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나는 포르노와 남성중심적 텍스트를 담은 문화 콘텐츠 중 무엇이 더 해로운가를 고민한 적이 있다.
적어도 포르노는 포르노라고 부른다. 포르노는 노골적인 성적 판타지를 담은 콘텐츠다. 포르노를 소비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 정의를 어느 정도 인지한 상태로 소비한다. 이것은 욕망 충족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문학은, 영화는, 게임은 어떨까. 그것들은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쉽게 수용되지 않는가. 남성중심적 서사는 많은 작품에 아주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침투해있다. 흔히 명작이라고 불리는 것들 역시 마찬가지다.
제62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수상작 <죽은 시인의 사회>는 많은 이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히는 영화다. 진정한 문학과의 만남을 가르치는 존 키팅과 학생들과의 감동적인 유대와는 별개로, 이 영화에선 여성을 희롱하는 농담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여성 캐릭터들은 서사를 주체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한다. 이 뿐인가. 10대 시절 국어 교과서를 떠올려보자. <운수좋은 날>과 같은 교과서 단골 문학에서 우리는 여성혐오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요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것들의 가치를 폄훼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는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남성중심적인 문법을 당연하다는 듯이 체화하기 쉬운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Mario! You are my knight in shining armor!”
게임의 여성혐오 텍스트를 논할 때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건 닌텐도 사의 <슈퍼마리오> 시리즈다. 마리오는 피치 공주를 마왕의 손에서 구출해 왕국을 구하고자 여정을 떠난다. 붙잡힌 피치 공주와 그런 공주를 구하는 마리오의 관계는 마리오 시리즈의 상징이다. 피치 공주는 트로피로서, 그리고 붙잡힌 여성 캐릭터의 클리셰라고 할 수 있다. <젤다의 전설>의 젤다 공주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와 같은 캐릭터를 가리키는 ‘위기에 빠진 여성Damsel in Distress’이라는 용어가 따로 존재할 정도다.
이와 유사하게, ‘냉장고 속 여성Women in refrigerator’은 남성 주인공의 각성을 위해 희생되는 여성 캐릭터를 의미한다. <디스아너드>의 재서민 여제, <갓 오브 워>의 리산드라, <프토토타입2>의 콜레트 등이 그렇다. 이들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남자 주인공이 복수심에 불타게 만들거나 굳은 의지를 다지게 한다. 주조연 급도 못 되고 엑스트라처럼 이용되는 '냉장고 속 여성'들은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잦다. 이들은 하나의 주체적이고 독립된 인간이 아닌, 남성의 동기부여를 위해 존재하는 장치로 이용되고 이야기 뒤로 사라진다.
룸싸롱 문화,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더라
적어도 죽임당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 주인공에게 영향이라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괜찮은 처지일지도 모르겠다. 게임에서 나타나는 대부분의 여성 캐릭터들은 이조차도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게임의 서사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고 정말로 사물처럼, 유흥거리처럼 그곳에 배치된다.
매춘부 여성은 지겨울 정도로 흔하다. 나를 다시 ‘겜덕’의 길로 끌어들인 <폴아웃> 시리즈 역시 그렇다. <폴아웃>에서는 여관, 카지노, 길거리 등 온갖 장소에서 매춘부 여성을 마주할 수 있다. 특히 라스베가스 지역을 배경으로 한 <폴아웃:뉴베가스>는 게임 내에 카지노가 많아서 더욱 노골적이다. 일부 매춘부 NPC는 돈을 지불하면 ‘하룻밤 서비스’를 제공한다. 호기심에 수락했다가 스피커에서 튀어나오는 여자 신음소리에 기겁하고 볼륨을 줄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남자 매춘부도 존재는 하지만 성관계 상호작용이 가능한 매춘부는 여성 NPC 뿐이며 숫자도 여성 매춘부가 압도적으로 많다.
<디스아너드>는 초반에 ‘황금 고양이’라는 이름의 매음굴에 잠입하는 미션이 주어진다. 플레이어는 그곳의 매춘부를 해치거나 겁을 줄 수도 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는 곳곳에서 매춘부 무리를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은 이들에게 돈을 지불해 경비병들의 주위를 흐트러뜨린다. <매스 이펙트> 시리즈에서는 폴댄스를 추는 아사리 매춘부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도 ‘성애봉사용’ 안드로이드로 구성된 매음굴이 등장한다. <GTA5>에서는 매춘부를 플레이어의 아지트에 불러다가 스트립쇼를 시킬 수 있다. 시점을 1인칭으로 전환하면 폴리곤 살덩이가 모니터를 가득 메우는 당황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다.
