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곳' 하나가 중심에 놓인 1시간의 대화

핀치 타래인지학병원베를린

'아픈 곳' 하나가 중심에 놓인 1시간의 대화

베를린 인지학 병원 방문기(3)

오인제오

40분이나 기다렸지만, 의사가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하니 마음이 그냥 풀렸다. 어떤 사람이 내게 다가오면서 인사를 할 때, '기운' 이라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프라우 베커가 인사를 하는 순간 나는 그 '기운'을 잠시 느낄 수 있었는데, 그건 한 없는 '따뜻함과, 열려 있음'의 기운이었다. 

"보통은 악수를 하는데, 요즘은 코로나로 악수를 권하지 않으니 아쉽네요. 이쪽 진료실로 갑시다."

프라우 베커는 양팔을 벌리고 자신의 진료실로 안내를 해준다. 여기는 종합 병원이다. 진료실과 대기실 사이에 약간의 거리가 있다. 이 의사는 나를 데리러 여기까지 왔다. 나보다 앞서 걸으며 자신의 진료실로 향하는 길에도 한 팔을 뻗으며, 나에게 길을 안내해주고 있는 이 의사. 내 몸에 대한 전문가 길잡이로 함께 해도 괜찮지 않을까. 희미한 신뢰가 뒤따른다. 

병원 대기실에서 본 잡지,  아름다운 빨강과 파랑의 만남.
병원 대기실에서 본 잡지, 아름다운 빨강과 파랑의 만남.



진료실로 들어가자 자리를 권하며, 나의 눈을 바라본다. 나도 그 때서야 프라우 베커를 처음으로 바라 보았다. 아는 언니같은 이 편한 느낌 뭐지?

나는 독일에서 종합병원 진료는 처음이라, 다른 종합 병원하고 비교할 수는 없다. 이 병원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1차 병원에 가면 처음 진료할 때 간호사가 종이를 주고, 체중, 신장, 가지고 있는 지병, 생리주기, 출산 유무(출산시 자연분만인지), 임신 중단 경험 유무, 복용하는 약, 알레르기 등이 있는지 체크해야하는데, 여기는 그런 게 없었다. 이러한 정보가 1차 병원으로부터 다 전달이 되는 건가? 그 정도로 독일이 디지털화 되어 있다고? 혹시 비서가 종이 주는 걸 잊어버렸나? 반신반의, 자문자답 하는 사이 드디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연극체로 가보자. 

제목: 진료의 정석

장소: 인지학 병원 프라우 베커 진료실 안  

등장인물: 환자(Y), 의사(B)

B:  앉으세요. 비서에게 제출해 준 1차 의사 진단서와 초음파 사진 잘 봤습니다. (종이를 보여주며) 그리고 여기, 당신이 보낸 이메일도 잘 읽어보았어요."

Y:   (놀라며) 오, 그것도 읽었어요? Super!

B:   환자가 왜 우리에게까지 오게 되는지, 그 과정을 아는 것은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당신이 쓴 이 이메일의 내용을 공감해요. 맞다고 생각하고요.  수술은 최후의 수단이지요.(Y, 깊게 감동 한다.) (사이) 수술을 하고 싶지 않으신거죠?

Y:   (감동에 젖어 있다가 수술 여부를 본인에게 물어보니 당황한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것에 대해 상담을 받기 위해서 이곳에 온 거에요.  

잠시간의 침묵, 그 사이 Y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하다. 

Y는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수술 받을지 말지 결정하려고 여기 온 건데, 왜 나한테 물어보세요, 의사님이 결정해주셔야죠.  내가 여기서 하겠다고 하면, 그냥 수술 날짜 잡고 집에 가라고 할 것 같고, 안 하겠다고 하면, 그럼 다음 검사를 위해 날짜를 잡고 집에 가라고 할 것 같고, 뭐라고 해야하나. 

B:  (컴퓨터에 입력된 Y의 정보를 확인하다가) 오, 주소를 보니까 꽤 먼 곳에 사시네요. 여기까지 오는데 괜찮았어요?

