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갖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 이철 번역의 범우사 판 첫 문장이다. 1877년도에 발행된 소설이니 결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실례될 리 없을 터, 안나는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나는 이런 식의 죽음을 정신건강의학적으로 진단하기를 선호하는 편이다. 여성이 ‘두 번째 선택’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안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주체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여성을 착취, 학대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소설이 어디 한두...
발레를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면서도 포지션 이름을 알고 있고 기본적인 동작들을 곧잘 따라하는 친구가 있었다. 알고보니 어머니가 한국무용을 전공하셨다고 한다. 그녀는 “외할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어디 기생년들이나 추는 춤을 배우려고 하냐'고 야단을 쳐서 중간에 꿈을 포기하셨대요”라고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그림을 그린다면 환쟁이가 어쩌고, 바이올린을 배운다면 딴따라가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하는 노인들이 아직도 많이 살아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고 보면 음악이나 무용이나 그림이나, 오늘날의 예술은 역사상 가장 후한 대접을 받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39세의 발레리나 황혜민이 지난 11월 26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오네긴> 공연을 끝으로 무대를 떠난다는 소식에 일찌감치 그녀의 마지막 공연을 예매했다. 공연 날짜가 다가오자 일개 관객에 불과한 나까지 덩달아 마음이 복잡해졌다. 대체 어떤 기분일까? 10살 때 발레를 시작해 24세의 나이로 발레단에 입단, 그 후 39세까지 발레리나로 살다가 은퇴 무대에 오르는 사람의 마음이라니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이 죽일 놈의 발레 이제 다시는 안 해도 된다, 하면서 하하하 웃을까? 입사 소식보다 퇴사 소식에 더 큰 축하를 보내는 요즘 세태를 반영하면 그럴 법도 하다(실제로 황혜민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30년간 유지해온...
해외배송이 일반화되면서 남의 나라 온라인 쇼핑몰 구경할 일이 많아졌다. 미국이나 유럽의 의류 쇼핑몰들은 SPA브랜드라 할지라도 반드시 드레스 카테고리를 가지고 있어서, 한국에서는 아무 데도 입고 나가지 못할 것 같은 드레스들을 매 시즌 여러 벌씩 판매하고 있다. 저가 브랜드라면 가격이 비싸지도 않다. 예산 200달러 정도면 드레스부터 백, 구두까지 장만할 수 있다.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이런 걸 어디에 입고 가는 걸까? 의문은 2016년 가을에 풀렸다. 암스테르담으로 일주일간의 출장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마침 내가 암스테르담에 도착하는 날인 목요일 저녁에 네덜란드 국립 발레단의 시즌 갈라 쇼가 열린 것. 꽤 좋은 좌석을 골랐음에...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으로도 유명한 <백조의 호수>는 클래식 발레의 대명사이자 전세계인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발레 작품이라고 한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발레 공연도 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였다. 발레리나-발레리노 두 사람의 파 드 되(pas de deux, 2인무)를 3층에서 맨눈으로 내려다보는데, 발레리나를 땅에 매어놓고 있던 중력이 사라지니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이렇게 인기가 많은 작품이다보니 2차 창작의 소재가 될 기회도 많다. 나라 밖 사례로는 나탈리 포트만 주연의 영화 <블랙 스완>이 있고, 국내 사례로는 그룹 신화가 이 작품 2막의 주제음을 빌려 &...
공연예매사이트 I사가 반기별로 분석해 내놓는 소비 데이터에 의하면, 공연 티켓을 구매하는 고객의 약 70%가 여성이라고 한다. 인터넷 서점 Y사 역시 성별 통계 실태를 반기별로 발표하는데, 40대까지는 전 연령대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구매자 비중이 높은 경향이 3년 연속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의 이러한 문화 향유는 너무나 쉽게 '후려치기'의 대상이 된다. '여자들이 예술과 문학을 알아? 남자 아이돌 나오는 뮤지컬 보려고 그러는 거 아냐?' '애들 문제집 사느라고 인터넷 서점 가겠지, 여자들이 무슨 책을 읽어?' 하는 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