매춘부처럼 흔한 유형의 여성 캐릭터가 하나 더 있다. 학대당하는 여성 캐릭터다. 이들은 매춘부 여성과 쓰임이 크게 다르지 않다. 여성을 향한 가학 욕망은 성적 욕망과 쉽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GTA5>에서는 미션 도중 성폭행 당할 위기에 처한 여성을 목격하고 이를 외면하거나 구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어쌔신 크리드>에서도 매춘부 여성을 살해하는 남자를 쫓는 과정에서 도주하는 남자는 길거리의 창녀들을 인질로 잡고 살해하는 것을 반복한다. <와치독스>에서는 인신매매 피해자 여성들이 경매장에서 거래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my body, but THEIR choice
게임 속 여성들은 자신만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모습조차 갖지 못한다. 게임 속 대부분의 여성 캐릭터들은 성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매혹적인 외양을 가진다. 서사 내 캐릭터의 비중이 높을수록 그 획일성은 커진다.
남성 캐릭터는 인종(물론 대부분이 백인이라는 점은 지적되고 있다), 나이, 체형 등 많은 조건에 있어서 다양한 외형으로 그려진다. 반면 여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호리호리한 체형에 밝은 피부색,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젊은 여성이다. 이에 벗어나는 외형의 캐릭터는 드물며, 간혹 존재한들 배경처럼 지나가는 NPC일 때나 가능하다.
특히 가상의 종족에 젠더를 부여했을 때 그 기괴함이 극대화된다. 판타지 세계관에서 가장 흔한 종류의 이종족을 생각해보자. 주로 남성 거인족은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과 선이 굵은 얼굴로, 남성 드워프는 땅달막하고 주먹코에 풍성한 수염으로 묘사된다. 남성 수인은 동물적 특징이 과장된 모습이다.
<리니지2>에는 인간, 엘프, 오크, 드워프 등 다양한 종족이 등장한다. 그 중 드워프는 남성의 경우 드워프라고 했을 때 흔히 떠올리는 외향이지만 여성 드워프는 귀여운 어린아이 같은, 일명 ‘로리’ 속성이다. <아키에이지>에서도 워본족 남성과 드워프족 남성은 그 종족적 특징이 개성있게 드러나나 여성은 인간 여성의 외향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새다.
<파이널 판타지14> 역시 최근 이런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여성만 존재하는 비에라 족과 남성만 존재하는 로스갈 족은 이 차이가 노골적이다. 비에라 족은 복실한 토끼 귀가 달린 미형의 인간 여성 모습인 반면 로스갈 족은 고양이과 맹수의 얼굴에 긴 손톱, 근육질의 두터운 몸집이다.
외형 뿐 아니라 움직임 역시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어쌔신 크리드>의 제작진은 이전에 여성 캐릭터를 추가하기 위해 드는 애니메이션 작업에 대해 토로했다가 비난을 받은 적 있다. 이들이 자신들의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을 버린다면 작업이 훨씬 원활해질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여성들이 남성들과 눈에 띄게 다르게 걷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은 엉덩이를 흔들고 다리를 교차하며 걷는 캣워킹을 구사한다.
예시로 <니어:오토마타>의 2B는 걸을 때 엉덩이를 부드럽게 살랑이는데, 이 모습이 매혹적인 것으로 유명해 유튜브에는 2B가 걷는 뒷모습을 집요하게 잡아낸 영상들이 올라와있다. <메탈기어 솔리드4>에 등장하는 B&B 부대는 여성 넷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싸우다보면 강화복 대신 바디수트만 입고 유혹적인 걸음걸이로 플레이어에게 다가온다.
