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게임을 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무색하게도 많은 조사에서 많은 여성들이 게임을 즐긴다는 통계를 찾을 수 있다. Newzoo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전세계 게임 이용자의 46%가 여성이다. 국내 역시 게임을 즐기는 여성의 비율은 꽤 높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7게임백서 자료에서는 여성의 65.5%가 게임을 한다고 응답했다. 남성의 경우 75.0%가 그렇다고 응답했으니, 결코 게임을 하는 여성의 비율이 낮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소비의 문제일까. 2018년 게임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PC게임 이용 및 게임 결제 여부나 콘솔 게임 타이틀 구매 평균 금액 같은 일부 항목에서는 여성이 높게 나타나기도 했다. 많은 항목에서 일반적으로 남성이 게임에 돈을 더 쓰는 것으로 조사되기는 하나 그 차이 역시 압도적으로 크지 않다.
그렇다면 대체 왜 여성은 게임에서 배제됐을까?
와, 여자 분이 게임도 하세요?
게임 정보를 찾다보면 가끔 게임과는 전혀 상관없는 웹사이트를 열게 될 때가 있다. 한국사회의 만악의 근원으로 꼽히는 일베도 그 중 하나다.
남초 사이트를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여자, 게임, 스포츠 이야기의 빈도가 얼마나 높은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사이트의 목적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이야깃거리다. 게임 웹사이트는 말할 것도 없다. 인벤, 루리웹과 같은 국내 최대 게임 웹사이트는 이미 잘 알려진 남초 커뮤니티다. 게임 웹진의 논조 역시 다르지 않다.
통계에 따르면 국내 여성의 반 이상이 게임을 즐긴다. PC게임 이용자의 33%, 모바일 게임 이용자의 절반, 콘솔 게임 이용자의 36%이 여성이다. 남성보다 적지만 남성이 절대다수라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큰 차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게임 커뮤니티는 대부분 남초인 걸까. 이 많은 여성들은 대체 어디에, 왜 숨어있을까.
쉿
미디어 이론 중 ‘침묵의 나선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다수와 부합하는 의견을 가진 이들은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반면 소수 의견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의견을 축소하거나 침묵하게 되는 경향을 말한다. 이는 사회 집단에서 고립되거나 배척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여성 게이머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가 그렇다. 남성적인 성향이 강한 게임 커뮤니티에서 여성들은 스스로를 소수로 여기며 작아진다. 이렇게 여성의 목소리가 사라진 게임 커뮤니티는 더욱 남초화 되고, 이는 다시 여성 게이머들을 주변화하는 분위기로 이어진다. 남성적 취미로 여겨지는 게임에서 여성은 존재를 드러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질적으로 여겨지며, 일부는 남성 권력에 대한 침입으로 취급받는다.
여기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국내 조사에 따르면 게임 이용자가 PC게임을 하는 이유에서 유독 성별 간 차이가 큰 항목이 있다. 여성의 경우 남성보다 ‘시간 때우기’ 용으로, 남성의 경우는 여성보다 ‘친구들과의 관계유지를 위함’이 높게 나타난다. 특히 관계 유지를 위함이라고 답한 남성은 28.5%로 여성(15.2%)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친구와 경쟁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14.5%로 여성(7.5%)의 두 배다.
또한 여성은 68.30%가 싱글플레이를, 54.50%가 온라인 게임을 즐기나 남성은 56.90%가 싱글플레이를, 71.60%가 온라인 게임을 즐긴다. 많은 남성들이 여성에 비해 온라인 게임을 주로 플레이한다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남성들은 교류를 위해 게임을 한다.
적어도 한국이라면 게임을 이야기하며 PC방을 빼놓을 수는 없다. PC방은 단순히 게임을 하는 공간만이 아니다. PC방은 친구들과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남성들에게, 특히 남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소통의 장이다. 실제로 PC방 이용 여부도 남성이 여성보다 두 배나 높다. 남성들이 PC방을 이용하는 이유 역시 게임을 하는 이유와 비슷하게 나타난다. 여성들이 PC방에서 게임을 하는 이유로 가장 많이 꼽은 것은 PC 성능(54.3%)이었는데, 남성의 경우 친구/동료와 어울리기 위해서라는 응답이 58.2%로 가장 높았다.
