의 지침이 극에 달했을 때일 것이다. 내 검도의 암흑 구간에는 그런 위기의 순간들이 켜켜히 쌓여 있다.
마음에 마음이 포개어져서
지지부진했던 순간들을 한번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나의 끈기, 노력! 그런 나의 힘만으로 고비를 넘어 왔다 말할 순 없겠다. 내가 검도를 그만두고 싶어하거나 도장을 옮길 생각을 할 때마다 버텨보겠다는 나의 의지에 선배들의 마음 씀씀이가 포개졌다. “너는 운동에만 집중해"라고 마음을 다잡아준 선배. 야근과 도장에서의 기분 상한 일로 “운동 안 해"라고 울먹거릴 때 고기와 아이스크림을 준 애인. 마음이 심란했던 다른 순간에 음료수를 건네준 선배가 있었다. 검도를 꾸준히 하고 싶은 마음을 원래부터 내껀 줄 알았는데! 이런 감정조차 수많은 시행착오와 수많은 도움이 켜켜히 쌓인 결과임을 알아야겠다.
영화 비포 미드나잇에서 “난 널 패키지로 수용했어. 싸이코이자 똑순이!”라고 외친 남자 주인공 제시가 생각난다. 꾸준하긴 했으되 집중력과 흡수력, 사회성이 낮았던 나를 패키지로 받아준 애인. 음료수 한 잔 할 시간을 내어 심란한 마음을 들어준 선배들. 지금의 내 모습은 혈관 어딘가에 그들이 남긴 고기와 아이스크림, 음료수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검도의 권태기를 지나며 굳히게 된 생각들이 있다. 뭔가를 해내기 위해 완벽히 세팅된 환경은 없다는 것. 수련시간이 충분치 않을 수 있다. 활용 가능한 시간이 50분일 수도, 혹은 10분일 수도 있다. 무력감에 화를 내기보다는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작은 발걸음을 이어가는 게 낫다. 시도의 결과가 무의미할 만큼 작아도 상관 없다. 뭔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지키는 데에는 분명 도움이 된다. 더불어 옛날의 내가 울며 배웠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내가 아는 배움을 줄 수도 있지 모른다는 기대감 혹은 가능성 같은 것들이 있다. 결정적으로 그때의 나나 지금의 나 모두 앞으로 해낼 수 있는 것들이 여전히 많을 거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안 해도 안 늘어"라는 여검우의 스트레스를 이해 못 한 이유를 다시 생각해본다. 이미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됐기 때문이겠지. 올챙이적 생각을 못한 나란 개구리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