위도우메이커 역시 2B처럼 걷는 뒷모습만을 모아둔 영상이 따로 있을 정도다. <오버워치>의 저격수 영웅 캐릭터 위도우메이커는 ‘엉덩이’로 유명한데, 몸매를 드러낸 바디수트에 기본 포즈가 허리를 한껏 휘어서 엉덩이를 강조하는 자세가 디폴트라서 그렇다. 위도우메이커는 뛸 때나 걸을 때, 앉아서 엄폐 중일 때도 엉덩이를 내민 상태를 유지한다. 당시 오버워치를 경쟁 게임으로 삼던(물론 이제는 역사의 뒷길로 사라진) <서든어택2>의 시네마틱 트레일러에 등장한 간판 캐릭터 미야 역시 비슷한 지적이 있었다. 미야는 총격전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에, 과장되게 엉덩이를 씰룩이며 걷는 모습이 강조되어 기괴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남성됨에 익숙한 여성들
게임은 다른 문화 콘텐츠와 비교해 더 깊이 몰입할 수 있다는 차별성을 갖는다. 기본적으로 게임 내의 이야기나 상황에 플레이어 자신이 통제권을 가진다는 점에서 게임 속 인물의 도전은 나의 도전이 되고 게임 속 인물의 성취는 내가 얻어낸 성취가 된다. 블랙팬서가 흑인들에게, 캡틴 마블이나 원더우먼 주연 영화의 등장이 여성들에게 크게 각광받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와 비슷한 주인공에 자신을 투영하며 기존에 몰랐던 새로운 기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여성들이 남성 주연에게 이입하는 것에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음에도 불구, 남성은 여성 주연 작품에 “인물에게 공감할 수 없다”고 혹평한다. 이는 남성들이 여성 캐릭터를 '캐릭터'로 보지 않고 '여성'으로 인식해 괴리를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성중심적인 콘텐츠에 익숙해져 여성 인물에 이입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도 있을지도 모른다.
플레이어블(playable) 캐릭터,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주인공 캐릭터는 대부분 남성이다. 얼마나 남성 위주냐고?
E3는 미국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 쇼다. 그 중 2015 E3는 파격적인 라인업으로 역대 최고의 E3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과연 여성들에게도 ‘최고’의 게임 행사였을까?
대중문화 비평 웹사이트 페미니스트 프리퀀시Feminist Frequency의 분석에 따르면 2015 E3에서 공개된 76개의 게임 타이틀 중 여성 단독 주인공 게임은 7개로 전체의 9%만을 차지했다. 남성 단독 주인공 게임은 24개로 전체의 32%인데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유저가 성별을 선택할 수 있는 게임은 35개(46%)였으나, 이 중 <디스아너드2>만이 여성 주인공을 강조했고 나머지 34개는 남성 캐릭터를 내세워 홍보했다.
지난 6월에 열린 2019 E3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여성 캐릭터를 중심에 세운 게임은 약 5%뿐이다. 남성 캐릭터의 경우도 22%로 줄었는데, 대신 성별을 선택할 수 있는 게임이 65%로 매우 높다. 성별을 선택하는 게임의 비율은 매해 늘어나는 추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게임 홍보는 남성 캐릭터 위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솔직히, 여태까지 남성 캐릭터만이 독식하던 주인공 자리를 여성 캐릭터가 좀 해먹을 순 없는 걸까?)
젠더적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 캐릭터라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 대표적인 예로 남코 사의 <팩맨>이 있다. 노란 원모양의 팩맨은 게임 산업의 상징적인 아이콘이다. 팩맨의 여자 친구라는 설정의 '미즈 팩맨'은 팩맨에 빨간 입술과 속눈썹, 리본을 단 모습이다. 마치 미키마우스와 도날드 덕에 리본과 속눈썹을 달아서 미니마우스와 데이지 덕을 만든 것처럼. 또한 팩맨을 쫓는 유령 중 하나인 ‘핑키’는 네 유령 중 유일한 여성 캐릭터다. 그리고 분홍색이다, 전형적이게도. <버블보블>에서도 법과 봅의 여자친구인 베티와 패티는 법과 봅의 드래곤 외형에 리본과 홍조를 추가한 것으로 여성 캐릭터가 되었다.
다만 위의 경우엔 그래픽 기술이 좋지 않았던 때에 나온 게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해명도 있다. 한정된 기술 내에서 상세한 디테일을 넣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애초에 기본 캐릭터가 남성일 이유가 있을까? 굳이 여성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옵션’을 만든다는 것은 인물의 기본형을 남성으로, 여성은 거기서 ‘여성적 특징’이 존재해야 여성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드러내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