Y: (동문서답) 네, 멀긴하죠. 근데 제가 예전에 한국에서 발도르프  학교 교사를 해서, 인지학에 대한 신뢰가 있어요. 그래서 꼭 인지학 병원에 와서 진료를 받고 싶었어요. 

B: (완전 놀라며) 오, Super! Wunderbar! 한국에도 발도르프 학교가 있구나. (갑자기 수다쟁이 모드로 변신) 맞아, 작년에 발도르프 교육 100주년 행사 했을 때, 그런 영상을 봤어요. 이제는 세계 전역에 발도르프 교육이 있잖아요. 아시아, 유럽, 북미, 어딜 가나! 우리가 이렇게 하나의 뜻을 가지고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너무 좋지 않나요? 발도르프 교사였구나. 그럼, 아이들은 발도르프 유치원에 다녀요?

발도르프 글자 하나로 서로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B와 Y. 하지만 그들 앞에 놓인 '독일 유치원 자리 찾기 헬' 이라는 현실. 

Y: (안타까워하며) 아니요. 발도르프 유치원에 자리가 없었어요. 일반 유치원 자리도 원서 20개나 쓰고 겨우 찾았는 걸요. 아시잖아요. 유치원 자리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B: 맞아요. 엄청 힘들죠. 잘했어요. 애들은 어딜 다니든지 잘 클 거에요. (사이) 자,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Y: 일단 요즘 통증이 심해졌고, 배 아래쪽이 굉장히 묵직해져서 앉아 있는 것이 많이 불편해요. 전에는 못 느꼈는데 최근 한 달 사이 많이 심해졌어요. 고관절 통증도 같이 있고요. 

B: 그래서 환자 분은 이걸 제거하는 수술을 원하고 있나요?

침묵

B: 수술이 필요한지 하는 의사의 의학적 판단도 중요하지만, 수술을 원하고 있는가 하는 환자의 마음도 아주 중요해요. 

Y: 이게 작아질 가능성이 있을까요? 제가 잘 관리하고, 운동을 하거나 생활 습관을 바꾸거나 하면요. 

B: 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현재 환자가 느껴질 정도로 그 크기가  커졌다면, 그 가능성이 상당히 낮아지죠. 정확한 정보들을 통해 결정해야하니까. 저쪽 진료대로 누워봅시다. 

Y는 가서 잠바를 벗고, 가방이나 다른 물건들도 모두 내려놓고, 진료대로 가서 눕는다. 

B: 자, 몸의 힘을 최대한 빼세요. 물론 힘을 빼는 게 어렵다는 걸 알아요. 가능한 만큼 최대한 긴장을 푸시고요.  편하게 누우세요. (손으로 Y의 배와 아픈 부위를 조심스럽게 누른다.) 

Y는 몹시 당황. 손으로 진료를 한다고? 1차 병원 두 군데에서, 그리고 심지어 한국에서도 손으로 진료를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바로 초음파기계로 직행해서, 시커먼 사진을 보며 '이게 혹이다.' 라고 의사가 말하면, Y는 시커멓기만 하지 저게 혹일까, 그냥 초음파라서 시커멓게 보이는 거 아닐까 의심했지만, 늘 의사에게 '아, 그렇군요.'라고 대답해왔었다. 

B: (손으로 계속해서 진단을 하며) 음,  이 혹이 여기 허리 뒤쪽에 가까워요. 그래서 허리쪽이 많이 아팠을 거 같은데요? (계속 해서 조심스레 눌러보며) 그리고 장까지 좀 압박을 받았을 거 같아요. 혹시 설사가 잦은 편 아닌가요? 

Y: (대박 놀라며) 맞아요! 아, 그게 이거 때문이었구나. 

Y는 평소 커피를 많이 마셔서 인가, 매운 것을 많이 먹어서 인가, 아니면 그냥 뭔가 위장이 안 좋은 건가 하는 이런 저런 생각은 했지만, 이것 때문일 줄은 정말 몰랐다. 새삼 점쟁이와 같은 의사의 진단에 깜놀. 그리고 이 혹이 허리쪽 가까이 있다는 말, 그것 때문에 허리의 통증이 있을 것이라는 말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B: 그리고 1차 병원 의사가  초음파 상으로 약 5.5cm 정도라고  얘기했는데, 손으로 이 혹을 만져보아도 그 정도 크기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과학적 기계인 초음파의 진단을,  의사의 손이 확인하고 맞다고 컨펌을 내리는 이 상황. 익숙친 않지만 Y는 흥미롭다. 