즉, 게임은 남성들에게 단순한 오락이 아니다. 게임은 남성의 커뮤니티를 유지하는 수단이자 커뮤니티 그 자체의 장인, ‘남성 공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남성 공간으로서의 게임
페미니스트 학자 이브 세지윅Eve Sedgwick은 저서 <Between Men>에서 '호모소셜'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남성은 남성 집단 내부에서 여성성을 배제하고 타자화함으로써 남성성을 인정받고 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성이란 말 그대로 보편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행위나 특징이다. 타자는 단순히 문자 그대로의 여성 집단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특히 남성 동성애자도 포함한다. 남성 동성애자들은 여성을 욕망하지 않아 남성적이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같은 남성을 욕망하기 때문에 이성애자 남성들은 자신이 성적 욕망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된다는 공포를 느낀다.
게임을 남성 공간으로 정의하게 되면 게임 내외적의 선정적 문법은 물론, 게임 커뮤니티에서 유독 백래시가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까지 설명할 수 있다. 백래시는 사회 정치적 변화에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는다고 느낀 이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는 현상으로, 주로 성별, 인종, 종교 등의 소수자 문제에서 발생한다.
한국에서 <클로저스> 사태를 시작으로 국내 게임업계에서 '메갈'을 가려내려는 마녀사냥이 성행하는 것처럼 서구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다. 게이머게이트다. 게이머게이트는 가장 대표적인 백래시 사례 중 하나다. 이는 2014년에 게임 커뮤니티와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진 광범위한 여성혐오 사건이다. 사건은 조이 퀸이라는 여성 게임 개발자가 만든 게임 <Depression Quest>이 발단이었다. 이 게임이 웹진에서 좋은 평가를 받자 남성 유저들이 반발했고, 퀸의 전 남자친구 애런 조니Eron Gjoni가 퀸에 대한 루머글을 게시했다. 퀸이 게임산업 종사자나 게임 저널리스트와 성관계를 가졌고 퀸의 게임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니의 말은 앞뒤가 안 맞는 구석이 있었으나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대체 누구의 정체성을
보호하는가
이들은 ‘게임 저널리즘을 되살리고 게이머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명목을 내세우며 #GamerGate 캠페인을 시작한다. 이는 캠페인이라기 보다는 조직적인 혐오 운동, 사이버 테러리즘에 가까웠다. 조이 퀸은 지속적인 살해 및 강간협박을 받고 한동안 자택을 떠나 숨어 살아야 했고, 페미니스트 문화 비평가 아니타 사키시안anita sarkeesian 역시 총기난사 협박을 받고 대학 강연을 취소당했다. 이 외에도 많은 여성 개발자 및 비평가들, 그리고 이들을 옹호하던 이들은 온라인상에서 신상정보가 공개되고 살해 협박을 받고 현직에서 물러났다.
이 사건은 그저 게임 커뮤니티 내에서만 일어난 소동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캐나다 총리 저스틴 트뤼도는 게이머게이트를 언급하며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선 안 될 일'이라며 비판했고 스티븐 콜베어 역시 자신의 토크쇼에서 아니타 사키시안을 초청해 게이머게이트를 비꼬았다.
그들이 주장했던 대로, 게이머게이터들은 게임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바로 여자들로부터. 여자들이 ‘남자들의 세상’인 게임에 섞여드는 것을 막고, 남성 공간으로서의 게임을 수호하려던 거다.
바이오웨어의 <드래곤 에이지> 개발팀의 수석작가 제니퍼 헤플러Jennifer Hepler 역시 호모소셜을 위협했다는 죄목으로 고난을 겪었다. 남성 게이머들은 <드래곤 에이지2>에서 남성 동료가 남성 주인공에게 추파를 받는 것을 못 견뎌했다. 이들은 어린 자녀를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메일을 보내고 헤플러의 외모를 조롱하는 등의 사이버 공격을 감행했다.
여기에 한 게이머가 바이오웨어 포럼에 올렸던 글을 발췌한다. 이 게시글은 현재 작성자에 의해 삭제됐으나, 표현 하나하나 주옥같지 않은 구석이 없는, '남성 게이머'의 정수가 담겨있는 글이다.
그니까, 바이오웨어는 <드래곤 에이지2>의 주 수용자층을 신경쓰지 못했다는 거지.
바로 '이성애자 남자 게이머' 말이야. 대부분의 RPG 게임 유저가 이성애자 남자라는 사실을 반박할 사람이 있나? 게임하는 여자들도 있긴 하지만, 걔네는 드래곤 에이지가 아니라 심즈 같은 걸 한다고. 바이오웨어는 우리들을 만족시키는 방향에 집중해야 해.
이성애자 남자 게이머라니! 옛날엔 그냥 '게임 팬'이라고만 하면 됐는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