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돈 갚아
주차장을 걸어가는 희수(전도연)의 뒷모습을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따라간다. 경마장 속 와글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희수가 병운(하정우) 앞에 나타난다.
희수와 병운은 1년 전 헤어진 연인이다. 희수는 병운을 찾아와 1년 전 빌린 ’350만원’을 갚으라고 한다. 병운은 희수에게 돈을 갚기 위해 같이 하루동안 돈을 빌리며 돌아다닌다. 둘의 하루를 통해 희수가 1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추측하게 된다.
희수는 기본적으로 병운에게 거리를 두고 있고 날이 서있다. 병운 뿐만 아니라 세상에게 날이 선 듯한 모습이다. 차에서 내릴 때마다 내비게이션을 떼서 숨기고, 주차비를 더 내더라도 절대 전남친의 말은 듣지 않는다. 병운의 지인들에게 ‘깎아내리는 말’들을 들어도 기분 나빠하되, 100% 다 말하진 못한다. 병운에게 오히려 분노를 표출한다. 병운은 희수의 예민한 행동에 ‘뭐 그런걸 신경써?’ 라는 식으로 ‘쿨하게’ 행동한다.
“내가 잡아먹니?”
흔한 한국드라마나 한국영화에서 꽤 자주 나왔던 대사다.
여자 주인공이 낯선 상대에 경계를 하면 ‘내가 잡아먹니?’와 같은 대사로 ‘상대방을 예민한 사람’으로 만드는 가스라이팅을 시전한다. 희수를 봐도 병운과 헤어진 후, 만난 사람에게 꽤 데인 것 같다. 희수의 전 사람은 경제력이 좋고 사회적 평판도 좋은 사람으로 예측된다. 그 사람과 결혼 후, 이혼하고 병운에게 나타났다. 정확히 ‘전 남편’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희수의 상처가 깊어진 원인으로 보인다. 희수 역시 원래 예민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도 (병운의 말로 보면 희수는 사실 예전에 그만큼 예민하진 않은걸로 보인다) 과거의 사랑과 다양한 관계로 상처를 받은 듯 한다.
지난 사랑에 잔뜩 겁을 먹은 너. 마음을 다 보여줬던 너와는 다르게 지난 사랑에 겁을 잔뜩 먹은 나는 뒷걸음질만 쳤다. 너는 다가오려 했지만 분명 언젠가 떠나갈 것이라 생각해 도망치기만 했다.
-‘짙은 _ 잘지내자, 우리 ' 중에서
이 노래 가사처럼, 희수는 지난 사랑에 잔뜩 겁을 먹어 더 경계태세를 보인 것 같다. <멋진 하루> 속 병운의 지인들 역시 처음보는 희수에게 ‘평가와 판단’을 아낌없이 퍼붓는다. 그럴수록 희수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벽을 세운다.
방어기제는 갈등과 불안에 대한 개인의 대응책이며, 개인의 자아방어기제는 일정한 유형을 보이며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K. S. Hwang 2006; 김선희, 김진선, 고선영 2018).
또한, 내면의 기저에 깔린 수치심 등은 정서표현을 억제하거나, 더욱 갈등회피적인 행동을 보이도록 만든다(이지연 2008; 유영권, 박경은 2018).
희수의 상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평가와 판단’들은 희수가 내면에 가진 감정을 억제하게 만들고 더 회피적인 행동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과거 연인이었던 병운은 오히려 희수에게 ‘너 왜그래?’ 가 아닌 ‘뭐 어때?’ 라는 식의 말로 희수의 경계를 천천히 무너뜨린다. 돈을 갚지 않고, 멋대로 사는 병운이 희수에게 ‘유익한’ 사람은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영어 제목인 <My Dear Enemy> 처럼 나의 적이지만 ‘친애하는’ 적이므로 상처를 받고 온 희수에게 약간의 치유가 됐을 수도 있다. 물론 과거 자신을 힘들게 했을 것으로 유추되는 ‘남성’으로부터 치유를 받는 게 마냥 좋아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희수에겐 ‘뭐 어때?’ 와 같은 정신이 필요한 시기다. 나도, 지난 사랑에 상처를 받은 익명의 누군가도 이런 정신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로할 충분한 시간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회복엔 분명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나를 자책할 필요도, 모질게 대할 필요도 없다. 지난 상처로 힘든 나날을 보낸 이가 있다면, 따뜻한 위로로 마음의 온도를 데울 수 있길 빈다.
참고문헌
김선희, 김진선, 고선영 (2018). 중년기 여성의 스트레스와 스트레스 대처방식의 관계에서 자아방어기제의 조절효과. 한국산학기술학회 논문지, 19(8), 524-534.
유영권, 박경은 (2018). 데이트폭력 피해여성의 상담경험에 대한 질적연구. 한국심리학회지, 30(4), 955-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