B: 이제 환자가 볼 수 있도록 초음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손으로 진단할 수 없는 뱃속의 다른 상황에 대해서도 한번 살펴볼거에요. 

B, 초음파 기계를 몸에 댄다. 

B: 자, 이렇게  제가 허리쪽 가까이로 댈 거에요. 바로 보이죠? 위치를 정확하게 먼저 알았기 때문이에요. 

Y는 그동안 1차 병원에서, '이 혹이 어디 있을까 찾으며' 초음파 기계로 여기저기 몸을 휘젓는 의사들의 행동이 늘 불편하다고 여겨 왔었는데, 정확하게 위치를 잡아내는 B의 초음파 진단에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덩달아 몸의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 졌다. 

B: 이제 지금 혹이 있는 이 부분 뿐만  아니라 혹시 다른 곳에 문제가 있는지도 한번 보겠습니다. (초음파 기계를 조심스레 움직이며) 여기가 **부위이고요. 여기는 아주 건강해요. 문제가 없고요. 혹이 있는 사람들은 여기에 문제가 함께 있는 경우가 있어서 같이 살펴봐야 하는데, 다행히 당신은 아주 건강합니다. 

이어서 B는 혹이 있는 부분 근처로 초음파 도구를 조심스레 옮겨 가며, 하나하나 자세하게 Y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 정도로 자세히 혹 근처 몸의 상황에 대해서 듣기는 처음이다. Y는 이제서야 자신의 대기 시간이 왜 이렇게 길어졌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앞선 환자와도 이런 시간을 가졌으리라. 긴 대화가 오갔다. 

B: 이제 크기를 재볼게요. 음, 1차 병원에 다녀오는 동안 보다 또 크기가 커져 있네요. 계속해서 통증이 더해질 것 같아요. 참을만 한가요?

Y: 예, 아직은 일상생활에 불편함은 없어요. 다만 오래 앉아 있기가 불편해요. 

B: 지금 진행 상황으로 봐서는 계속해서 더욱 불편해질 겁니다. 작아지는 단계는 지난 것 같고요.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수술을 해야하는 시간이 올 거에요. 이것은 저의 권유이고요. 생명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환자가 원하는 때에 수술 시기를 결정할 수 있어요.  불편하지만 몸에 가지고 살 수도 있고요. 그렇게 되면 이걸 질병이라고 부르지는 않아요. 그저 불편할 뿐인거죠. 다만 이 불편함을 잘 관찰하면서 살아야해요. 혹시나 이 녀석을 모른 척하고 지내다가 크기가 커져서 내부 파열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경우는 응급 수술이 필요해요. 하지만 아주 드문 경우이죠. 의사가 말해주는 것은 의학적인 조언이고요. 환자 분의 생활에 관련한 다양한 현재 상황, 환자 분이 현재 느끼는 불편함과 통증의 정도를 고려하시면 됩니다. 


대화를 나누고 보니 어느 덧 1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중간 중간 대화 사이의 쉼이 있었고, 내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고려해주는 시간이 있었다. 중간 중간 자연스레 나의  체중, 신장, 가지고 있는 지병, 생리주기, 출산 유무(출산시 자연분만인지), 임신 중단 경험 유무, 복용하는 약, 알레르기 등이 있는지에 대해 대화를 통해 이끌어내었다. 

이쯤되면 인지학 의사는 의사이기도 하지만 대화 전문가,  마음 사로잡기 전문가라고나 할까? 

4월 초 복강경 수술을 하기로 '내가' 결정하였다. 코로나 상황 때문에 이 수술은 미뤄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신뢰할만한 의사를 만난 덕에 기쁨이 더욱 크다. 그리고 내 몸 속에 있는 이녀석이 질병이 아니라 그냥 몸에 있는 녀석이라니 마음이 좀 너그러워진다. 

*이제 수술 및 입원 후기로 돌아올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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