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소개팅하니 낯설면서도 새롭더라. 분위기도 나쁘지 않고, 밥도 맛있었는데 나랑은 안맞는 것 같아. 네가 나 생각해서 네 남자친구에게 물어봐서 해준 사람인데, 네 남자친구가 기분 나빠할 수도 있겠다. 네 남자친구 성격상 '안 맞는 이유'를 들으면 '이해도 다 못한 채' 화낼 것 같기도 하고 그 사람에게 다 전달할 것 같더라. 그리 그 사람 성격상 역시 ‘페미’였다며 똥차가 떠난 것 마냥 기뻐할 거 같더라구. 페미가 뭔지도 잘 모르더라.
그래도 소개시켜줘서 고마워. 또 한번 더 아직 그런 사람이 있구나를 깨달았어. 내가 전 남친이 ' 덜 한남'이래서 좋다고 했잖아. 그래서 너도 나름 애써서 괜찮다는 사람 찾았을꺼야. 그 사람은 ‘성격적으로’ 보면 매너도 있고 괜찮아 보여. ‘인성’ 자체가 나쁜 건 아니란거지.
그래도 나는 이 한국 세상에서 여성으로 불합리한 걸 너무 많이 겪었고, 크고 작은 조직에서 부당한 일이 있으면 그래도 바로 바로 ‘기분 나쁘다’고 말하는 편이야. 근데, 그사람은 회사에서 누군가에게 ‘오늘 00씨 예쁘네. 남자친구랑 데이트 가나봐’ 가 왜 기분 나쁜지 이해가 안되고,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 하더라고. 여자가 꾸미는 게 꼭 남자친구에게 보라고 꾸민 것도 아니고,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꾸밀 수도 있잖아. 그리고 남자친구를 만날지 여자친구를 만날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렇게 꾸미면서 ‘여성의 부당함’을 말하는게 이질적이라는 식으로 말하더라. 페미니스트가 아직 탈코르셋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목소리'는 충분히 낼 수 있잖아.
그래도 그 사람은 남자들 사이에선 꽤 신임을 받는 사람 같았어. 딱 남자들 사이에서. 근데, (절대 미련은 아니야) 그 사람을 보고 나서 내가 왜 전 남자친구랑 대화와 마음이 잘 통한 이유를 생각하게 됐어. 전 남자친구는 ‘그럴 수 있다.' 라는 태도였어. 전 남자친구도 남자로서 적지 않은 혜택을 받은 사람인데, 여성에겐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너무 많잖아. 그래서 그는 자신이 여성이 아니라서 잘못된 걸 알지만, 다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안타깝다고 말했어. 그래서 계속 페미니즘을 공부한 사람이었고, 내가 회사에서 들은 성희롱적 발언에 기분나쁘다 표현해도 쉽게 ‘그 사람이 잘못했네! 혹은 그거 가지고, 성희롱이라고 하긴 오버 아니야?’ 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어. 일단 내 감정에 대해 '그럴 수 있겠다'라고 말하고, 그게 왜 나쁜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어. 자신은 어찌됐든 남성이기에 100% 이해할 수는 없어서 더 '여성의 이야기'와 '여성의 힘'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이었어. 그 점을 보고 나도 더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싶었어.
그래서, 헤어지고 나서도 난 더 ‘목소리를 내는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 중이야. 그리고, 네 남자친구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하든 말든 상관없어. 근데, 네 남친도 ‘한남’이야. 착한 한남. 괜히 오지랖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네가 '사과하는 모습'이 난 너무 안타까웠어.
네 남자친구는 네가 하겠다는 걸 대신 해주겠다고 하고, 그게 남자라서 해야하는 당연함이라 생각하잖아. 네가 하겠다고 계속 막으면 기분 나빠해서 ‘네가 오히려 사과하는 모습’에 난 사실 좀 화가 나더라구. 그 사람이 하는 배려가 진짜 배려가 아니잖아. 그래서, 난 그 사람을 계속 사귀는 건 너의 선택이지만 네가 더이상 사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더 이상 참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소중한 네가 좋아.
기껏 소개팅 해줬는데 참 말이 많았지? 그래도 애써줘서 고마워. 나도, 더 나로서 살아보려고.
우리, 너, 어딘가 있을 타인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